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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금성 4학기> 2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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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빌언덕 작성일23-10-31 12:20 조회135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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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랭귀지4학기 / 2주차 후기 / 23.10.31 / 2조 이종숙

 

 

 

 

10월의 마지막 날을 향해 가는 요즈음, 태양은 기분좋게 따사로운데 하늘은 더욱 높아져 새파랗고 초록이던 나무들이 낙엽되기 전에 한창 울긋불긋 빨강, 노랑으로 물들어 예쁘다. 그리고나는 이런 것들을 그냥 놓아두지 못하고 여기저기 아는척 하느라 바쁘다.^^ 올해도 세상은 참 예쁘고 경이롭고 볼 때마다 새롭다. 이렇게 또 세상은 겨울을 향하며 수렴하려고 한다. 태어나고 자라고 한창 꽃피우다가 열매 맺고는 다시 수렴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이치. 우리들도 이러한 자연의 순환고리안에 들어 있으니 언젠가는 죽게 되겠지.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삶을 소중히 받아들이고 바로 맞닿아 있는 죽음에 대해 사유할 필요가 있다.

 2주차 묘비명 쓰기를 주제로 곰샘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꺼낸것은 이태원 참사 이야기였다. 축제를 하러 간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왜 죽어야만 했는지 원인도 모르고 애도 또한 빈곤했다. 세월호 사건이나 예전에 있었던 KAL기 추락 사건도 다 비슷하다. 이렇게 원인을 알 수 없이 죽거나 실종되면 그 불가사의함이 곧 번뇌의 양이 된다. 그들의 가족들도 일상을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매일 막막함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인연의 매듭을 짓지 못했으므로. 따라서 죽음에는 꼭 해석이 필요하다.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죽음은 대부분 돌연사이다. 생명도, 죽음도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며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 자세와 형식, 나아가 죽음에 대한 철학, (인간은 왜 죽는가,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영적인 탐구가 필요하다그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을 바라보며 우리나라도 분쟁지역이고 휴전국가임을 상기하면 우크라이나등 전쟁 국가의 참혹함이 남의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묘비명을 배운다는 것은 우리도 생사의 그물망 안에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과 관계된다.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은 이렇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을 조심하자. 두려움으로 인해 사이비 종교에 빠지기도 하고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모든 전쟁은 적이 두려워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하는 것이 있는 한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식욕, 성욕은 생존 본능과 연결된다. (먹고 사는 문제, 자손을 남기는 문제) 하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식욕 성욕은 고차적으로 누리게 되며 변태 성욕, 변태 식욕으로 나아가고 그다음 코스는 마약이다. 자신의 인간성을 다 포기하는 것이 상류층의 생활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부러워하고 갈망한다. 영혼이 털리는 건지도 모르고...안타까운 일이다. 식욕, 성욕이 변태가 되어 마약으로 가는 코스. 이곳에는 자기의 욕망이 영원할 거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죽음을 사유하지 않을 때 삶이 얼마나 황폐해지는가를 알아야 한다.

 연암은 형식에 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명문 집안이면서도 정계 진출을 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그는 일하지 않는 대신 가난을 선택했고 억압에 대한 반항과 자율성을 선택하며 인생에 대한 통찰을 하게 된다. 그가 쓴 묘비명에 그의 통찰이 잘 드러나 있다.

죽음의 공교로움에 대하여 (이몽직애사중)

우리는 매일 죽을 뻔한 환경에 부딪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상황에도 공교롭게 잘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이 요행이다. 그런데 죽음은 너무 돌연히 다가온다고 하였다. 귀이개(소뿔로 만든)에 찔려 죽는 여인, 숟가락이 폐로 들어가 죽은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쇠와 소를 미리 조심하라 해서 우리가 조심한다고 해도 이와 같은 경우를 피할 수 없으리라. 따라서 사주 관상에 끄달리지 말아야 한다. 부적등을 쓸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재물을 보시하는 것이 낫다. (나의 질량)를 덜어내는 방법으로 우주에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수양, 수행을 하는 수밖에 없다. 말과 행동에 생각의 발동을 경계하고 제어하는 힘이 있는가가 핵심이고 이것이 보편 원리이다. 사술은 아주 큰 재앙일 때는 맞출지언정 인간의 고귀한 복(지혜로워지는 것)은 못 맞춘다는 것을 유념하자. 주역 또한 통달한 사람은 주역점을 치지 않는다. 내가 가는 길이 올바르다면 환란이 있다 해도 그길로 갈 것이고 욕망이 있는 길은 올바른 길이 아닐 것이다. 기대할 바가 없는 무원의 경지로 가야 한다이제 매형의 외사촌이면서 연암에게 글을 배운 이몽직의 요절에 대해 쓴 묘비명을 보자평소 귀엽고 명랑한 이몽직이 활터에서 빗나간 활에 맞아 후손 없이 죽게 되었다. 전쟁 중이 아닌데도 활에 맞아 죽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매우 공교로운 일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삶은 다 요행임을 알게 된다. 연암은 이사춘 등의 친구들이 황망하게 죽거나 유배된 상황에서 충격을 받아 경조사를 끊고 막막하고 허무한 상태로 권력은 위태롭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중에 각별한 정을 나눈 몽직까지 황당한 죽음을 맞이했으니 떠나보낸 자의 슬픔과 통찰, 죽음과 삶에 대한 깊은 사유가 있다. 먹먹하기도 하고 사주관상 같은 이야기로 어이없는 웃음을 주기도 하는등 연암의 묘비명은 특징이 있다.

산 자가 더 슬프다(유경집애사중)

유경집은 연암의 친구의 아들인데 22살에 병사하게 된다. 조부모와 부모가 아끼고 사랑하던 경집의 죽음에 친척과 친구들이 모두 슬퍼하였는데 조부모는 아들의 슬픔을 더할까 못울고, 그의 부모는 늙은 부모 마음이 아플까 못울고, 슬픔을 아직 모르는 2살된 경집 아들만 제 어미가 슬퍼함에 덩달아 울어대니 아내는 죽지도, 곡도 못하고 속으로만 울었다. 연암은 사랑하는 가족들이 제대로 슬퍼하지 못하는 까닭을 이야기한다. 가슴이 절로 먹먹해지는 장면이다죽은 자와 산 자 중 누가 더 슬플까 생각해보면 산 사람이 더 슬프다. 속임을 당한 고통으로는 가장 크다고 느껴지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친한 사이인 아들, 자식같은 손자, 남편이 갑자기 모두에게 등 돌리고 떠난다면 그보다 더 마음 아픈 고통이 있을까? 지극히 사랑하는 인연은 가장 끔찍한 이별의 아픔을 준다. (그래서 나에게 대충 사랑하고 잘 못하는 사람은 슬픔을 덜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하신다^^) 연암이 이런 장면을 생생하게 쓸수 있는 것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암은 추도사를 쓰면서 죽음에 대한 통찰을 훈련하며 자기의 슬픔을 추스르고 고통을 통찰한다. 지혜를 통해서만이 인간이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 글쓰기가 보여주고 있다. 잘 애도해야 인연을 잘 마무리 하고 이후의 삶에 더 충실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연암의 애도문은 슬픔 애통함에 대한 감탄사가 없지만 절절해지면서 그 인연장 안에 들어가게 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배울 필요가 있다.

 질문

욕망과 간절함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욕망은 생명 차원의 바램이고 좋은 삶을 살도록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다. 하지만 만약 1등만 바라거나 판검사가 되기(사회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라는 그 속마음엔 탐욕이 있다. 절대 간절함이라 말할 수 없다. 아닌 경우를 말해 보라. 그리고 자식에게 모든 걸 다해주는 엄마, 자식 챙기는 것을 낙으로 삼는 것은 자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욕구 충족일 뿐이다. 가족 관계를 보면 온갖 페이크가 있다. 자신을 위해 한 것임에도 가족을 위한다고 스스로도 속고 있다. 가족은 일단 솔직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다. 가족의 죽음에도 자기감정에 빠져 오버하며 슬퍼하는 것도 다 탐욕과 과시임을 자각하자.

글쓰기에 대하여...

픽션이 강한 시, 소설, 희곡같이 예술에 속하는 문예물들은 풍부한 감정 전달이 중요하지만 동양의 글쓰기는 도, 철학에 속해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통찰하게 한다. 통찰이 지성의 핵심이다. 그러나 요즘 예술 지상주의의 팽배로 광고, 드라마로 인해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자기 감정으로만 해석하는 소설, 드라마는 허구이므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예술을 금지한다. 금욕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망상을 주기 때문이다. 달라이라마는 세상은 이미 망상으로 가득한데 거기에 왜 허구를 덧붙여야 하는가라고 말했다.

후기를 쓰려할 때 2시간의 곰샘의 강의를 제대로 풀어낼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에 오히려 머리가 딱딱해지는 느낌이었다. 갈수록 글쓰기가 부담되고 어렵다 느껴지니 4학기가 더욱 막막해지고 있어 큰일이다.ㅜㅜ 최대한 강의 내용을 충실히 담으려고 노력했지만 많이 부족하다. 그리고 나의 사유가 생기기에는 아직도 요원함을 더불어 자각하게 된다. 곰샘의 강의가 다 공감되며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지만 막상 내 말로 풀자니 너무 어려워 겨우 간추리기만 했음을 고백하며 늦은 후기를 마친다.

 

 

 

 

 

 

 

 

 

 

 

 

 

댓글목록

솔해님의 댓글

솔해 작성일

11월에 들어서 제법 찬바람이 부는 지금, 늦은 댓글을 씁니다. 선생님 글의 첫단락을 읽으니 초겨울 따뜻한 난로같은 느낌에 잠시 발걸음 멈추고 쉬었다 갑니다. 후기 잘 읽었습니다 ^^

나영님의 댓글

나영 작성일

곰샘 강의 정리도 좋지만 “가을에 아는척 하느라 바쁜” 샘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지는 듯한 처음 문장들이 너무 명랑하여 안쓰던 댓글을 다 씁니다 ㅎㅎ  여태 안쓴건 인연의 부재였다고 변명하면서 =.=;;;

김연극님의 댓글

김연극 작성일

정리하고 마무리하고 그리고 퇴고하고...참 쉬운일 아니지요! 점점 부담되는 글쓰기를 통해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삼아 쓰담쓰담 해줄수 있을까? 저도 참 고민됩니다.

글을 통해서 말하고 싶음, 말할 수 있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다가도 써놓은 문장을 보곤 좌절과 불행(?)이 동반 방문 하더이다.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는 역시 희망만 반영된 '망상의 안락의자'에 걸터 않은 꼴이되었음을 곧 알아차리고 벌떡 일어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도 무청김치에 막걸리 한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