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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라는 사람] 니체가 병을 겪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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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4-04-24 10:48 조회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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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병을 겪는 방법



3. 질병이야기(1)

니체가 병을 겪는 방법

안 상 헌

니체와 병

니체는 정말 많이 그리고 심각하게 아팠다. 안통眼痛, 성병, 낙마로 인한 골절, 이질 혹은 디프테리아, 위장병, 신경통, 정신병, 게다가 심약한 마음까지. 특히 니체는 신경이 예민했다. 그의 신경은 날씨의 모든 높낮이와 압력에 따라 즉시 신체 기관에 어떤 아픔이 있을지 예보하고, 자연의 폭풍에 대해 같은 박자로 대처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리면, 그의 원기가 저하되곤 했다(“구름 낀 하늘은 나의 기분을 저하시킨다”). 구름이 두텁게 끼어 있으면, 그의 장기臟器에 곧장 반응이 왔다. 비가 오면 “우울해지고”, 습기가 많으면 전신이 나른해졌으며, 날이 개면 생기가 나고, 해가 뜨면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 겨울은 일종의 신경 발작이자 죽음과도 같았다.(슈테판 츠바이크, 『니체를 쓰다』, 원당희 옮김, 세창미디어, 2015, 35쪽)

이런 몸과 마음의 소유자였기에 니체는 한편으로 자신의 질병 치유를 위해 온갖 방법을 활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휴학, 수시로 떠나는 휴양 여행, 장기 요양, 교수 조기 퇴직 등등. 다양한 임시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모든 걸 버리고 자기 몸에 맞는 기후와 공기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휴양 중심의 삶을 살아간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일상과 식습관에 대한 실험과 기록을 꽤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차는 몸에 좋은 효과를 내기 위해 특정한 상품과 특정한 강도여야 하고, 육류는 몸에 해로워서 피해야 하며, 채소는 특정한 방식으로 조리되어야 했다. 또 커피는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니 삼가야 하고 소식보다는 배부르게 먹는 것이 소화에 더 좋다(위장이 어느 정도 차 있어야 위장 전체가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나름의 이유) 등등. 휴양 중심의 삶을 살며 자신에 맞는 양생법을 찾아가며 살았음에도 결국에는 회복되지 못한 건강 상태. 회복은커녕 40대 중반 이후 약 10년간 이어진 정신병동 생활. 그 후 니체는 56년간의 삶을 마친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표현을 빌리면 “그 길고 긴 유랑생활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유쾌하게 즐거움을 나눈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여인의 따뜻한 알몸을 함께 한 적이 없었다.”(슈테판 츠바이크, 『위의 책』, 2015, 25쪽) 이 대목에서 많은 중년 남성들이 혀를 찬다. 자신은 니체보다 낫다는 듯이. 이쯤되면 자신의 입으로 건강을 말하기는 좀 이상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생은 이렇게 병자로 살았으니 다음 생에는 건강하게 태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 하나쯤 남기고 죽었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고통스러운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치 전도의 철학자 니체는 달랐다. 니체는 사교에 국한된 친구는 없었지만, 삶의 단계 단계마다 자신의 삶을 자극하고 촉진한 친구들이 있었다.(「니체의 친구들, 그리고 철학자의 우정론」 참고) 특히 이렇게 많이 아팠던 니체였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읽고 있는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특히 삶의 후반부에는 나에게서 병을 앓은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나는 심하게 병을 앓았던 시기에도 병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니체이 사람을 보라)라는 말을 남긴다. 정신병자의 착란인가(실제로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다). 아니면 ‘역시 가치 전도의 철학자, 니체!’인가?

 

병이 생성한 니체의 사유와 저술

내 병은 내 모든 습관을 완전히 바꿀 권리를 주었다. (중략내 눈은 책벌레와 관련된 모든 습관에 작별을 고하게 했다쉽게 말해 문헌학과 작별 인사를 고했다나는 에서 벗어났다. (중략그것은 나에게 내린 최고의 축복이었다.! 제일 밑바닥에 있던 나 자신끊임없이 다른 자아의 목소리를 듣느라 침묵을 강요당했던(독서를 말한다!) 나 자신이 수줍어하며 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서서히 깨어났다그리고 마침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니체이 사람을 보라)

 

니체는 병으로 인해 삶이 파괴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병은 오히려 자신의 모든 습관을 바꿀 권리는 주었다고 말한다. 그는 병으로 인해 자신의 습관을 바꿀 수 있었기에 흔히 건강하기만 한 사람들, 혹은 건강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절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고 글을 쓸 수 있었다. 니체가 겪은 병,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저작들과 철학적 사유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두통頭痛; 고전과 산책&음악과 자연 속으로

남아있는 니체의 사진을 보면 겉으로는 건강해 보인다. 적어도 청장년기까지. 하지만 1854년(11세) ‘돔 김나지움’에 입학한 니체는 심한 두통으로 휴학했다. 이 두통은 이후 점점 증세가 악화되었고, 정신착란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매우 활발한 정신적 활동을 하며 보냈던 평생 계속 반복되었다.(베르너 슈텍마이어, 『니체 입문』, 홍사헌 옮김, 책세상, 2022, 17쪽) 그는 늘 맑은 머리 상태로 사유하고 저술한 것이 아니라, 학창 시절부터 거의 대부분 심한 두통을 앓는 과정에서 고전어와 고전을 공부하고 음악과 자연에 대한 감성을 키웠으며, 이를 글로 쓰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능력을 키웠다. 이후에도 니체는 산책을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곧 그의 두통이 평생동안 고질병으로 따라다녔다는 것을 말한다. 학창 시절부터 니체는 두통이 찾아올 때마다 걸었고, 그때 떠올랐던 생각들을 음악과 자연에 대한 감성과 잘 결합하여 글로 남겼다. 그것이 그의 철학이 되었다. 하여 니체는 책상에 앉아서 생각한 것들은 모두 헛된 것이며, 걸으면서 생각한 것들만을 진정한 사유라 말하는 철학자가 된다.

안통眼痛; 탁월한 독서가, 그러나 책과의 이별

성인이 된 니체. 1865년(22세)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리츨 교수의 지도하에 시작한 고전문헌학 공부와 쇼펜하우어의 발견에 힘입어 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시기 니체는 육체적으로는 아주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된다. 소년 시절에 나타났던 병증들이 악화되었으며, 류머티즘과 격렬한 구토에 시달리고 매독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 시기 니체는 리츨 교수의 지도하게 고전문헌학에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24세에 스위스 바젤 대학의 교수가 된다. 1867~1868년 부르크 야전 포병 연대의 기병 부대에서 소위 ‘1년 임기의’ 자원병으로 군 복무를 한다. 이때 니체는 말에 올라타다가 흉골을 심하게 다친 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린다.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모르핀을 맞고, 5개월간 의사의 치료를 받는다.(베르너 슈텍마이어, 『위의 책』, 25쪽) 위생병 시절 전쟁터에서 악성 장염에 걸렸던 니체는 곧 회복은 되었지만, 다시 위장병을 앓았다. 오랫동안 초기 증세를 보이다가 1873년 이후에는 심각하게 되고 또한 빈도수도 많아졌다. 특히 눈의 통증을 동반한 심한 두통의 발작과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것과 같은 구토, 배멀미 같은 것으로 인해 병상에 묶여 있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다. 한두 번 그는 장시간 실신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청년 시절 이래의 근시는 만성 안질이 되었다. 여러 가지 발작 이외에도 오랜동안 머리에 지속적인 고통과 압박을 받았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그가 구술하는 것을 받아쓰는 도움이 그의 정신적 생활에서 점점 더 큰 역할을 하였다.(칼 야스퍼스, 『니체-생애』, 강영계 옮김, 까치, 1977, 133~134쪽)

하지만 이 시기를 거치면서 니체는 ‘고전문헌학자 니체’가 아닌 ‘철학자 니체’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꾼다.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이 이 시기에 저술된 저작들이다. 이 시기 겪은 다양한 질병으로 인해 니체는 더 이상 책상에 앉아 오랫동안 책을 읽는 고전문헌학자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학문의 방법론과 글쓰기 스타일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안통眼痛은 ‘고전문헌학자 니체’를 ‘철학자 니체’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꾼 결정적 계기가 된다.

두통과 안통의 심화; 글쓰기 스타일의 변화

1879년 5월 니체는 극심한 두통과 안질을 치유하고자 제네바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제네바에서의 요양은 효과가 없었고, 이어서 병이 더 악화했다(“나는 이제 더 이상 회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여름 학기에 강의할 계획을 공고하지만 결국 강의를 할 수 없었다. 교수직 퇴직을 신청했고 대학 측이 니체의 상황을 이해하여 이를 수용했으며,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받았던 월급의 3분의 2에 달하는 금액을 여러 기관의 기금으로부터 우선 6년 동안 연금으로 받게 되었다.(베르너 슈텍마이어, 『위의 책』, 2022, 59~60쪽) 이렇게 니체는 교수직을 포기하고 방랑 생활이 시작되었다.(“한때는 교수였지만, 이제 ‘정처 없이 떠도는 피난민이다”). 두통과 안통의 심화. 그로 인해 안정된 교수직을 그만둘 정도라면 보통 사람들은 인생 끝이라고 선언한다. 병치레와 휴식 이외의 삶은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니체는 이 시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권』과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인간적인 2권)을 저술한다.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니체의 아포리즘적 글쓰기가 본격화된다. 대학이라는 안정된 공간, 그렇지만 답답한 공간을 떠나 자신의 몸에 맞는 기후와 풍토를 찾아 여행하면서 낮에는 걷고 생각하고 저녁에는 낮에 걸으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남기는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오래 읽고 길게 쓰는 것이 불가능한 신체가 된 니체! 그는 이러한 조건에서도 사유와 글쓰기를 멈추기 않았다. 멈추기는커녕 그를 대표하는 사유와 글쓰기 스타일을 새로 만들어냈다.

병과 사유, 그리고 글쓰기의 만남

이렇게 시작된 니체의 사유와 글쓰기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최고의 걸작을 탄생시킨다. 1880년 2월부터 1883년 극심한 불면증의 나날을 보내면서도 『아침놀』(1881)과 『즐거운 학문』(1882) 출판한다. 1883년 1월 말에 니체는 열흘 동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부 ‘서설’과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집필한다. 이 시기 니체는 자신이 견뎌내며 살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찾아 남부 유럽의 여러 곳을 떠돌아다닌다. 지속적인 휴양 여행, 알프스의 신선한 공기,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온화한 기후도 육체적인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1879년 건강이 악화되어 3월 19일 강의를 중단하고 제네바로 휴양을 떠났으며, 5월에는 바젤 대학에 퇴직 의사를 밝힌다. 9월에 나움부르크로 오기까지 비젠과 장크모리츠에 머무른다. 이 시기 니체는 시와 음악, 그리고 철학적 사유를 함께 담아낸 자신의 사유와 문체를 완성한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사유와 문체의 탄생을 이렇게 만들어졌고, 그 실험의 결실을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탄생한다.

1887년 악화된 건강은 6월에 살로메의 결혼 소식을 접하고서 우울증이 겹치는 바람에 심각해진다. 이런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식은 명료했다. 이 시기는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바그너의 경우』, 『이 사람을 보라』 등 후기 저작을 완성한다. 니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후 자신의 사상을 명료하게 때로는 더 깊고 디테일하게 그려낸 저작들이다. 특히 이 시기에 만난 루 살로메의 경우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힘에의 의지 사상을 촉발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니체는 루와 함께 한 산책길에서 자신의 사유를 쏟아냈고 그것을 받아 새로운 영감을 자극하면서 이 둘은 연애를 했다. 비록 짧은 연애 기간이었고, 이 둘은 헤어졌지만 그 과정은 분명 한 철학자의 사유를 촉진하고 완성한 계기가 되었다.

            인생 후반기, 니체는 스스로의 삶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건강과 삶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통제하여 나 자신을 다시 건강하게 만들었다이를 위한 조건은 — 모든 생리학자가 인정할 것이지만 — 근본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이다전형적으로 병약한 인간은 건강해질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기는 더욱 어렵다반대로 전형적으로 건강한 사람에게 병은 삶을 위한더 풍요로운 삶을 위한 효과적인 자극제가 될 수 있다.”(니체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이 사람을 보라박찬국 옮김, 2023, 29)

 

니체의 병과 일상의 변화, 그리고 그의 저술을 통해 볼 때 그는 분명 병이 자신의 모든 습관을 되돌아보게 한 것이 맞다. 그의 병은 그의 일상과 사유와 글쓰기를 바꾼 것이 몇 가지 지점에서 확인된다. 병이 바꾼 일상과 사유와 글쓰기가 그를 지금의 철학자로 만들었다. 나아가 왜소한 현대인을 커다란 건강을 획득한 강한 인간으로 바꾸고자 한 그의 철학적 소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아팠지만 병약한 인간은 아니었으며, 그는 자신의 병을 삶을 위한,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한 자극제로 만들 수 있었던 전형적으로 건강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병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통제력을 잃어버리기는커녕 자신의 일상과 사유와 글쓰기를 가장 독특하고 생생하게 만들어냈다. 그러니 그의 삶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아는 것과는 달리 언제나 생생(生生)했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적 사유와 저술 활동을 스스로 평가하면서 “병자의 관점에서 더욱 건강한 개념과 가치들을 음미한다는가 거꾸로 풍부한 삶의 충일과 자기 확신으로부터 데카당스 본능의 은밀한 작업을 내려다보는 것, 이런 일을 나는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서 연습했으며 그에 관한 진정한 경험을 쌓았다. 내가 어떤 것에서 대가가 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이렇게 관점을 전환하는 것에서다. 지금 나는 관점을 전환하는 것을 완전히 습득했으며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야말로 나만이 ‘모든 가치의 전환’을 수행할 수 있다는 첫 번째 근거다.”(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3, 28쪽)고 말한다. 결국 니체는 자신의 질병으로 인한 병자의 관점이 삶에 대한 모든 가치를 전환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니체의 많은 말이 정신병자의 착란이 아니라 현대인에게 던진 선물이 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니체는 병을 삶의 관점에서 사유하면서 철학적 의사가 되었기에 가능했다. 니체의 아포리즘들은 그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병이 없어도 병자가 되는 현대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크다.

니체는 1889년 1월 3일(혹은 1월 7일)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졸도하면서 심각한 정신이상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후 10년간 대부분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다 1900년 8월 25일 정오경에 사망했다. 이 시기 니체는 늘 헛소리를 하거나, 때론 자기 배설물을 먹고, 통제 불능 상태를 자주 겪었다. 이전 시기와는 달리 특별한 저술도 없다. 이렇게 니체는 1900년 8월 25일 정오경에 사망한다. 쓸쓸하지만, 이렇게 니체라는 한 사람은 떠났다. 그러나 그의 사유는 많은 저술과 유고로 남아있다.

나도 니체처럼 병을 겪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니체를 읽고 쓰는 나(혹은 우리), 나아가 현대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병이 삶을 잠식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니체처럼 병이 삶을 생생하게 할 수도 있다. 최근 나에게도 나름 심각한 병이 찾아왔다. 그 일화를 소개하면서 내가 겪은 일상과 생각의 변화도 함께 정리해본다.

“안상헌 님, 목디스크가 맞네요~ 이 정도면 많이 아팠을 텐데…” 아찔했다. 지난 몇 년간, 특히 2022년 이런저런 관련 증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때 흔히 말하는 오십견五十肩(의학 용어는 동결근, 혹은 근감소증)이 왔고, 나이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거쳐 가는 과정이라 여기며 병원 치료나 약물 복용 없이 잘 이겨나가나 싶었다. 착각이었다. ‘어떻게 하다 내 몸이 이 지경이 되었지……’ 많은 생각이 올라왔다. 죽을 병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활을 모두 포기해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통증 때문에 잠을 잘 수도, 책을 볼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다. 아침이 가장 고통스러웠으며, 책은 10분을 보기가 어려웠고, 작년 한 해 동안 정성껏 해오던 『숫타니파타』 필사는 포기해야 했다. 자판 작업은 한동안 어려웠다. 일주일에 4~5회 정형외과와 한의원을 다녔다.

이렇게 보낸 3개월. 다행히 병원에서 “이번은 잘 관리하시면 회복되겠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병원에서 처방한 약은 전혀 먹지 않고, 한의원도 가지 않으며, 물리 치료나 도수 치료 횟수도 점차 줄이고 있다. 이제 일상을 하나하나 회복 중이다. 책도 조금씩 보고, 글도 조금씩 쓰고, 무엇보다 ‘수면의 질’이 달라지고 있다. 저녁은 피곤하고 아프지만 자고 나면 몸과 마음이 많이 가벼워진다. 조금 더 지나면 내 몸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것이 가장 위험한 생각이라 한다. 그 예전이란 것이 어떤 상태인지도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혹 그렇게 기대하다간 그 기대가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충고가 가장 많이 들린다. 완전히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고 일상을 살만한 상태를 잘 만들어 보라는 말에 나도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부는 이제 끝이 아닌가? 몸도 좋지 않은데 뭔 공부를 한단 말인가? 먹고 사는 일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도 아니고,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가족이 굶어 죽는 것도 아닌 데. “이제 객지에서 고생 그만하고 집에 내려오시지~”라는 말도 빈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공부를 그만둘 생각도 없고, 집에 내려가 편안히 여생을 보낼 생각도 없다. 지난 3개월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주말이면 가장 편한 조건이 갖추어진 집에서 편하게 쉬긴 했지만, 그 외 시간은 규칙적으로 연구실에 출근했다. 20~30분 정도 앉아있다가 바닥에 누워 쉬거나 스트레칭을 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꼬박꼬박 밥 먹고, 산책하고, 잠깐 앉아있다가 오후 3시가 되면 제2 산책을 다녀왔다. 4시가 되면 퇴근하고 병원에 가서 치료받는 것이 나의 하루일과였다. ‘또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냐’라고 놀리는 사람, ‘산책하러 연구실 오느냐’, ‘벌써 집에 가느냐’고 놀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분들과 관계가 멀어지기는커녕 과거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다른 분들에게 더 많이 보여주니, 이분들도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시기 이런저런 일로 곰샘에게 얻어터져 방황하고 있는 분들의 마음도 예전과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언제 쫓겨나나 싶었겠지만 이번에는 ‘이렇게 또 각자 새 길을 찾아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탁구장에서는 오른팔은 아파서 탁구를 칠 수 없으니 왼손으로라도 같이 치곤 했다. 잘하면 해도 해도 탁구가 잘 늘지 않는 분들을 위한 ‘튼튼 탁구 교실’ 운영도 내 역할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는 몸의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가끔 산에도 가야겠다 싶어 함께 산에 가는 친구들도 몇몇 만들었다. 알고 보니 이들도 모두 뭔가 앓고 있었다. 몸이든 마음이든 아니면 둘 다. 그리고 나의 병을 기회로 그동안 그저 인사 정도만 하고 데면데면 지냈던 도담 선생님과도 내 몸과 공부, 그리고 삶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후 겉핥기식으로만 알고 있었던 의역학 공부도 좀더 관심이 간다. 도담 선생님도 중년 남자가 연구실에서 오래 잘 버티고 있는 것이 좀 신기했던지 앞으로 가끔 만나 식사도 하고 술도 한 잔씩하고 기회가 되면 세미나도 같이 하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배울 것이 많은 분들과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니 기분이 참 좋았다. 이렇게 나의 병은 나를 공동체에서 멀어지게 하기보다는 나를 공동체에 더 깊이 들어오게 했다. 앞으로 혹 공부를 못하게 되더라도 ‘산재’라고 우기고 연구실은 자주 나올 생각까지 했다. 이제 좀 뻔뻔해지기, 혹은 유머로 나의 일상의 관계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유머’와 ‘뻔뻔함’, 공동체적 신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완전히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고 일상을 살만한 상태를 잘 만들어 보라는 말에 나도 동의하고 있다.

공동체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내가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몸이 아무리 좋아진다 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잠시 돌아갈 수는 있겠지만 과거의 습관대로 생활하면 금방 또 병원을 전전해야 할 것이다. 지난 3개월 책을 읽는 일은 너무 어려웠지만 그래도 가장 마음 편했던 과제가 암송 과제였다. 산책 시간이 2배로 늘어났으니 암송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렇다. ‘내가 100세까지 살지 못살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사람이 오래 살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60대 이후 어려운 책을 많이 읽는 공부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참에 잠깐 읽고, 많이 생각하고, 조금씩 외워보고, 많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함께 해보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니체야말로 이렇게 했던 사람이 아닌가? 책을 읽을 수도, 한 자리에 오래 앉아있을 수도 없었기에, 하루 7시간 이상을 산책하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메모하고 정리한 것이 그의 저술의 절반 이상이다. 주역도 마찬가지 아닌가? 주역의 사유와 언어야말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전쟁터와 지지고 볶는 삶의 생생한 현장을 사유하면서 길어 올린 이치들이 아닌가. 그러니 앞으로 주역과 니체를 중심으로 한 나의 공부가 ‘아프고 늙어서 눈이 침침해져 공부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적합한 내용과 방법을 개발할 수 있다면 최고의 성과가 아닐까. 이전에 공부는 총명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내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공부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고 약간 놀라운 것은 아내의 반응이다. 늘 집에 왔으면 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던 사람이 최근 이런 말을 했다. ‘환갑 전에 왈츠의 리듬이 살아있는 글을 써보라’는 미션을 받았다는 말을 한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이제 주말이나 특히 방학에는 집에 오지 말고 감이당 사람들이나 서울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좋아하는 산에도 가고 놀기도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당신이 ‘하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을 했다. 어쩌면 당신의 목디스크는 지금까지 당신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생긴 것일 수도 있다는 말과 함께. 그렇다! 나에게는 세상의 시시한 것들을 너무 ‘알로’(아래로, 또는 하찮게 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습관은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고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이런 나의 습관이 아내의 눈에도 들어온 것이다. 어쩌면 30년 가까이 함께 살면서 우리 관계를 가장 힘들게 했던 부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이렇게 놔뒀다간 병을 절대 고칠 수 없음을 알고, 나름 크게 마음을 쓴 것이다.

니체에 비하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조차 잡을 수 없는 사소한 병이지만 나는 이렇게 병을 앓았다. 그리고 이렇게 또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많은 과제가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니체를 빌어 나도 이런 말을 하고 그것을 증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병은 나의 모든 습관을 돌아보게 했고, 내가 새롭게 세상을 감각할 수 있게 했다’라고, 또 ‘나도 아팠고, 지금도 아프지만, 그 일로 병자가 되지는 않았다’라고.

그 힘은 앞으로 (공부)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어가는지, 그 안에서 새로운 공부 내용과 방법을 어떻게 만들어 내어 실험하는지, 이 과정에서 나의 습관과 감각을 어떻게 바꿔 나가느냐에 따라 증명될 것이다. 이렇게 나의 습관을 돌아보고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 가고 있으니, 니체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병은 삶의 좋은 자극제가 된 것이 맞다. 그러니 공부의 공간에 모인 우리 모두 니체처럼 자신의 병과 세상의 병을 겪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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