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여 잘 있거라! > 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홈 > Tg스쿨 > 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서브배너_금성.png

후기여 잘 있거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굿바이 작성일23-11-12 18:52 조회110회 댓글1건

본문

 

 

 

 

2023년 금성4학기 / 4주차 후기 / 2023.11.12. / 김보성

 

나는 후기발제를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한다와 증오한다의 중간쯤에 내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싫어하다 내 마음 < 증오하다). 오늘 쓰는 후기가 올해의 마지막이다. Goodbye!, Say goodbye!, Forever goodbye? (만약 내년에 감이당에 접속한다면 이건 아닐 것 같다.) 어쨌든 후기의 제목을 어떻게 정할지 고민하다 한 사람이 생각이 났다.

 

나는 며칠 전 강 건너(?) 편히 쉬고 있는 헤밍웨이 선생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후기제목을 부탁했다. 그는 이런 제목들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후기여 잘 있거라’, 후기와 스트레스‘, ’후기는 누구를 위해 써야 하는가?’, ‘후기는 다시 떠오른다’, ‘킬로만자로에서 만난 후기등등 이 중 하나를 나의 표제작으로 선정했다

 

책을 읽다 라틴어 하나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런데 라틴어가 좀 이상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단어와 매우 친숙했고 너무도 흡사했다. 뭔가 거시기 하다. 그러니까... 아니겠지? 아닐 거야! 설마, 하여튼, 라틴어가 좀 천박하게 느껴지는 건 내 기분이 이상해서 그런 거야!

 

난 내가 자랑스러운 신부이다. 그래서 그에 상응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런 후진 본당에서는 나 같은 신부를 모신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 근데 왜 보좌 축일 때 축하금이 내 두 배일까? 아무리 내가 강론 때 가난의 영성을 말했어도 알아서들 내야지. 눈치 없는 천박한 것들이다. 언제까지 이런 천한 것들과 살아야 하는지 괴롭다고 기도했더니 주님께서 "내 너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마"라고 하시곤 내 이마에 새겨주셨다. 역시 주님만 나를 아신다. ‘sibalnoma’ 라틴어 이름 같은데 보좌 놈이 보더니, 웃는 건지 뭔지 표정이 묘하다. ‘그래! 너 같은 놈이 라틴어를 알겠냐?’ 천박한 것들이.” (꼰대 신부 홍성남의 웃음처방전홍성남 신부 지음)

 

 

 

Si vis vitam, para mortem.

시 비스 비탐, 피라 모르템.

 

삶은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

 

 

- 죽음을 대비했던 성인들 -

 

부처님, 소크라테스, 간디는 영성과 철학을 통해 죽음을 터득하며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의연했고 평화로웠기 때문에, 살아가는 방식에서도 죽음에 대한 해석이 있었습니다. 간디는 늘 죽을 수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했습니다. 부처님 또한 죽음을 최고 형식으로 삼았습니다.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죽음은 하나의 형식을 창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동의한 사람은 그것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형식을 구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상의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죽은 다음 천당에 가거나 혹은 극락에 가는 것이 최고의 경지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지성의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죽은 후 천당이나 극락으로 가는 것이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천당이 어디에 있으며 그런 장소가 따로 있나요? 크리스천이나 유일신을 믿는 사람은 천당이라는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말로 설명할 수 없어서, 신과의 합의에 따라서 만들어진 장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합의된 곳이 정확히 어떤 장소인가요? 성경에 합의된 곳(천당)이 나오나요? 그저 짐작할 뿐입니다. 지극한 평화가 있는 곳이라고 상상할 뿐이죠.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것은 현재 누리지 못 한 행복을 그곳에서 찾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만약 여러분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천국에 도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 사기꾼은 왜 기독교의 명의를 도용하는 가 -

 

뉴스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황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천억대 사기꾼. 미국에서 온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았다며 기독교를 인용하여 사람들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런데 왜 기독교는 이런 사람(사기꾼)의 타깃이 됐을까요? 사기꾼은 하나님, 교회의 이름을 차용해서 갔다 씁니다. 어찌 됐든 사기꾼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사기를 치고 있는지 아닌지 당연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에게 속아 돈을 잃습니다. 특히 칠공팔공세대들이 사기꾼 거짓의 혀에 속아서 물건을 사더군요. 그 세대가 갖는 기독교에 대한 구원이 마음속 깊이 박혀 있나 봅니다. 어처구니없는 말로 현혹하는 데도 열광하며 믿습니다. 어쩌다 기독교가 탐욕의 총집합체가 됐을까요? 주님의 지혜를 믿는 것이 아니라 적은 돈으로 100억을 만들어 준다거나 죽어서 천국을 보장한다는 그 말을 믿는 것이겠지요. 이것이야말로 자신과 신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전엔 극락정토와 천국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이승에서의 삶이 너무나도 피폐했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죠. 그래서 겪을 수 있는 대부분은 고통을 동반했으며 평생 웃을 수 있는 일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열망을 가질 수밖에요.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도 잘살고 있습니다. 예전에 꿈꾸었던 삶보다도 더 잘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더 잘 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떤 조건을 가지려 애쓰기보다는 어떤 태도로 사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마음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가난하다는 생각과 괴롭다는 마음은 결국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리고 있는데도 그 이상을 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현대인의 감성이나 지성으로 천국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위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심리적으로 많은 병이 생겼습니다. 만약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완전한 자유 완전한 평화가 와야 합니다. 삶이 충만하고 조화로워 선해졌다면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베풀어 줘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요? 오히려 분노만 더 쌓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진정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있는지.

 

 

- 윤회에서 너를 만나다 -

 

인도의 종교가 서양인에게 큰 울림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존재와 우주가 일치한다고 할 때, 죽음 이후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인도는 윤회론을 믿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윤회론은 진화된 이론입니다. 윤회를 믿는다면 인간은 죽음 후 어디로 가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윤회란 나의 객체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해체가 되지 않고 전생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윤회란 얼굴도 성()도 바뀌는 등, 모든 것이 변화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결국 까르마가 연속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인도 사상의 윤회론은 과학적이며 진화론하고도 연관이 있습니다. 윤회와 진화가 만나면서 영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날 때 스스로 결정합니다. 불교에서는 까르마가 결정합니다.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까르마에 의해 휩쓸려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업자득은 비관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까르마를 극복해 가면서 높은 경지에 이른다면 다음 생애에 좋은 인연을 본인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도 그 자체로 절대적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인위적 분별 망상으로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한바탕 꿈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집착을 덜어낼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지극한 평화와 이번 생애에 대해 완전한 긍정을 하며 삶을 마칠 수 있어야 합니다.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건 마음을 가질 수 있으려면 엄청난 공력이 필요합니다. 결국 죽음에 대해 연습해야 합니다. 이번 생애는 충분히 살았으니 다음 생에는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잘 죽는 것이 아닐까요?

 

 

- 죽음에 대한 통찰 -

 

사랑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죽었을 때 어떻게 슬퍼하고 감당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럴 때 연암의 글이 좋은 벗이 됩니다. 애통해하는 마음을 담아 바로 글을 쓰는 것입니다. 연암은 유··도를 회통 한 사람입니다. 연암을 글에는 그의 그런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사상을 담기 위해서는 공부와 통찰을 깊숙이 해야 합니다. 연암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그를 성숙시켰습니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공감이 삶의 중요한 자원이 됩니다. 내가 느끼는 절실한 죽음이 없다면 이기적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통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 친구의 돌무덤에서 애도하다 -

 

방학 때면 주목받지 않는 곳, 너무나도 조용하고 평안한 그곳이 나의 고향 함백이다. 이곳은 안전하고 평화롭고 살기에 좋다.

 

국민(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 하나가 있었다. 공부도 제일 잘했고, 탬버린도 매우 잘 흔들었던, 천재 끼가 있었다. 그런 나의 친구가 백혈병으로 죽었다. 그 당시 나는 백혈병이라는 병명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친구가 많이 아팠을 때 위로하기 위해 병문안을 갔었다. 그녀는 먹으면 토하고 먹으면 또 토했다. 그 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그 장면이 나의 마음에 강하게 남아있다.

 

그 당시엔 아이가 죽으면 돌무덤을 만들었다. 어릴 적 나는 공동묘지에서 뛰어놀곤 했다. 친구들과 함께 나는 친구의 무덤 앞에서 슬퍼하며 애도했다. 내겐 그곳이 놀이동산처럼 편했고 놀기에도 좋았다. 묘지가 많아 여기저기 숨을 곳도 많았다. 심심할 때면 도시락을 싸서 밥을 먹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 무덤 옆에서 쉬기도 하며 먹기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애도는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죽은 친구 무덤 곁에서 살아있는 친구가 함께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 어떤 악인도 동물보다 낫다? -

 

며칠 전 김성철 박사의 강의를 들었다. 우리가 악인을 짐승만도 못하다고 하는 건 틀린 말이라고 했다. 짐승은 선악을 모른다고 한다. 어떤 악인도 짐승보다 낫다고. 부처님 시절에도 그와 비슷한 말을 했다. 사람이 동물보다는 우월한 이유는 동물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없지만 사람은 구별할 수 있다. 선악을 구별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 안으로 들어온다는 의미이다. 동물은 그러한 과정이 없다. , 개체적 욕망이 있을 뿐이다.

 

부처님 시대 앙굴리마라처럼 99명을 죽인 살인자도 해탈했다. 그것이 가능한 건 그 안에 어떤 스토리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동물보다 못한 악인이 많다. 그들은 어떠한 이유 없이, 어떠한 스토리도 없이 사람을 그냥 죽인다. 마찬가지로 사기꾼도 피지 못할 개인의 사정이 있어 사기 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자체를 즐긴다. 이것이야말로 동물 이하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사회적 공감이 일도 없는 사람들이다.

 

나는 어떤 죽음의 형식과 비전을 갖을 것인가를 뚜렷이 세워보고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 나머지는 생략 -

 

더 이상 쓰다간 나는 풍선이 될 것이다. A4용이 한 장에 몸무게 1kg, 두 장에 2kg, 석 장에 3kg이 늘었다(?). 책상 위에는 초콜릿, 빵 그리고 떡이 놓여 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존경한다. 살이 안 찌잖아! 특히 글쓰기 할 때!

 

오늘로써 후기도 운명[殞命]을 다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말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이사야 43, 18

 

여러분도 이제 안녕!~~~

 

댓글목록

여여한일상님의 댓글

여여한일상 작성일

ㅎㅎ보성샘의 글은 어떤 때는 자유 분방함과 위트가~
또 어떤 때는 어린아이같은  순백의 마음이 느껴져서... 기분 좋게 읽게 되는 1인이예요~^*^
글쓰기하며 몸무게 느는 건 저체중인 제가 벤치마킹하고 싶은데~ㅋ
그만큼 글쓰기에 온 마음을 기울인다는 의미로 들리네요~
몸?과 마음을 다한 찐~한~ 후기글~잘 읽었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