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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감이수통(感而遂通), ‘나’를 넘어서 세상과 通하는 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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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3-03-02 07:49 조회2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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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수통(感而遂通), ‘나’를 넘어서 세상과 通하는 이치

김 자 영(감이당)

얼마 전 서울의 모 구청장이 작은 도서관 9곳을 폐관 조치하고, 관장들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대학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독서실로 전환하기 위해서란다. 최근 어려움을 겪는 작은 도서관이 많아 몇 달째 서명운동, 카드 뉴스 등을 반복하던 참이었다. 지쳤고, 피하고 싶었지만, 서울시는 행정의 전파가 빠른 지역이라, 해고는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었다. 외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투쟁할 의욕도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계사전의 한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다. 역은 생각이 없고함이 없다고요히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가인간 세상의 이치에 감응하여 마침내 통하게 된다(易无思也无爲也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계사상전10)

‘나’를 넘어서지 못하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易无思, 无爲 역무사, 무위)

처음에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분석해 보려 했다. 무지하고 폭력적인 정치, 이런 일에 나 몰라라 하는 대형 도서관, 평소 주민들과 책 읽기에 집중하지 못해 위기에 취약한 작은 도서관, 무엇이 문제인가—분석하고 해법을 찾고 싶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런데 위의 문장에서 ‘역은 생각하지 않고 행함이 없다’ 한다. 노자도 도덕경 2장에서 ‘천지는 仁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 의미는, 자연의 움직임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의도나 목적이 없다는 뜻이다. 어느 날 소낙비가 퍼붓기도 하고 벼락이 치기도 하는 것처럼, 명확한 인과도 일정한 목적도 없이 변화를 거듭할 뿐이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원망한들 소용없는 것 아닌가.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원망한들 소용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계속 마음이 오락가락했던 것은 ‘나도 해고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계사전의 말대로 세상의 작동방식이 ‘나’의 이득과 무관하게 움직인다면, ‘나’의 입장을 넘어서야 비로소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음 액션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역은 생각이 없고함이 없다(易无思无爲)’, 그것은 ‘나’를 넘어서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란 뜻으로 다가왔다.

 

처음의 자세로 돌아가라(寂然不動, 적연부동)

다음 구절인 寂然不動은 조금 어려웠다. 주란 샘은 탁구 칠 때의 자세를 예로 들어주셨다. 한번 치고 나면 바로, 처음의 자세로 돌아가 준비되어 있어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날아올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공에 대처할 수 있다. 적연부동이란, 어떤 미동도 없고 어떤 욕망도 일어나지 않은, 잠재적 상태를 말한다. 처음의 자세라 하니 떠오른다. 해고 통보를 받은 분은 나의 오랜 독서 모임 친구다. 그땐 공간도 없어서 서로의 집을 돌아가며 모임 했지만 아무런 불편함을 못 느꼈다. 그때의 그 배치에서라면, 일자리를 뺏던 공간을 없애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직장을 안 나가니 시간이 많아 좋다며 신나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의 그 책 친구 관계, 그것이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동기 아니었나? 독서실을 만들겠다는 구청장이나, ‘처음의 자세’를 잊은 나의 모습이 완전히 다를까. 어느새 이 정권과 닮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의 변심이 이 모든 폭력의 등장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구청의 행정 착오로 공간을 쫓겨날 위기에 처한 또 다른 작은 도서관 관장이 생각난다. 어떻게 되었냐고 걱정하니, “뭐, 없으면 없는 대로 하는 거지” 하며 웃는다. 그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자세라면, 어떤 변화에도 준비가 되어있을 것이다. 적연부동은 꼼짝도 하지 않은 고요한 상태지만, 결코 생명 활동이 중단된 게 아니다. 고요히 있다 세상과 감응하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 어찌 보면 가장 강력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일지도 모르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준비 자세 아닐까.

‘나’는 다른 모든 존재와 하나일지도(寂然不動, 적연부동)

그즈음 고미숙샘의 티벳불교 유투브 강의를 들었다. 달라이 라마가 티벳에서 망명할 때 이야기다. 중공군의 추격이 다가와서 위태롭기 짝이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지금 당장 떠나라는 신탁을 받고 일체의 주저함 없이, 어떤 흔들림도 동요도 없이, 역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인 망명길에 오른다. 적연부동의 상태가 이런 것 아닐까, 아무리 달라이 라마라도 어떻게 그렇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해하기 위해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그분은 자신의 존재를 전체와 하나로 인식했던 것 아닐까. 당시 냉전 초기, 인간뿐 아니라 온 생명이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 고통은 자신만의 것도 티벳 만의 것도 아닌, 중국군을 포함한 생명 전체의 고통이다. 자신의 존재는 그 모든 존재와 하나이기에, 어떤 원망이나 두려움 없이, 모두와 함께 이 고통을 극복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달라이라마 이야기에서는, 적연부동의 또 다른 측면이 보인다. ‘나’의 존재가 전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은 이는, 어떤 존재와도 감응하며 힘차게 작용할 수 있는 적연부동의 경지가 가능할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달라이라마는 이후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하여 서구인들과도 완전히 감응했고 세계인의 영적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준비 자세 아닐까.

천하의 모든 이치에 통하는 감이수통(感而遂通)

몇 주 전, 작은 도서관 모임을 갔더니 해고 통보받은 관장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기 일자리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어 투쟁이나 협상에서 나서지 못하는데, 폐관된 도서관을 지키며, 해고된 채 출근해서 대출 반납하고 동아리까지 챙기고 있더라고. 이야기를 듣다 다 같이 눈시울이 벌게졌다. 모임 후 그동안 외면하려 했던 것이 미안해서 홍삼 스틱 작은 것을 선물로 보냈다. 그랬더니 나의 속 좁음을 모르는 그분은, 얼마 안 되는 홍삼을 해고된 다른 관장들과 나눴다며, 고마워서 눈물이 난다고 한다. 나는 더욱 미안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날 모임에서 눈물지은 것은 그분이 불쌍해서만은 아니었다. 우리 중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해고됐건 말건 책 보러오는 사람에게 책 보여주고 싶은 마음, 동아리 사람들이 오면 챙겨주고 싶은 마음… 같은 마음을 지녔음을 느꼈던 것이다. 우리는 각자 입장과 처지가 다르지만 같은 것에서 감응할 수 있는 사람들임을 알았기 때문에 가슴 아프면서도 힘이 났던 것이다. 그런 작은 일에 감응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의 힘이기도 했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은 다큐멘터리 <Infinite Potential>에서 크리슈나뮤르티와의 대담을 통해 말한다. 우리는 전체성의 일부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숨겨진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고. 그래서 우리가 느낀 슬픔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것이기도 하다고. 한 작은 도서관의 아픔은 작은 도서관 모두의 아픔이다. 작은 도서관인의 아픔은 폭력과 욕망에 중독된 인류의 아픔이고, 인류의 아픔은 모든 생명의 아픔이기도 하다. ‘나’의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과 함께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짧게나마, 감응하여 세상의 이치와 통하는 감이수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응이 현 사태를 해결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냐고 할 수도 있겠다. 물리학자 데이빗 봄은 앞서 언급한 다큐에서 어린 시절 징검다리로 강을 건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징검다리 돌 하나를 디디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르는 채, 바로 다음 돌만을 디딜 뿐이다. 그러나 그 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숨겨진 전체성의 존재로 연결로 이어주는 깨달음의 순간일 수 있다고 한다. 겨우 한 걸음이지만, 그 걸음은 나와 연결된 존재로 이어준다. 나는 그들의 일부임을 믿고, 한 걸음씩 나아간다. 그러면 이 불인한 천지의 온갖 변화 속에서도, 우리는 감응하고 통하여 세상의 이치와 통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어쩌면 미약한 변화의 시작일 수 있다. 계사전은 이어서 말한다. 통하면 오래갈 수 있고하늘이 도우니길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通則久是以自天祐之吉无不利계사하전 2고.

‘나’의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과 함께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짧게나마, 감응하여 세상의 이치와 통하는 감이수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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