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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 7주차 들뢰즈 강독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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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여한일상 작성일22-04-07 11:29 조회749회 댓글1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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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랭귀지 스쿨 /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강독 7/ 후기 / 220407 / 윤원정

 

 

 

아직도 그렇게 충분하게 멀리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12. 유목적 사유’-

 

 

 

어렵고 낯선 들뢰즈 강독을 접하며, 철학을 공부하면 사고의 개방화를 유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아주 아주 조금씩 경험해 가고 있다. 철학 초보(철알못)인 나는 스피노자-들뢰즈에서 변용을 분배하는 내재성의 평면으로 강독이 이어질 때 내 머리 속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오온개공 등 어렴풋이 알고 있는 불교의 서구적 버전인가 싶은 생각에 불교 개념에 대입해서 이해하느라 스피노자와의 깊은 감응을 놓쳐 아쉬웠다. Hume관계는 관계 자신의 항들에 대해 외적이라는 명제와 인과는 확신일 뿐이며 오류는 착란 또는 환각이라는 설명을 들을 때는 혼자 읽을 때 이해되지 않던 부분이 선명해짐이 느껴졌다. 철학자들은 참으로 집요하며 끈질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주 강독은 니체를 다룬 유목적 사유차례이다. 들뢰즈는 니체가 그 어떤 이면 읽기의 권리를 선언하였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니체를 읽는 것을 하나의 생산이며 창조이며 예술로 만들고 있다. 또한 니체의 텍스트는 새로운 유형의 책이라 말한다. 맑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가 재코드화recodage의 시도 속으로 나아간 반면, 니체는 탈코드화(탈영토화)를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코드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작용토록 하고 또 모든 코드를 휘젓는 그런 절대적인 의미의 탈코드화라고 설명한다.

 

그럼 누가 진정으로 우리의 니체주의자들인가? 니체주의자라는 말 속에는 무엇을 연구하느냐, 누구를 지지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카프카는 독일어에 맞서는 전쟁 기계machine de guerre를 독일어 속에서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비결정과 절제의 힘을 통해서……독일어라는 코드 밑에서 작용토록 하고 있는 것이다.(p.263)

 

카프카와 가족’* 미니 북세미나에 참가하여 이름만 알고 있던 카프카에 대해 대략 알게 되었다. 세미나에서는 카프카의 작품은 프라하에서만이 아니라 독일어를 쓰는 유럽의 많은 독자들이 괴물로 여기며 기겁할 정도였고 독일어로 표현되어 본 적 없는 낯선 세계관을 담고 있다는 얘기가 오갔다. ‘카프카와 가족내용 중카프카 작품 속 인물들은 다른 삶을 꿈꾸며 슬며시 무리에서 이탈하여 다른 무리로 슬쩍 옮겨가는 시도를 하게 된다는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슬며시’, ‘슬쩍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들뢰즈식으로 말한다면 마치 코드화된 홈 파인 공간에서 노마디즘의 매끄러운 공간으로 슬며시이동하는 시도처럼 말이다. 들뢰즈도 유목민들은 이주민의 방식으로 공간적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코드들을 벗어나되 같은 장소에 머물기 위해 유목에 스스로 뛰어든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말하는 존재의 세가지 변신(낙타, 사자, 아이)** 중 낙타처럼 짐을 짊어지는 것이 능력이라 생각하고 사회적 가치를 내면화하고 살아온 나는 크게 아프고 나서야 나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했다니체의 사자 정신이 명령에 대해 싸우느라 재코드화를 초래한다면 아이 정신은 명령 자체를 가벼이 여기는 들뢰즈식의 탈코드화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오랜 직장 생활도 퇴직했고 오롯이 일상을 내가 꾸리게 되면서 슬며시’, ‘슬쩍홈파인 코드화의 공간에서 탈코드화의 매끄러운 공간으로 눈을 돌려본다. 철학 공부와 글쓰기를 접하며 촘촘한 사유가 흐르고 인식의 틀을 흔들어 놓는 글을 동경하지만 처음 써보는 내 글은 한없이 서툴고 성글고 거칠다. 익숙하고 낯익은 것들에서 다른 시도를 해보는 것만으로도 설레임과 더불어 낯설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 그때 내 뒤에서 니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직도 그렇게 충분하게 멀리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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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선민, 카프카와 가족』, 북튜브, 2021

** 니체,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병권 편역, 그린비, 2015. 285~291쪽

 

  

 

 

 

 

댓글목록

라니님의 댓글

라니 작성일

슬며시, 슬쩍 시도하지만 결국 멀리 나아가고자 하는 열정이
제목에서부터 글의 마지막까지 느껴져서 저도 덩달아 이동하고 싶어지더라구요~
설렘이 느껴지는 좋은 후기 잘 읽었습니다!

여여한일상님의 댓글

여여한일상 댓글의 댓글 작성일

봄꽃처럼 따뜻한 댓글 감사해요!
슬며시...시도하는 여정에
함께 도반으로 만난 귀한 인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박수경님의 댓글

박수경 작성일

익숙하고 낯익은 것으로부터 벗어나 새롭고 낯설은 세계로의 이동은 분명 두렵고 힘들지만 커다란 용기로 새로운 세상에 잘들어오신 원정샘께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보상으로 설레임과 삶의 활력, 삶의 대한 새로운 관점등이 주어지는듯합니다.
무슨일이든 침착하게 잘 하실거 같아요~~^^

여여한일상님의 댓글

여여한일상 댓글의 댓글 작성일

봄 햇살처럼 따뜻하고 다감한 말씀에 마음이 훈훈해지네요.
함께 한 여정!
좋은 도반으로 만난
인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잘견디자님의 댓글

잘견디자 작성일

니체가 살던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쓰는 유태인이란 입지가 참 묘하더군요. 우리랑 일본이랑 사이가 안좋은데 우리 나라에 살면서 일본말을 쓰는, 눈튀어나오게 잘 사는 동남아 사람 정도 될까요? 살아남기 위해 그곳의 소수 민족인 유태인들이 체코어 대신 선택한 독일어이다 보니 스스로도 체코 거주 유태인인 자신이 독일어를 쓰는 것이 온당한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는 ‘The New Yorker’지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정신적 갈등도 갈등이었지만, 원래의 본토 독일어권에서 외따로 떨어져 쓰는 체코 유태인들만의 국적없는 독일어는 일상언어로 쓰이면서 빈번히 겪게 되는 언어의 오염을 겪지 않은 탓에, 오히려 기묘한 언어적 순수성이 보존된 점이 그런 묘한 독일어 느낌을 더 강화시킨 듯한 인상이었습니다. 마치 교과서에서 쓰는 말 같은! 그 기사를 읽고 보니 제가 카프카였더라도 자신이 독일어를 쓰는 것이 정당한 지에 대해 고민스러웠을 것 같단 생각이 들더군요.

여여한일상님의 댓글

여여한일상 댓글의 댓글 작성일

‘The New Yorker’지 기사에도 카프카의 독일어에 대해 다루었었군요.
댓글로 정리해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개인의 경험은 시공간에 한정되다보니 책을 통해 얻는 간접 경험으로
그 인물이나 시대에 감정이입해 보는 것도
사고의 개방화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철학 공부의 잇점처럼요.

잘견디자님의 댓글

잘견디자 댓글의 댓글 작성일

혹시 관심 있으실 지 몰라 뉴요커 기사 링크합니다. 1999년 기사더군요. 먼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합니다. 정말로 글은 우리에게 타임머쉰인 것 같습니다.^^

http://www.newyorker.com/magazine/1999/01/11/the-impossibility-of-being-kafka

오!늘~님의 댓글

오!늘~ 작성일

낙타, 사자를 거처 아이가 되어가시는군요.
이제는 낙타도, 사자도 아니라면 '더 멀리 나아가는'의 목표점이나 출발점의 근거도 불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래서 '가깝고' '멀리' 보다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느껴보고 싶어집니다.
깔끔하게 정돈된 글 잘 읽었습니다~

여여한일상님의 댓글

여여한일상 댓글의 댓글 작성일

따뜻한 마음이 훈훈하게 전해지네요!
조금씩 변용해가는 여정에
함께 하게 되어 큰 힘이 됩니다.

윤혜숙님의 댓글

윤혜숙 작성일

철학이 조금은 뜬구름인가 했더니 현실에 딱 붙어 세상과 나를 알게 해주는 학문이네요
와중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바르고 생산적인 결론에 이르는 원정샘의 열정을 마구마구 응원합니다

여여한일상님의 댓글

여여한일상 댓글의 댓글 작성일

시가 깃든 선배님을 무한 존경합니다.
봄꽃처럼 화사한 응원에 힘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