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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_종교의 경계를 넘다] 스승과 브라마차리와의 만남 그리고 지성의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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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4-04-13 10:01 조회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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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브라마차리와의 만남 그리고 지성의 폭발

1부. 방황에서 지성으로, 지성에서 영성으로 1-2

스승과 브라마차리와의 만남 그리고 지성의 폭발

이 경 아

두 명의 스승을 만나다

토머스 머튼은 자신의 과오로 영국을 떠나야 했다. 그는 미국에서 외조부모와 함께 지내게 되었고 1935년 2월, 콜롬비아 대학에 입학했다. 누구나 자신에게 좀 더 맞는 곳이 있듯이, 머튼은 옷차림이나 생활에 있어서 캠브리지의 격식 보다 콜롬비아의 자유분방함을 좋아했다. 특히 콜롬비아 대학의 표어 ‘주님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는 머튼이 이곳에서 어떤 삶을 보낼지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의 비참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과 돌아가신 어머니의 헌신적인 기도 덕분인지 머튼은 운이 좋게도 두 명의 스승을 만난다. 그중 한 명이 콜롬비아 대학 첫 수업에서 만난 마크 밴 도렌 교수다. 그는 세익스피어 전문가로서 문학을 가르쳤고, 1940년, 퓰리처상 시문학상을 받은 시인이자 작가다. 마크 교수는 늘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소크라테스처럼 질문을 통해서 학생들 안에 있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냈고, 학생들은 답변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갔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강요하지 않았고, 책 읽는 법을 가르침으로서 학생들이 스스로 인식을 확장하도록 이끌었다.

한편으로 머튼은 혈기가 왕성했던 터라 콜롬비아에 오면서 물질적, 정치적 성공을 꿈꾸었다. 그는 마크 교수를 존경하면서도 새 학기에는 천성적으로 좋아했던 시나 문학보다는 성공에 도움이 되는 역사나 정치, 사회학 쪽으로 수강 신청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역사학 수업을 들으러 간 곳이 공교롭게도 마크 교수의 세익스피어 수업이었다. 강의실을 잘못 알고 간 거다. 머튼의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마크 교수에게 향해 있었다. 머튼은 강의실을 나가려고 하다 다시 돌아와 마크 교수의 수업을 들었고 수강 신청을 아예 다 바꾼다. 이것은 내가 대학에서 들은 최상의 강의였고내가 인간에게 진정으로 근본적인 것들곧 인생·죽음·시간·사랑·슬픔·두려움·지혜·고통·영원에 대해 참으로 뜻깊은 말을 들은 것은 그곳에서뿐이었다.”(『칠층산』, 토머스 머튼, 379p) 성공에 대한 고민만큼이나 내적 고민이 컸던 머튼은 인간의 욕망과 희망, 두려움의 원천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존재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마크 교수의 통찰력과 정직함에서 받은 영감은 머튼의 글쓰기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머튼이 대학원 영문과에 등록하고, 영문과 교수가 되고 훗날 사제가 되기로 마음먹는 데도 기여한다.

또 한 명의 스승은 대학원에서 만난 가톨릭 신자인 다니엘 윌시 교수다. 이 무렵 머튼은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하게 되는데, 자신의 마음을 신부에게 털어놓기 전에 의논할 상대가 필요했다. 그때 문득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평소에 친구들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친숙했던 윌시 교수를 떠올렸다. 무언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거나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우리의 무의식은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윌시 교수는 성 토마스와 둔스스코투스 강의를 했는데 마크 교수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윌시 교수는 가톨릭 여러 학파와 학설 간의 차이를 넘어서 전체적인 시각에서 가톨릭 철학과 신학을 보고 있었다. 그는 하나의 학설에 매몰되지 않았고 여러 학설이 같은 진리를 다른 관점에서 고찰하며 상호 보완하고 있음을 알았다. 윌시 교수의 이런 시각은 머튼이 후에 가톨릭만이 아니라 동서양의 종교와 사상을 받아들이고 교류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머튼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미루기로 했기에 윌시 교수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사 논문에 관해 의논하는 과정에서 윌시 교수는 머튼에게 사제 성소가 있음을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영적·신비적 성향이 있음을 간파한다. 두 스승과의 우정은 머튼이 수도원에 들어가고 나서도 계속된다.

브라마차리가 알려준 빛

머튼은 콜롬비아에서 스승만이 아니라 인생 텍스트를 만나게 된다. 1937년 봄, 그는 주머니에 있는 동전을 쓰려고 책방에 갔다가 우연히 에티엔 질송의 『중세 철학의 정신』이라는 책을 샀다. 에티엔 질송은 마크 교수와 윌시 교수 둘 다와 친분이 있었기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고, 프랑스 중세 문학 강의를 듣고 있었기에 공부에 도움이 될까 해서 샀다. 기대에 부풀어 첫 장을 여는 순간 ‘오류없음…교회 인가’라고 적힌 라틴어로 인해 화가 나 책을 지하철 창밖으로 던져 버릴뻔했다. 교회 인가라는 단어가 머튼에게 중세의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걸 그는 이 책을 다른 책보다 더 깊이 읽었다.

머튼은 생애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할 정도로 이 책에서 충격을 받는다. 그동안 그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믿는 것처럼 하느님이란 자신들의 욕망으로 만들어낸, 질투하고 복수하는 변화무쌍한 인격적 존재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이 책에서 하느님에 대해 미묘하고도 정확하게 제시되어있는 개념을 발견했다. 하느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자존성’이라는 개념인데, 하느님이란 자신의 힘에 의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였다. 하느님은 여러 존재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스스로 존재하며 만물의 바탕이 되는 ‘존재’ 그 자체였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하느님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게 되면서 스콜라 철학과 가톨릭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자존성’이라는 개념인데, 하느님이란 자신의 힘에 의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다 그가 가톨릭에 대해 결정적으로 마음을 여는 사건이 생긴다. 흰두 수도승인 브라마차리 박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친구 세이머의 아내가 시카고 대학에서 브라마차리와 함께 철학을 공부했기에, 세이머는 그녀를 통해 자연스럽게 박사를 알게 되었고, 머튼도 그를 만나게 되었다. 브라마차리 박사는 1933년 시카고 세계 종교회의에 초대되어 무일푼으로 혼자서 미국에 왔다. 방글라데시 원시림 근처에서 태어나 선원에서 자란 그는 난생처음 비행기를 탔는데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회의가 끝난 뒤였다. 그의 독특한 옷차림인 흰옷과 터번은 당시 미국인들에게 생소했던 터라 그는 여러 종교단체와 사회단체, 학교에 강사로 초청을 받았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머튼이 만났을 때는 이미 그가 미국에 온 지 5년이 지났고, 시카고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딴 후였다. 머튼은 세이머와 함께 뉴욕 중앙역에 그를 마중 나갔다. 그들은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세이머는 브라마차리가 하늘을 날고 물 위를 걷는다고 하면서, 지나가는 고양이를 보고 사실은 브라마차리가 변신한 것일 수도 있다고 허풍을 떨었다. 머튼에게는 이것이 허풍으로만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힌두 수도승은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머튼과 브라마차리는 만나자마자 친해지는데 특이한 점은 머튼에게 자신의 신앙을 설명하려 하거나 힌두교로 개종시키려고 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 대신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머튼에게 평생 잊지 못할 한 가지 충고를 한다. 머튼에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토머스 아 켐피스의 『준주성범』을 꼭 읽으라고 한 것이다. 머튼은 그동안 기독교인들이 전도하는 것을 보면서 종교란 포교하는 거라 여겨 왔는데 자신의 종교적 전통 안에서 빛을 찾으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도 힌두 수도승한테. 머튼은 동서양의 사상적 차이에 충격을 받는다. 힌두 수도승은 시카고 대학에서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따고, 머튼은 그리스도교 전통으로 돌아가라는 충고를 듣는 아이러니!

머튼은 가톨릭 문화권에서 살아왔지만, 그동안 물질을 추구하며 사는 주변의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가톨릭을 의심하고 거부했고, 동양 신비주의가 더 우월하다고 여겨왔던 터였다. 그런데 자신의 전통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다니. 머튼이 얼마나 기뻤을까? 그에게는 로마의 어느 성당 모자이크에서 만난 예수님에 대한 감동과 라틴어 신약성경을 사서 읽은 기억, 그날 밤 호텔 방에서 아버지 현존을 빛으로 체험한 경험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또한 아버지에게 배운 종교 교육이 몸에 새겨져 있었다. 머튼은 그동안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 깊숙이 흐르는 크리스찬의 피를 느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브라마차리를 저 멀리 인도에서 이곳까지 오게 하신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이 말을 나에게 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여겨진다”(칠층산, 414p) 고 할 정도로 브라마차리의 충고는 머튼에게 깊이 다가왔다. 이것을 계기로 자신의 방향을 가톨릭으로 완전히 튼다.

이후에 브라마차리 박사는 1936년 런던에서 열리는 세계 종교대회에도 참석하는데 그때 참석했던 학자 중에는 후에 머튼이 선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활발하게 교류하고 존경했던 D.T suzuki 가 있었다. 당시 교토 오타니 대학의 불교철학과 교수였던 스즈키 선사는 ‘무지와 카르마’에 대한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 당시 학자들 간의 종교간 교류는 어느 정도 있었지만, 종교인들 간의 직접적인 교류는 여전히 장벽이 높았다. 1893년 시카고에서 처음으로 세계 종교대회가 열렸을 때, 당시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구인 캔터베리의 대주교는 이 회의를 지지하기를 거부했다. 심지어 1936년 코스모랑 대주교는 에드워드 8세에게 기독교가 유일한 ‘진정한 종교’이기 때문에 런던에서 열리게 될 세계 종교회의를 주재하지 말라고 충고를 하기도 했다. 이 당시 서구 기독교는 여전히 타 종교에 배타적이었다.

브라마차리 박사는 1939년 초 인도로 돌아간 후에도 수도승으로 살면서 종교적인 주제로 글을 쓰고 강의하고, 힌두 소수민족을 지원했다. 그의 사망 기사는 1999년 11월 1일자 뉴욕 타임즈에 실렸다. 힌두교 학자 마하남브라타 브라마차리(Mahanambrata Brahmachari) 1999년 10월 18일 캘커타에서 사망. 향년 95세.

 

거침없는 지적 열정

머튼은 콜롬비아 대학에서 스페인어, 독일어를 비롯해 다양한 것들을 배우는데 외국어는 어렸을 적부터 라틴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까지 배웠다. 그는 단테의 신곡은 이탈리아어로 읽고, 마리탱의 형이상학 서론은 프랑스어로, 성녀 데레사의 자서전은 스페인어로 읽을 정도로 언어에 소질이 있었다. 머튼은 켐브리지에서도 콜롬비아에서도 친구가 많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콜롬비아에서 만난 친구들은 모두 글을 썼고, 영적이라는 점이다. 특히나 머튼이 콜롬비아에 입학하던 1935년은 ‘지성의 발효’ 상태였다고 말할 정도로 수재들이 많이 들어온 해였다. 콜롬비아의 자유로운 면학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머튼만이 아니라 명석하고 창의적인 인재들이 많았다.

당시 콜롬비아에는 다양한 학교 잡지가 있었는데 머튼은 잡지에 글을 쓰면서 랙스와 로버트 집니, 로버트 지루 등 모두 글을 쓰고 창의적인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머튼은 이 친구들과 함께 일하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창의성을 점점 키워나갔고 후에는 학교 연감의 편집장까지 맡는다. 그는 물론 공부하고 글만 쓰면서 지낸 것은 아니다. 광고 대행 사무실에서 만화를 그리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라틴어 과외도 하고, 학교 크로스컨트리팀에도 등록해서 운동도 했다. 피카소와 샤갈을 좋아했고, 재즈에 심취해서 재즈바를 다니기도 했다. 유머있고, 지적이고, 활발하면서 솔직한 머튼은 인기가 많았고 연애도 계속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1년 만에 석사 학위를 받고 영문학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또한, 머튼은 『중세 철학의 정신』을 읽고, 브라마차리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가톨릭 철학과 사상에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보통 어떤 종교를 가질 때 가족이나 지인의 소개로 입문하게 되는데 머튼은 지성으로 접근했다. 그의 지적 열정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브라마차리가 추천한 토마스 아 켐피스의 『준주성범』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또한 예수회 회원이었던 제라드 멘리 홉킨스의 시와 자서전을 읽으면서 예수회와 사제에 대한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고 점점 가톨릭 생활에 흥미를 가졌고, 형이상학적 시인들, 특히 17세기 영국 종교 시인인 크래쇼를 읽으면서 그의 개종을 연구했다. 이름만 들어도 어려울 것 같은 책들을 읽으며 그는 점점 가톨릭과 예수회에 대한 존경심을 갖는다.

이뿐 아니라 대학원 논문을 준비하면서 초자연적이며 신비적인 18세기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해서도 탐구했다. 윌리엄 블레이크를 연구하면서 자크 마리탱의 『예술과 스콜라 철학』을 읽게 되는데 자크 마리탱은 윌시 교수와의 친분으로 인해 직접 만나보기도 했다. 머튼에게 자크 마리탱은 말을 걸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위안을 주는 성인(聖仁) 철학자였다. 그는 마리탱의 책에서 ‘실천적 지성의 덕행’이라는 개념을 발견했다. 책에서 얻은 지식이 개념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덕행’이라는 일상에서 욕망을 조절하는 행동과 같이 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로 인해 머튼은 담배 연기와 술에 취한 채 밤을 새우며 신비주의와 하느님에 대해 친구와 토론하는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성 면에선 조금 나아졌지만 실천까지는 이르지 못했음을 알게 되고 지성이 욕망과 욕구에 예속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일요일에 데이트를 포기하고 평생 처음 미사에 나가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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