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라는 사람] 니체의 친구들, 그리고 철학자의 우정론 > MVQ글소식

MVQ글소식

홈 > 커뮤니티 > MVQ글소식

[니체라는 사람] 니체의 친구들, 그리고 철학자의 우정론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4-04-01 10:06 조회182회 댓글0건

본문

니체의 친구들, 그리고 철학자의 우정론

2. 친구이야기

니체의 친구들, 그리고 철학자의 우정론

안 상 헌

 

니체와 친구들! 왠지 낯선 이미지이다. 우리에게 친구들과 유쾌하게 웃으며 공부하고 놀고 있는 니체의 모습은 낯선 풍경이다. ‘니체’라는 말에는 왠지 친구도 없고, 요즘 말로 하면 거의 왕따 혹은 히키코모리를 연상하기도 한다. 그래서 고독에 빠지고, 결국은 병든 철학자의 이미지 등. 니체와 친구에 관한 가장 흔한 이미지이다. 그럴 만도 하다. ‘살아있는 사람과는 사귀지 않는다’, ‘최상의 적이 최고의 친구’, ‘서로를 가장 잘 모르는 사이가 친구’, ‘서로에게 유령과 같은 존재가 친구’라는 등. 니체는 친구 혹은 우정에 관해 우리의 통념과는 매우 다른 독설을 남겼다. 그것도 딱 오해하기 좋은 말들로. 하지만 니체는 어린 시절부터 40대 중반, 공부와 저술 활동을 멈추기까지 친구들과 활발한 교류와 우정을 나누며 살았다. 친구들과의 교류와 우정은 니체의 삶과 그의 철학적 탐구에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니체는 바로 이 힘으로 우정의 철학자, 그것도 ‘커다란 웃음’을 말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니체에 대해 정반대의 이미지에 익숙한 것일까? 이 글은 니체와 친구들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나아가 니체라는 한 철학자의 우정론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공부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

니체는 소년 시절 활달한 정신과 신체의 소유자였다. 니체는 공부도 잘하고, 음악에도 재능 있는 똑똑한 학생이었다. 중등학교 시절 몇몇 동아리를 만들었고, 열심히 활동했다. 김나지움 슐포르타(독일의 대학진학을 목적으로 하는 인문계 중등학교 중 하나이며 니체는 이 학교에 1858년부터 1864년까지 재학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에 재학하는 동안 어린 시절 친구인 구스타프 크루크, 빌헬름 핀더와 문학단을 만들었다. 니체와 친구들은 이 문학 모임을 ‘게르마니아Germania’라고 이름 지었다. 그들은 1860년(16살) 여름 방학에 자렐강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탑에서 첫 모임을 열었다. 형제애를 다짐하며 수차례 맹세를 하고 값싼 포도주 한 병을 비워 건배를 나눈 뒤 빈 병은 잘레강으로 힘차게 던졌다. 그들은 시, 수필, 작곡 혹은 건물 설계도라도 매달 한 편씩 작품을 남기자고 다짐했다. 돌아가며 한 사람씩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면 나머지 둘이 필요한 부분을 친절하게 교정해주었다.(수 프리도, 『니체의 삶』, 박선영 옮김, Being, 2022, 67쪽) 소년 니체는 이 모임에서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이들은 문학만이 아니라 음악, 나아가 건축에까지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보면 특이하다. 하지만 소년들의 관심이 이렇게 다양한 것이 자연스럽고, 이 활동 과정에서 니체는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감각을 맘껏 키워갔을 것이다.

다음으로 니체는 본 대학교에 입학(1864년 10월)한 후 처음에는 순종적인 아들 노릇을 하느라 신학부에 입학했다. 가족들은 니체가 목사가 될 거라 믿었고, 어쨌든 니체는 그 믿음을 저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니체는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대해 너무 몰랐다고 생각했던 그는 그동안의 무지를 일깨우는 방법으로 ‘부르셴샤프트’ 가입을 선택했다. 1815년 처음 설립되었을 당시에는 독일 연방 전역의 학생들이 공유할 수 있는 자유 문화적 가치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연방 정부가 정치적인 면에서 그들이 선동적 단체로 변질되지 않도록 지적 활동을 철저히 막았기 때문에 산행이나 음악, 결투, 음주 외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수 프리도, 『니체의 삶』, 박선영 옮김, Being, 2022, 73쪽) 이런 이유에서 부르셴샤프트 활동은 니체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고, 이 동아리 조직은 나중에 독일 청년 조직인 히틀러 유겐트와 연합해 큰 오명을 남긴다. 별다른 활동도 없었지만, 나중에 니체의 사상이 독일국가전체주의와 연관되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활동이었다. 이런저런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이 경험은 ‘목사 가족’이라는 배경 때문에 별생각 없이 선택했던 신학을 포기한 니체가 세상을 향해 나아간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니체는 종교가 아닌 세상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후 니체는 본 대학교 시절 학문적 논의와 의회식 토론을 기대하며 ‘프랑코니아Franconia’에 가입했다. 이 학생단은 원래 빈회의(1814~15년) 후의 반동기에 독일 통일을 원하는 자유주의적·민족주의적 운동의 일익을 담당하던 존재였고, 현대적 의미로는 소위 야당의 입장에 서 있었다. 위로부터 적대시당했고, 지방에 따라 전면적으로 금지되기도 했다.(미시마 겐지이, 『니체의 생애와 사상-가면과 고독』, 남이숙 옮김, 한국학술정보, 2003, 49쪽) 따라서 이 조직은 학문적 논의와 의회식 토론보다는 노래를 부르며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 더 많았다. 프랑코니아의 모임은 언제나 시가행진으로 시작했다. 단체를 상징하는 띠를 두르고 모자를 쓴 그들은 마지막에 술집이나 어느 소작농의 오두막집으로 향했고, 그곳 주인들이 흥이 한껏 달아오른 그들을 반기며 독한 술을 내밀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었다. 이때 함께 했던 친구중 한 명이 <맥주저널 Beer Journal>의 편집장을 지낸 가스만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당시 학생들에게는 명예의 증표로서 결투로 생긴 상처가 필요했다. 니체 또한 그 증표를 얻으려고 프랑코니아와 결투 협정을 맺고 있던 단체의 한 학생과 산책 도중 결투를 제안했다. 증인으로는 파울 도이센이 참석했고, 둘은 호구를 쓰지 않고 3분 정도 칼날을 번쩍이며 검을 부딪치다가 니체가 먼저 콧등에 검을 맞아 살짝 피가 난 정도에서 명예의 훈장을 얻고 마무리되었다.(수 프리도, 『니체의 삶』, 박선영 옮김, Being, 2022, 73~75쪽) 혈기 왕성한 청년기의 객기가 느껴지는 활동에 니체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정치사회적 이슈들에 학문과 토론의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프랑코니아’에 가입했지만, 술과 방탕의 세월을 보냈던 듯하다. 더 웃긴 것은 결투 장면이다. 이렇게까지 힘자랑을 해야 하나 싶지만, 그것이 니체도 예외 없이 거쳐 간 혈기왕성한 청춘의 삶이다. 또한 그것이 당시 유럽 청년들의 풍조였다. 니체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 한 남자 대학생 청년’이었다.

니체는 자신의 고전문헌학 지도교수인 리츨 교수가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떠나자 그를 따라 라이프치히로 옮겼다. 이때부터 니체는 학문에 점차 빠져든다. 라이프치히에서 니체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공부를 시작했다. 프랑코니아보다 의견이 잘 맞는 ‘고전학회’라는 모임도 찾아냈다. 학교 근처에 있던 작은 카페를 일종의 문헌학 자료 나눔터로 만들고, 학술지나 논문을 책꽂이에 비치해놓기도 했다. 당시 꽤 유명한 ‘문헌학회’에도 가입해 고전문헌학과 관련된 크고 작은 모호한 주제에 관해 라틴어로 논문을 발표했다. 리츨은 대학에 입학한 지 1년도 안 된 학생으로 방법적 엄밀함과 논문의 구성법을 이만큼 확실하게 터득하고 있는 학생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고 극찬하며, 이후 그를 몹시 애지중지하며 아낀다.(미시마 겐지이, 『니체의 생애와 사상-가면과 고독』, 남이숙 옮김, 한국학술정보, 2003, 52쪽) 니체는 이렇게 자신을 26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박사학위도 없이 바젤대학 교수로 만들어준 지도교수 리츨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니체는 리츨 교수의 지도로 고전문헌학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니체는 이 분야의 탁월한 연구자가 되었고 그가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면 사람들이 몰려들 정도로 그 분야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특히 니체는 재미없는 주제를 재미있게 살려내는 재능이 뛰어났다. 문헌학 분야에서는 보기 드문 재주였다. 그가 발표할 때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재미없는 고전문헌학 관련 논문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니체의 매력은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이는 어린 시절부터 니체는 공부라는 것을 혼자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 앞에서 서로의 글을 발표하고 토론해 온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친구=학문의 동반자

대학 생활과 청년기 동안 니체는 자신의 학문적 취향에 맞는 친구들과 교제하고 우정을 나눈다. 오랫동안 고전문헌학의 동반자였던 로데와 도이센을 비롯하여, 니체의 학문에 깊이 감동하고 공감하여 니체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게르스도르프, 오버베크가 있다. 특히 파울 레와 루 살로메의 경우, 이들 간에 청춘 남녀로서 벌어진 삼각관계도 흥미롭지만, 이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점이 있다. 이 둘은 각각 서로 결은 다르지만, 니체 철학의 성숙과 완성 과정에서 결정적인 촉진제가 되었다.

고전문헌학의 동반자

니체는 대학진학 후 잠시 신학을 공부했으나, 곧바로 고전문헌학으로 자신의 학문적 관심을 옮긴다. 이때 만난 친구가 로데와 도이센이다. 는 대학 시절 이래 니체와 함께 같은 고전문헌학을 한 친구이다. 이들 둘은 학문적 취향이 매우 유사했다. 로데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 당시 고전문헌학계로부터 비난이 쏟아지자 적극적으로 변론해준 것으로도 유명한 친구이다. 둘 간의 재미있는 일화로는 로데가 결혼하자 니체가 상당한 실의에 빠졌으며 결별을 선언하는 편지를 보낸 사건이다. 로데와 니체의 우정은 라이프치히 대학의 리츨 밑에서 동창생으로서 함께 고전문헌학을 공부한 나날이었다. “언제나 함께 교실에 나타나는 두 사람을 스승인 리츨은 ‘디오스클로이(쌍둥이)’라고 불렀다.”(기마에 도시야키 외, 『니체사전』, 이신철 옮김, 도서출판 b, 2016, 153쪽) 둘은 이렇게 학문적 단짝이 되었다. 니체와 로데 모두 고전문헌학 분야에서 주목받는 학자가 되었지만, 시간이 흐른 후 니체는 철학자의 길로 자신의 삶과 학문의 방향을 바꾸었고, 로데는 문헌학의 길을 끝까지 걸어갔다.


 로데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 당시 고전문헌학계로부터 비난이 쏟아지자 적극적으로 변론해준 것으로도 유명한 친구이다.

로데 다음으로 고전문헌학과 관련된 니체의 친구는 도이센이다그는 1859년 김나지움 슐포르타에서 서로 알게 된 이래로 도이센은 니체의 생애를 통해 충실한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의 교우는 한 살 연상인 니체가 도이센에 대해 언제나 설교하고 이것저것 지도하는 관계였다. 도이센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때때로 고통으로 느껴지는 일이었다. 도이센은 “니체의 편지는 언제나 하나의 사건”이며, “엄격한 선생”이었다(『니체사전』, 124~126쪽). 이후에도 니체는 도이센의 글에 대해 늘 엄격한 비평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도이센 역시 자신의 학문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수행하여 1881년 교수 자격을 획득하고 1889년 이후에는 킬대학 교수로서 인도 철학과 철학사를 강의한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유럽에서 인도 철학에 관한 최초의 진정한 전문가”라고 도이센을 칭송하고, 그의 산스크리트어 능력에 대해서도 높게 평가한다.(『니체사전』, 124~126쪽) 도이센은 늘 니체를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살았으며 후기 니체 저작인 『우상의 황혼』과 『이 사람을 보라』는 그의 후원금으로 출판하게 된다.

 

니체의 추종자이자 후원자

학창시절부터 친구이면서도 니체를 추종한 대표적 인물이 있다. 첫 번째 인물은 게르스도르프이다. 그 역시 김나지움 슐포르타 시절의 친구로서 음악과 문학에 열정을 보인 니체 추종자이다. 니체가 바젤대학에 부임하자 게르스도르프는 여러 차례 그를 방문하여 오랫동안 머물며, 니체의 강의를 청강한다든지 함께 스위스 알프스를 여행한다든지 했다. 또한 페터 가스트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두통으로 괴로워하는 니체를 위해 구술필기나 정서를 도와줬다.(『니체사전』, 18~19쪽) 게르스도르프가 니체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인 이유와 과정이 흥미롭다. 슐포르타 시절 니체가 휠덜린과 바이런에 대한 평론과 에르마나리히 왕의 모험담과 북유럽 신화 일반에 대한 연구 과제물을 제출했고, 게르스도르프가 수강한 수업에서 담당 교수가 그 내용을 칭찬했다. 교수의 이야기를 들은 게르스도르프가 니체를 찾아가면서 둘의 우정은 시작된다.(홀링데일, 『니체-그의 삶과 철학』, 김기복·이원진 옮김, 북캠퍼스, 2017, 42쪽) 친구의 글이 궁금해서 직접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시작된 둘 간의 우정! 물론 니체는 이때부터 특별한 글을 쓴게 맞지만, 게르스트로프 또한 그 순수한 마음과 열정이 매우 돋보인다. 하여 게르스트로프 또한 도이센과 마찬가지로 차라투스트라의 4부 출판을 위해 돈을 빌려줄 것을 타진한 니체에게 선뜻 돈을 빌려준다.(홀링데일, 『니체-그의 삶과 철학』, 김기복·이원진 옮김, 북캠퍼스, 2017, 323쪽) 이 둘 간에 이 정도는 별게 아닐 수도 있지만, 아무튼 이 돈으로 차라투스트라의 4부는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다음은 오버베크. 니체와 오버베크. 이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된 것은 1870년이다. 오버베크는 그 전에 바젤에 부임해 있던 일곱 살 연하의 니체와 동료가 되었다. 더욱이 우연히도 같은 바우만의 집에서 마루를 사이에 두고 아래 위층에 사는 이웃이 되었다. 그들은 반년 후에 1층의 오버베크의 방(흔히 ‘바우만의 동굴’이라 불림)에서 매일 저녁 식사를 1시간 함께 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고, 5년에 가까운 이 공동생활은 두 사람 사이를 나누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었다. 1873년에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 1편과 오버베크의 처녀작 『오늘날 신학의 그리스도교성에 대하여』가 같은 프릿츠 출판사에서 차례로 발간되었는데, 후자가 출판된 것과 관련해서는 니체의 조력이 컸다. 이 우정은 생애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오버베크는 바젤대학 퇴직 후의 니체에게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니체사전』, 422~423쪽) 오버베크는 1889년 1월, 착란에 빠진 니체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사람이고, 니체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를 니체의 마지막 후견인으로 추천한 사람이기도 하다.(*실제로는 어머니의 남동생이 후견인이 되었다.)

니체 철학의 촉진자

니체 철학은 시대에 대한 통찰도 돋보이지만, 이보다 더 특별한 점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후기 니체는 시대와 인간에 대한 자신의 통찰도 훌쩍 뛰어넘는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친구들은 파울 레와 루 살로메이다. 이들은 니체와 우정과 사랑, 혹은 애매한 삼각관계 속에서 살짝 갈등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모두 니체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찰과 사유, 나아가 니체 고유의 철학을 생성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촉진자가 된다.

우선 파울 레와 니체는 1873년경부터 교제가 있으며, 니체는 그를 ‘심리학적 관찰’이라는 철학적 방법론을 공유한 학문적 동지로 높게 평가한다. 레와의 오랜 학문적 대화가 니체의 중기 저작을 대표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탄생시킨 배경이 되었다. 이후 이 둘은 오랫동안 우정을 유지하며 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관찰’을 각자의 성과로 만들어 간다. 후에 레는 니체에게 운명의 여성 루 살로메를 소개하고, 세 사람의 기묘한 생활, 연애에서의 레의 승리, 머지않아 레와 루 살로메의 이별이라는 드라마를 전개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니체사전』, 149~151쪽)

파울 레가 ‘심리학적 관찰’이라는 학문적 방법론을 통해 니체 철학에 영향을 미쳤다면 루 살로메는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동시에 가진 이중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니체에게 자극한 인물이다. 루 살로메그녀는 프로이트를 비롯한 당시 유럽의 최고 지성들과 교제한 인물이며, 많은 남자들과의 연애담을 만들어낸 매력적인 여성이다. 레와 니체도 살로메의 매력에 빠진다. 이 둘은 살로메에게 구혼하지만 모두 거절당한다. 그 대신에 그녀가 내놓은 제안은 이른바 ‘삼위일체’의 관계, 요컨대 학문적 추구로서의 공동생활이었다. 이 불안정한 관계는 두 사람 남성 측의 의혹과 니체의 누이 엘리자베트의 개입에 의해 여지없는 삼각관계가 되며, 곧 니체와 루의 교제가 끊어진다. 그러나 니체의 경우 루의 시작에 작곡을 행하기도 하면서(『니체사전』, 292쪽) 둘의 만남은 당분간 지속된다. 둘 간의 연애 감정이 정리되고 난 이후에도 이들은 더욱 깊은 대화를 하게 된다. 하여 살로메는 니체와 사귀고 헤어진 한 때의 연인관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살로메는 니체에게 『차라투스트라』의 집필 과정에서 그의 정신의 고양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둘의 연애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살로메를 만난 니체는 자신의 새로운 사유를 쏟아내었고, 그녀는 이를 듣고 니체가 또 다른 사유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자극했다. 살로메는 편지를 통해 “당신의 여성성이야말로 섬세하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당신에게 가져다주었고, 세계를 비판함과 동시에 새로운 사상의 잉태를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당신의 남성적인 야수성 속에는 섬세한 여성성이 힘차게 약동하고 있습니다. 이중적인 것의 융합이 당신을 매력있게 할 것이나 당신의 책은 후세에나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 당신의 사상을 소개하는 책을 쓰고자 합니다. 그러니 니체여, 나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서글퍼 할 필요도 없고 분노할 필요도 없습니다.”(연창호, 「루 살로메의 편지」, 『나는 나, 니체입니다』, 부크크, 2022:184~185쪽)라고 고백한다. 이 정도면 둘은 서로에게 충분한 존재였다. 결혼을 해야 남녀의 결실이 맺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살로메는 자신이 약속한 니체에 관한 책, 『살로메, 니체를 말하다』(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김정현 옮김, 2021, 책세상)를 저술한다.

철학자의 우정

‘이들과의 우정을 이대로 오래오래 유지했으면 좋았을 것을’이라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한다. 하지만 니체는 자신을 어느 지점에 정지시켜놓지 않았다. 니체는 어린 시절 활달한 소년이었고,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으며, 열정과 능력을 갖춘 고전문헌학계의 탁월한 학자였다. 각 삶의 단계에서 니체는 소중한 우정을 나누었고, 그 우정은 삶의 각 단계에서 자양분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니체는 소년도 청년도 학자도 아니다. 그는 사상가, 곧 현대인들의 병든 삶을 사유하고 치유하는 철학자이다. 당시로는 니체를 같은 사상의 높이와 깊이에서 이해할 만한 친구는 없었다. 가까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니체를 이해하기는 커녕 그의 사상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하여 니체는 이런 고민을 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우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미 잘못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들조차도 자신들의 언짢음을 때로는 시기하는 말들로 표출한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들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니체, 「잘못 평가된다」, 『인간적인 1』, 352번)

 

“우리가 심하게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았던 우리의 친구들은 우리 자신의 과거의 유령이 된다” / “오랜 이별 후에 옛 친구들이 다시 만나게 되면, 흔히 자신과는 전혀 무관해져 버린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흥미로운 체 한다 : 그리고 때로는 양쪽 다 그것을 알아차리지만, 어떤 슬픈 의혹 때문에 감히 베일을 걷어 올리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은 자의 나라에서 하는 것과 같은 대화를 하게 된다.”(니체, 「유령으로서의 친구들」, 「다시 만날 때」『인간적인 2』, 242번/259번)

 

언젠가 법륜스님이 고향 울산에 갔는데 친구가 어릴 적 구슬치기하던 때를 이야기하며 “스님이 구슬치기를 그렇게 잘했고 경쟁심도 욕심도 많았다”라는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서 하는 바람에 스님이 잠시 난감했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친구들, 학교 혹은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난 친구들이 있다. ‘이 친구들이 없으면 어떻게 살지?’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동시에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이들을 만날 일이 있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 경험 또한 있을 것이다. 왜 서로에게 불편하고 오래 있으면 민망해지기까지 한 관계가 되었을까? 서로의 삶이 수평적으로 너무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서로의 일상과 관심이 달라졌기에 소원하고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은 객관적 거리와 삶의 조건이 달라지면 서로 불편해지고 오랜만에 만나 서로 우정을 나누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니체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니체도 역시 수평적으로 삶의 공간과 시간이 달라졌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이것이 아니다. 그는 왜소해진 현대인의 삶을 사유하고 그 돌파구를 찾아 나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찾는 친구와 우정은 달라졌다. 그는 이제 자신을 수직적으로 고양시킬 친구가 필요했다.

 

나중에 그는 때때로 자신의 고독을 좀더 사랑스럽게 포용하기 위한 사교 이외에는 어떠한 사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살아 있는 자들 대신 죽은 자들과 사귄다. 그리고 그의 친구의 경우에도 친구를 대신할 사람들을 갖는다. 즉 지금까지 살았던 최상의 인간들을 친구로 갖는다.(니체, 「값싸게 산다」, 『아침놀』, 566번)

 

이제 니체는 다른 차원의 친구와 우정을 필요로 한다. 그의 삶이 고양된 만큼, 그의 사유가 높아지고 깊어진 만큼, 거기에 맞는 친구와 우정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니체 주변에 살아있는 인간들에게서 이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제 니체는 살아있는 사람들 대신 죽은 자들과 사귀게 된다. 인류 역사의 최고의 스승들과 사귐을 만들어 간다. 대신 현실에서는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해 보이는 삶을 선택한다. 살아있는 사람들과는 소원해지고 죽은 자들과의 사귐은 어떤 것일까? 니체에게 이 죽은 자들은 자신이 만날 수 있는 최상의 인간들이다. 이들과의 우정으로 인해 그는 수직적 고양이 가능하다. 자신이 고양된 만큼 다른 존재들이 달리 보인다.

 


 이제 니체는 다른 차원의 친구와 우정을 필요로 한다. 그의 삶이 고양된 만큼, 그의 사유가 높아지고 깊어진 만큼, 거기에 맞는 친구와 우정이 필요한 것이다.

별들의 우정 – 우리는 친구였으나 소원한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척하면서 그것을 숨기거나 애매하게 덮어두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각각 나름의 목표와 항로를 지닌 두 척의 배와 같다. 우리는 과거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서로 교차하고 함께 축제를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략) 이러한 생각에 이르도록 우리를 고양시키자! 하지만 저 숭고한 가능성의 의미로 친구 이상의 존재가 되기에는 우리의 삶은 너무 짧고, 우리의 시력은 너무 미약하다. 그러니 우리가 비록 지상에서 적일 수밖에 없다할지라도, 별들의 우정을 믿기로 하자!(니체, 『즐거운 학문』, 279)

 

『즐거운 학문』에 있는 니체의 우정론이다. 『차라투스트라』 직전의 작품으로 니체의 후기 사유가 가장 잘 정리된 책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이 글은 철학자 니체의 우정론이 지향한 바가 무엇이었나를 잘 보여준다. 그가 과거의 인연에 머물러 있었다면, 아니면 과거의 인연을 떠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간다고 해도 그 사유가 현대인들의 사교적 우정론에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 우리에게 니체는 없다. 니체 또한 한때 친했던 친구와 소원해지는 것이 서운했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그 서운함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축제를 향해 나아갔다. 자신을 고양시키는 방식으로. 그리하여 그는 별이 되었다. 밤하늘을 비추는 별이 된 것이다. 자신이 별이 되고 보니 다른 별들이 보였다. 이 별들은 과거의 방식으로 만날 수는 없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는 존재가 되었다. ‘공부하는 삶’, ‘철학적으로 사는 삶’, ‘영성을 키우는 삶’, ‘자비와 지혜를 얻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야 할까? 이런 고민이 든다면 니체의 경우를 따라가면서 각자의 길을 열어 보면 좋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