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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_종교의 경계를 넘다] 방황과 열정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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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4-03-30 09:39 조회16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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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방황에서 지성으로, 지성에서 영성으로 1-1

방황과 열정 사이

이 경 아

헌신적인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유랑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1월 31일, 토머스 머튼은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쟁과 인연이 깊다. 1차 대전 중 태어났고, 2차 대전 때 수도원에 입회하고, 전투기 조종사인 동생이 전쟁으로 죽고, 수도원에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한다. 머튼의 어머니는 미국, 아버지는 뉴질랜드 출신으로 각자 미술 공부를 위해 파리에 왔다가 만나서 결혼을 했고 머튼을 낳았다. 이 당시 프랑스는 영국, 러시아와 동맹을 맺으며 독일과 전쟁 중이었고, 머튼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도 전투가 있었다. 이들은 전쟁을 피해 머튼의 외조부모가 있는 미국으로 갔고,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머튼의 동생이 태어났다.

머튼의 어머니는 퀘이커 교도였고 살림이든 육아든 완벽하게 해내려고 했다. 집 안 청소에 유난했고 자식들이 혹시라도 잘못된 길로 갈까 봐 늘 전전긍긍했다. 5살짜리 머튼을 책상에 앉혀두고 공부를 시키면서 which를 wich로 고집한다고 쫓아낼 정도로 교육에도 열성이었다. 걱정 많고 완벽주의 적인 성향 탓인지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위암에 걸리고 말았다. 그녀는 투병 중에도 자식들이 병원에 오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다. 6살, 3살의 어린 자식들이 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아서다. 자신의 그리움보다는 자식의 상처를 걱정했던 어머니는 투병 중에도 오직 머튼을 위해 기도했다. 결국 머튼이 6살 때 그녀는 머튼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떠난다. 너무 어리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염려 덕분인지 머튼에게는 어머니의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이후의 머튼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어쩌면 헌신적인 어머니에 대한 원형이 그가 성모님에 대해 가지는 존경과 사랑으로 연결되지 않았을까?

머튼의 아버지는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였다. 벌이가 넉넉지 않았기에, 생계를 위해 정원사도 하고, 성공회 성당에서 오르간을 치기도 했다. 그런데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일반적인 아버지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인다. 가족을 돌보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머튼 형제를 외조부모에게 맡기고 여기저기를 본격적으로 유랑하기 시작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났다가 몇 달 만에 불쑥 나타난 아버지는 머튼을 데리고 프로빈스타운에 갔고, 버뮤다와 서머셋에서는 몇 달씩 머무르기도 했다. 아버지는 서머셋에서 머튼을 낯선 사람들에게 맡기고 그림을 그리러 다시 떠나곤 했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 아버지는 아예 어린 머튼을 외조부모에게 맡기고 프랑스로 떠나버린다. 프랑스에서도 여러도시들을 옮겨 다니다 아프리카로 건너가 알제리까지 가서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의 유랑 벽은 정말 못 말릴 정도였다. 이 시기 아버지는 과도한 유랑 탓인지 많이 아프기도 했지만, 인생 최대의 걸작품을 그려서 화가로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머튼은 아버지를 2년 만에 만났고 이후로도 아버지의 유랑은 계속되었다.

머튼은 이 시기를 내 어린 시절은 거의 달마다 생활환경이 바뀌었다여기서 무슨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그러나 나는 환경이 바뀌어도 별 불편을 느끼지 않고 그 변화를 쉽게 받아들였으며 이런 생활이 오히려 퍽 가치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칠층산토머스 머튼, 64p)고 회상한다8살 안팎의 나이에 매번 숙소가 바뀌고, 낯선 사람들과 함께 지내게 된 머튼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 바탕에는 아버지의 성품과 하는 일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있었다. 머튼은 오히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삶의 무상성과 여기저기 떠도는 길 위의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런 생활은 머튼이 사람들을 관찰하게 했다. 낯선 곳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다 보니 사람들의 반응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눈치가 빨라야 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소설을 썼는데 글쓰기는 그의 관찰력을 더 키워주었다. 글을 쓰기 위해 관찰하는 것과 그냥 사물을 보는 것은 다르다. 그는 소설을 썼기에 인정물태를 더 깊게 관찰했고, 이것은 나중에 사람들과 교감하고, 인간의 모순을 드러내는 자양분이 된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소설을 썼는데 글쓰기는 그의 관찰력을 더 키워주었다.

1925년, 머튼이 10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머튼을 데리고 프랑스로 떠난다. 머튼은 생탕토냉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자신보다 더 어린 꼬마들과 함께 프랑스어를 배운다. 그 후 몽토방에서 공립중학교를 2년간 다녔다. 몽토방에선 기숙사 생활을 하며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열병에 걸려 심하게 아프기도 하면서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런 어려움은 머튼을 또래에 비해 독립적이고 조숙하게 만들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그는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고 서로 비평을 하기도 했다. 머튼에게 글쓰기는 힘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의지처였다.

아버지의 종교성과 죽음

머튼의 아버지는 신실한 성공회 집안 출신이었지만 머튼에게 제도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고 종교 교육을 일부러 시키지도 않았다. 단지 일상에서 영적 생각이 떠오를 때 자연스럽게 머튼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잔다르크 성녀 이야기나,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배반했던 이야기, 닭이 울자 베드로가 밖으로 나가서 통곡했던 일을 들려주었다. 어린 머튼은 베드로가 느꼈을 죄책감을 생각하며 베드로의 인간적인 고민에 공감했고,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머튼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언젠가 아버지는 한 상류층 여인이 이웃에게 지속적으로 험담하는 것을 보다 못해 그 여인에게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말씀의 의미에 대해 들려주었다. 남을 증오하고 비난하는 것은 결국은 화살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고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남을 증오하는 것을 멈추라고 했다. 아버지는 신학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일상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어느 성직자의 설교보다 머튼에게 더 깊게 다가왔다. 특히나 아버지는 그가 가진 종교성과 예술가 특유의 관찰력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풍경화 화가답게 전체성 안에서 각 사물들의 상호관계,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르게 펼쳐지는 사물들의 특징에 대해서 경외심을 가지고 관찰했다. 머튼이 나는 아버지한테서는 사물을 바로 보는 태도와 고결한 성품을어머니한테서는 혼잡한 세상에 만족하지 않는 고요함과 다재다능한 성품을 물려받았다.”(칠층산, 32p)고 밝히듯이 아버지의 세계관은 머튼이 세계를 상호의존관계로 보는 데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는 1929년 머튼이 14살 때 악성 뇌종양에 걸린다. 아버지의 투병은 어릴 적 겪었던 어머니의 병과는 달랐다. 머튼은 아버지의 뇌종양 소식을 듣고 슬픔과 두려움에 빠져 처음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 이 시절은 지금과 달리 아직 뇌 수술이 미지의 분야였고, 수술을 받더라도 성공확률이 낮았기에 심한 고통에 시달리다 죽어가는 것이 다였다. 머튼은 이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고 아버지의 퉁퉁 부은 얼굴과 주먹만 하게 커진 혹을 보면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막상 아버지는 병과 고통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종양과 싸우고 감각기관들이 마비되어가는 상황에서도 평온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렸던 풍경화가 아니라 비잔틴풍의 성인들 그림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삶을 마쳤다. 이때 머튼은 15살이었고 사춘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성적 방탕과 순례자의 열정

예민한 성격이었던 머튼은 사춘기로 인해 더 예민해졌다. 그는 부모님을 일찍 돌아가시게 만든 세상이 미웠다. 세상의 권위에 도전하며, 자기 맘대로 살고 싶어졌다. 그 방식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추구로 나타났다. 방학을 맞아 미국에 있는 외조부모를 만나러 가는 배 안에선 처음 본 16살 연상의 여자에게 빠졌다.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밤낮으로 마음을 태우고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것 같은 격정과 고통에 휩싸인다. 앞으로 그녀 외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할 수도 없을 것 같은 뜨거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불사불멸의 사랑을 고백하지만 보기 좋게 차인다. 그는 차이고 나서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의 환대는 그를 더욱 힘들게 했고 폭발 지경까지 몰고 갔다. 그는 가족의 간섭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고, 고등학생 신분으로 무허가 술집에 들어가고, 담배를 피우며 뉴욕 거리를 배회했다. 오캄에서는 학교 도서관에 술병을 숨겨두고 마시기도 했고,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는 날을 세워가며 술을 먹고 파티를 즐기느라 병까지 얻었다

 

머튼은 방황하는 와중에 유럽의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지만, 외조부와 대부의 후원으로 인해 경제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외조부는 뉴욕에서 소설과 어린이 책을 내는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영화 화보를 만들어 한때 큰돈을 벌었고, 1929년 경제 공황에도 파산하지 않았다. 대부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로서 외과 의사였는데 머튼에게 경제적인 후원만이 아니라 멘토 역할도 하고 있었다. 이들 덕분에 머튼은 넉넉하진 않더라도 여행을 많이 다니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공부를 어려움 없이 계속할 수 있었다.

1932년 말, 오캄에서 공부를 마치고 캠브리지 대학에 장학생으로 뽑힌 그는 대부의 후원으로 로마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 중 한 성당에서 모자이크를 보고 영적 생명력과 생동감을 느끼며 큰 충격을 받는다. 심판하러 오는 그리스도의 발치에 구름이 있고, 구름 속에 불이 엿보이는 그림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영적 고양감을 느꼈고 이후로 자연스럽게 모자이크가 있는 로마의 대성전을 다 찾아다닌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순례자의 열정과 소원”을 가지게 되었다. 생전 처음 그리스도에 대해 알기 시작했고 모자이크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 위해 라틴어 신약성경까지 사서 읽는다. 그리고 호텔 방안에서 불이 깜빡이는 순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생하게 신체적으로 느끼는 체험을 하게 된다.

모자이크를 보고 느낀 영적 고양감과 순례자의 열정이 무의식중에 아버지를 생각나게 한 것일까?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빛은 지난날을 비추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이후 자신이 겪은 슬픔과 거칠었던 생활이 스쳐 지나갔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며 견딘 외로움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동안 참아왔던 고통이 종기의 고름을 짜내는 것처럼 터져 나왔다. 저절로 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기도를 바쳤다. 이런 정화 과정을 통해 그는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캠브리지로 돌아와서는 오히려 더 욕망에 충실했다. 18살의 머튼은 거친 패거리들과 본격적으로 어울리며, 주로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무절제한 파티광이 되었고 행패를 부리며 돌아다녔다. 그가 어울렸던 대학 친구들은 대부분 퇴학당했다.

머튼도 나름대로 자신의 문제를 보고자 했다. 하지만 방향이 어긋났다. 감각적 쾌락의 추구는 계속 갈증을 낳을 수밖에 없는데 그는 프로이트와 융, 아들러를 공부하며 자신의 불행의 원인이 오히려 성욕 억제에 있다고 보았다. 머튼은 에너지가 많고 속도도 빠르기에 쾌락의 추구에도 전력을 다했다. 그러다 결국 아이까지 낳았다. 아이와 여인의 존재는 1940년 런던 대공습 때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남이 아니라 자신이 비참함의 원인일 때 더욱 초라해지기 마련이다. 예민한 감각을 가졌던 머튼은 방탕한 생활에 비참함을 느껴왔고, 비참함을 잊으려고 다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있었다. 사생아 사건 등 무절제한 머튼을 보다 못한 대부는 머튼에게 미국으로 떠나라고 했다. 스스로 무언가를 끊지 못할 땐 주위에서 그것을 끝내게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다행히 머튼에겐 대부가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머튼은 대부의 결정에 순순히 따르며, 밤 배를 타고 조용히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한다.

반항의 이면, 간디와 공산주의

머튼은 오캄 사립학교에 다니던 중 아버지마저 여의고 세상에 대한 반항심으로 사춘기를 보낸다. 이후에는 술과 성적 욕망에 빠져 지냈다. 그런데 머튼의 생애 초반에서 독특한 점은 이런 와중에도 배움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쾌락을 추구하면 배움에서 멀어질 것 같은데 그는 오히려 쾌락을 추구할수록 배움에 대한 욕망이 커졌다. 그는 방황하면서도 계속 읽고 쓴다. 오캄에서 라틴어만이 아니라 그리스어와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키케로, 둔스스코투스, 스피노자 등등의 고전을 읽고, 신비주의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에 매료된다. 고등학생이 이런 책을 읽다니 그는 정말 독서를 좋아했다. 방학 때는 외조부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온종일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혼자 사색하는 시간도 즐기고, 글을 쓰고, 오캄 신문의 편집장도 맡았다.

무엇보다 머튼은 이 시절 간디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1929년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공항의 여파로 영국도 타격을 입었다. 영국은 타개책으로 당시 식민지배하던 인도에 소금법을 시행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착취하려고 했다. 소금 법은 인도인들에게 자국의 바다에서 나는 소금 채취를 금지하고, 소금에 과도한 세금을 물리는 부당한 법이었다. 간디는 소금 법에 저항하기 위해 1930년, 380km가 넘는 소금 행진을 벌인다. 70여 명으로 시작한 행진이 시간이 흐르면서 수만 명이 참가하게 되었다. 이 행진으로 인해 6만여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간디도 투옥되지만, 평화 행진은 인도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감동을 주었다. 옥살이를 마친 간디가 1930년 소금 법 협상을 위해 런던에 도착했고, 머튼은 오캄 기숙사에서 신문을 통해 간디에 대한 뉴스를 보았다.

머튼은 소금 법과 간디의 주장에 대해 기숙사에서 열띤 논쟁을 벌였고, 간디와 인도인들은 자신들을 위한 법을 제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자국의 이익을 해치는 간디에 분노하는 것과 대조적인 주장이었다. 머튼의 주장은 그의 반항심이 시대의 전제와 권위에 대한 질문으로 나타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간디와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간디의 삶은 머튼이 영적인 길을 가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머튼은 간디에게서 비폭력의 영감을 받았고 훗날 『Gandhi on Non-Violence』라는 책을 출판하게 된다. 간디는 굉장히 솔직한 사람이었고, 간디의 비폭력은 이념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머튼이 가진 솔직성과 실천력은 여러 면에서 간디와 오버랩된다.

또한, 이 당시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공산주의에 관심이 있었는데 머튼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하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경제위기, 빈민굴 같은 것은 없어져야 할 악이었다. 이뿐 아니라 자신의 타락과 방종은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시대와 계급의 산물이었다. 그는 혁명을 통해 ‘계급 없는 사회’가 되면 모든 것이 공유화되고 개인 소유를 위해 욕심부리지 않는 새로운 세상이 올 거라 여겼다. 그는 반항하면서도 세상의 정의와 평화에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 반항과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마음, 두 마음이 그에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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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향님의 댓글

근향 작성일

20대에 머튼을 만나 칠층산을 감동 깊게 읽고 좋아하게 된 머튼을 60대에 다시 만나 사랑에 빠졌다. 평범하지 않았던 머튼의 생이 수도원 입회 후 책을 쓸때 자양분이 되었을꺼라 생각되네요. 경아샘 덕분에 머튼의 생을 좀 더 이해하게 되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