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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길 붓다의 길] 신들의 환희, 아시타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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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4-03-29 11:02 조회1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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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환희, 아시타의 눈물

왕의 길, 붓다의 길 – 지금 우리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신들의 환희, 아시타의 눈물

김 주 란

윗옷을 들고 흔드는 신들

“왜 신들은 기쁨에 넘쳐 있습니까? 무슨 이유로 윗옷을 들고 흔들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아수라들과의 싸움에서 신들이 이기고 아수라가 졌다고 할지라고 몸의 털이 곤두설 수는 없을 터인데, 어떤 희귀한 일을 보고 그처럼 기뻐하는 것입니까?”*

마치 열광적인 축구 팬들의 응원 장면을 방불케 하는 이 구절은 가장 오래된 불경 중 하나라는 『숫타니파타』에 실려있다. 더운 한낮 휴식을 즐기던 어떤 뛰어난 선인(仙人)-선인이란, 베다에서 전하는 신성한 지혜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을 뜻하는 표현이라 한다-이 환호작약하는 신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장면이다. 그 선인의 이름은 아시타. 그의 눈에 보인 풍경은 그야말로 난리부르스였다. 신들은 손뼉을 치고 춤을 추고 웃옷을 벗어 휘두르면서 기뻐 날뛰고 있었다. 신들의 기쁨이 어찌나 큰지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전설적 승리 – 신들이 아수라들을 물리친 승전의 날이라 한들 이보다 흥분할 수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아시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신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격하게 기뻐하는 것일까?

신들이 들려준 빅 뉴스, 그것은 바로 싯다르타 고따마-우리가 익히 아는 석가모니 붓다의 탄생 소식이었다. “비할 데 없이 묘한 보배인 저 보살이 세상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싸끼야 족의 마을 룸비니 동산에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보살이란, 정각을 이루어 붓다가 되기 전 시절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붓다의 탄생! 그게 대체 뭐길래?

온 우주가 축복을 보내는 보배로운 존재의 탄생이라는 사건에 신들이 감응하여 기쁨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신들의 환희는 그 이상이었다. 이 정도 이상의 환희는 자축의 표현이다. 인간이 볼 때는 무궁무진한 수명과 복락, 힘과 창조력을 누리는 신들이지만 사실 그것은 기한이 다하면 소멸하는 마일리지와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었다. 과거에 쌓은 선업의 결과를 현재 만끽하고 있지만 결국 쌓은 마일리지를 다 쓰고 나면 신도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고 그때는 지어놓은 복이 없기 때문에 어떤 존재로 태어나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신들도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사이클의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이 원천적 굴레에서 벗어날 길을 알아내고 세계에 전파할 존재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니 환희용약할 수 밖에.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눈여겨볼 지점이 또 있다. 인도인들이 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신과 인간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신에 대한 이러한 이해야말로 인도인이 가꿔온 지성의 결과일 것이다. 신을 인간의 조건을 넘어서 있는 존재로 설정하는 여타의 문화권에서는 신과 인간의 분리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이때 신성은 인간성과 반대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반면 수명과 복락의 사이즈만 다를 뿐 동형으로 상정하는 사유체계 내에서 신성과 인간성은 분리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런 사유구조는 인간의 몸으로 운명의 굴레에서 해방될 길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탐색할 용기의 원천이 된다.


 인도인들이 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신과 인간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신에 대한 이러한 이해야말로 인도인이 가꿔온 지성의 결과일 것이다.

이런 세계관을 바탕으로 할 때 인간은 신을 인간 자신보다 앞서 알아봐주고 기다려주고 지지해주는 수호자로 얻게 된다. 미래의 붓다 또한 그런 신들의 환희와 지지 가운데 탄생했으며 붓다가 되기 위한 여정, 붓다로서의 여생에도 신들은 훌륭한 제자이자 수호자로 함께 하게 된다.

진리를 구하는 간절함의 힘

이제 다시 아시타 선인에게로 가보자. 신들에게 빅 뉴스를 전해 들은 아시타 선인은 한달음에 아기왕자에게 달려갔다. 과연 “불꽃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천체처럼 맑으며, 구름 한 점 없는 가을의 태양처럼 밝은 왕자”였다. 떨리는 손으로 왕자를 품에 안은 선인은 이 작은 아이의 몸에 담겨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시타 선인은 끝내 눈물을 떨구었다. 그는 단박에 이 아이가 자라 장차 최상의 깨달음을 얻어 최고의 가르침을 펼 것을 알았다.

그러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은 그 가르침을 듣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시타의 눈물, 그것은 진리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역설한다. 아시타 선인처럼 진리를 알아볼 준비가 완벽히 갖추어져 있다 해도 간발의 타이밍 차로 눈앞에서 문이 닫히면 어쩔 도리가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시타의 간절함 만큼은 절대 무화되지 않았으니, 만약 세속적인 욕망에 정신을 쏟고 사는 우리의 마음 저 밑바닥에도 진리를 추구하는 불씨가 희미하게나마 살아있다면, 그것은 아시타 선인이 눈물로 전하는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싸끼야 족들은 걱정에 휩싸였다. “우리 왕자에게 무슨 위험이 닥칩니까?” 아시타 선인은 눈물을 거두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이 왕자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어, 가장 으뜸가는 청정을 보고, 많은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고 많은 사람을 애민히 여겨 진리의 바퀴를 굴릴 것입니다. 그의 청정한 삶은 널리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남은 수명으로는 그 뛰어난 가르침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왕자의 앞날을 두고 두 가지 길을 예언했던 다른 현자들과는 달리, 아시타 선인은 싯다르타 왕자의 미래는 스승으로서의 외길뿐이라고 명쾌하게 단언했다. 전륜성왕의 도래를 간절히 기다렸을 쌰끼야족 사람들로서는 아시타의 예언이 그리 달갑지 않았겠지만.

쌰끼야족에게 작별을 고하고 궁중에서 물러난 아시타 선인은 서둘러 조카 날라까를 불렀다. 아직 젊은 조카라면 장차 싯다르타 왕자가 깨달음을 얻어 진리를 펼칠 때 찾아가 가르침을 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숙부의 가르침을 따라 그날부터 공덕을 쌓고 감각적 쾌락을 절제하며 붓다의 출현을 기다리며 살아갔다. 그리고 35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날라까는 숙부의 예언대로 스스로 깨달은 이, “붓다”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35년 전 흘렸던 아시타의 눈물은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었다. 진리를 아쉬워하는 마음이 간절한 기다림을 만들고, 그 기다림은 다시 진리의 말씀을 흡수할 토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붓다를 찾아 가르침을 구하는 그 순간 날라까의 마음을 잠시 상상해보자. 신들의 환희, 아시타의 눈물, 날라까의 마음. 이토록 깊고 진한 마음을 우리는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붓다의 말씀은 창백한 진리가 아니라 이러한 마음의 동조와 파동 속에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이 장에 인용된 불경은 <<숫타니파타>> <날라까의 경>에 기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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