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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기 에세이 후기 - 2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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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씨앗 작성일16-10-04 00:25 조회2,4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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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 스쿨 / 3학기 에세이 후기 / 2
 
이흥선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 글인지, 자기가 무엇을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18세기 부르주아 가족이 나오는데, 앞의 본인의 문제의식과 어떻게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자위행위를 끊임없이 관리하고, 가족의 핵심에 자위행위가 있는 것이 아닌데. ‘다양한 사람들의 욕망과 욕망이 만나 서로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그랬다?’ 욕망이 다양하게 만나서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가족이 생겼다? 이 문장은 서로의 욕망을 충족시키면 가족이 출현하고 뭐가 되고 그런가? 뭘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있지도 않은 아이의 성이라고 말했는데 아이의 성이 있느냐 없느냐? 푸코는 아이의 성이 있다. 없다라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성을 실체화 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푸코가 주장하는 것은 왜 갑자기 아이의 성, 섹슈얼리티가 있는 것처럼 실체화 되었는가? 그것인 것이다. 이렇게 이런 부르주아 가정에서 자위행위 이런 것을 통해서 만들어 졌다는 것이, 자신의 글과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래나 위에 문제제기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만들어진 가족주의란 말은 푸코가 쓴 말이 아니다. 가족주의란 것은 왜 그토록 많은 다양한 관계들 속의 인간들을 몸을 담고 행위 하고 살아가면서도 결국 욕망이 가족을 환원 될까? 가족을 중심으로 환원 될까? 근대 가족주의라고 사회학자들이 명명하는 것이고, 푸코는 가족주의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을 이야기 하면서도 푸코는 가족과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법 권력의 장, 위협권력의 장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지금이야기 하는 것은 전부 가족만 보고 있다. 어떻게 자본이 가족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떻게 자본이 우리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여러 영역들, 이 세계의 경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런 영향을 어떻게 받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푸코의 성실한 논의와 연구를 빼고 오로지 가족만 보는가? 우리의 발상과 사고 차체가 가족주의 이다. 결국은 모든 문제가 가족으로 환원 된다. 깊이 생각해 봐라.
내가 힘들어 할 수 있는 일을 대신 해 줄 수 있는 구성원을 원하며 가족에 집착했다면 집착의 끈을 내려놓고. 지금 이것을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가? 내려놓는 과정이 있어야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스스로 해나가는 신체를 만들려면 글 쓰는 힘든 것부터 해라. 안하면서 뭘 하겠다는 것인가? 글 쓰는 것이 그렇게 어려우면 그것 먼저 해라.
푸코 인용문에는 권력관계가 의도적이라고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왜 의도적이지 않다고 했는가? 권력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주체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 자체가 의도가 들어가 있다. 하지만 주체의 의지로 환원되지 않는다. 권력을 의인화 하거나 권력을 개인으로 자꾸만 보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인용할 문장을 통해서 권력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을 하지 않고 결론만 가져 왔다.
이것은 미완의 글이다. 제목은 가족주의로 뒤엉켰는데, 가족주의가 자신의 삶과 어떻게 뒤엉켰는가? 이글로만 보면 뒤엉키지는 않았는데 그냥 딸하고 심플하다. 제목을 정할 때도 생각 없이 정하지 마라. 제목을 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무슨 질문을 할 것인지 그것이 없는 것이다. 이글은 앞뒤가 맞지 않고, 질문이 들어나지 않는 글이다. 글을 썼지만 아무것도 쓴 게 없는 문제가 되었다. ‘자기를 본다라는 것은 그것을 다 끄집어내서 내가 공부하는 온갖 것으로 이렇게도 분석하고 저렇게도 분석해 보는 그 과정이 공부다. 이 정도로는 똑같이 돌아갈 것이다.
 
전미령
2학기 에세이의 주제와 소제목은 당시 내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는데, 코멘트가 끝날 무렵 시작이 어디서 꼬였는지 알았기에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3학기 내내 이 상황을 어떻게 넘어가야 하는지모든 것이 기승전 에세이였다. 그러다 에세이 제출 막바지에 내 욕심을 들여다보면서 마음이 좀 가벼워 졌다.
책을 여러 번 읽어도 이해하기가 힘들다면 굳이 푸코가 아니어도 자기에게 맞는 걸 열심히 하면 된다고 채운샘이 말씀하셨다. 아마도 난 당분간 아름답고 화려한 글을 쓴 푸코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신선한 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공부 재미는 자기만의 언어로 변화시키는 공부가 되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는 말씀. 역시 공부 내내 고민하는 부분이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 대해 채운샘께서 삶의 문제의식이 없으면 질문이 생기지 않는데 억지로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삶에 문제가 아예 없을 수는 없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은 내 삶에서 문제가 있는 걸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 문제의식을 찾기 전까지는 공부가 예리하게 다듬어지지 않을 것이라 하신다.
이 정도면 됐지라며 안주하는 삶이기에 절박한 문제의식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 켠으로는 채운샘 강평전 첫 코멘트처럼 좋은 삶, 올바른 삶에 대한 의지가 문제를 회피하려는 쪽으로 가게 된 것은 아닌가 싶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자기 삶, 실존을 자각하지 않으면 아무리 공부를 하더라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는 샘말씀이 결국 이 장에서 내가 풀어야 하는 과제인 셈이다.
 
이기원
결혼에 대한 전제를 말했는데 결혼을 하냐, 안하냐가 중요한 게 아니죠. 제도가 뒷받침하고 있는 그 제도를 통해서 재생산 되고 있는 욕망이라든지, 제도를 통해서 끊임없이 재생산 되고 있는 권력관계가 중요한 거죠. 결혼을 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결혼이 권력 관계를 재생산하고 있는 양상이 있죠. 그걸 문제 삼아서 이걸 분석해야죠. 그래야 결혼을 하든, 안하든 자유로워지는 게 중요한 거죠. 이거냐, 저거냐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에요. 우리에게 도망칠 수 없는 선택지처럼 주어지는 그 사안이 실제로 그렇게 선택지로 주어지는 순간, 어떻게 권력 관계들을 구성하도록 작동하는지 따져보는 것이 중요한 거죠.
아래에 권력,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정의했죠. 결혼을 할 때 상대를 신뢰하고 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내 능력이 이런 식으로 커지겠구나, 라는 관점이 아니라, 그냥 돈이 많아서 그런 경우도 있죠. 이익이라고 하는 게 다 다르죠. ‘권력이 이익에 따라서 움직이는거다그러면 왜 사람들은 자진해서 전쟁터로 갈까요. 왜 자기 목숨을 내놓는 IS 되는 사람이 있죠. 왜 그렇게 갈까요? 그 사람들도 그게 좋은 겁니다. 근데 좋다는 게 이익이 되느냐, 이익이 된다고 하는 편차가 너무 심하지 않나요. 단순히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아요. 이익과 손해 자체를 파악하는 방식도 이 권력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거예요.
욕망에 따라 권력이 작동한다고 했는데 사실은 거꾸로죠. 권력 속에서 욕망을 형성하고 있는 거예요. 굳이 뭐가 먼저냐고 하면 권력이 먼저에요. 관계망들이 먼저에요. 어떤 존재도 힘이 없는 존재는 없어요. 아무것도 안 해도 힘이 있는 거예요. 무력한 애들이 힘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무력한 방식으로 힘을 쓰고 있는 거예요. 권력 작동을 이미 내가 시키고 있는 거고 그 안에서 힘이라는 건 하나만 작동하는 게 아니라 상이한 힘들과 같이 작동하면서 내 실존을 펼치는 거예요. 거기에서 내 욕망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푸코에게는 그러니까 힘 관계가 먼저에요.
그리고 4p우리 모두에게는 진리를 알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고 썼는데 아니에요. 앎의 의지가 진리를 알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진리 자체가 의지라는 거고. 오히려 푸코는 사람들은 모르려는 의지가 더 강하다고 생각했어요. 진리를 알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는 거 자체가 하나의 의지에요.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의지가 아니라, 진리를 향한 의지가 앎의 의지 중에 하나에요. 모두가 어떤 앎을 구성할 때 진리에 도달하겠다는 걸 가지고 앎을 구성하는 건 아니거든요. 진리에 도달하겠다고 공부하시는 거 아니잖아요. 근데 어떤 사람은 내가 하는 학문은 진리를 향한 학문이다, 이렇게 얘기한다고. 그 자체가 의지의 다름을 보여준다구요.
푸코가 진리를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성애의 기술이 있다고 했는데, 성애의 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실천과 경험이다, 이렇게 얘기했으면 성애의 기술을 얘기해야 되죠. 그럼 연애 얘기부터 시작했으니까 기혼이건 미혼이건 상관없이 주체하지 못하는 성욕이 있죠. 그 성욕은 공부를 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이 성욕의 기술이 그래서 필요한 건데 성욕에 대한 문제, 결혼에 대한 문제, 연애에 대한 문제, 섹스에 대한 문제 이런 걸 건드리면서 가야 최소한 성애의 기술을 현재적으로 운용할 것인가 나오지 않나요. 이런 맥락이 하나도 없으니까 결론에 가서 우리가 흔히 들어서 아는 얘기로 회귀해버리는 거죠. 앞에 재밌는 질문들을 많이 던졌는데 그 질문들을 더 파고들면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우리가 공부하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의 욕망에 대해서 건드릴 수 있는 게 있을 거 같은데 그게 확 없어져 버리고 진리에 대한 의지, 나의 한계를 넘어설 때의 쾌락, 존재의 변화에서 오는 쾌락으로 튀었죠. 내 존재 속에서 내 한계를 넘어섰을 때 나는 이런 류의 쾌락을 구성할 수 있었다. 이런 쾌락은 다르다, 한계를 넘어가 보면서 이런 쾌락을 얘기해야지. 그랬을 때 푸코의 앎이 나에게 다르게 다가왔다거나 하죠. 결론에선 우주와의 합일 얘기하고 그리고 일상이 소중하다고 했죠. 이 간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모르겠어요. 마지막 부분에 가서 그렇게 된 이유가 전제를 흔드는 질문이라고 얘기했는데 어떤 전제를 흔들고 싶은지가 확연하게 드러나지가 않아서 그래요. 건강 얘기도 나오고 연애 얘기도 나왔는데 본인의 어떤 전제를 흔들고 싶은 건지. 그런 게 나와야 그런 기술들을 어떻게 운용할 건지 나오는데 앞에 부분이 충분히 문제가 잘 제기된 거 같지 않아요. 그러니까 언제나 결론은 벙벙하게 우리가 늘 하는 얘기밖에 없죠.
 
안은숙
에피소드를 읽고 의학 관련 이야기를 다룰 줄 알았다. 감이당 공부를 하면서 전의 생각들과 계속 충돌을 하는데 아직 그 충돌을 문제화하지 않는다.
질문을 절절하게 하지 않았다.
나는 왜 아직도 현대인의 의학담론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있을까?, 푸코를 얘기하든 지금 감이당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서 그 담론과 내가 상투적으로 가지고 있는 담론과 충돌하는 건데 그 충돌하는 것에서 질문을 끄집어 내야했다.
당연하다고 푸코가 말했을 때 뭐든지 의심보란 말일까? 우리가 당연하다는 말을 생각할 때에는 이 시대에 전제된, 이 시대의 담론이었다. 우리는 이 담론 안에 있기 때문에 다 볼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어떤 지평위에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것을 의심하라는 것.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글이 이상하게 되는 것이다. 1단락에서 2단락으로 넘어갈 때 너무 비약되었다. 푸코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헌데 이런 이야기와 내가 일상에서 하게 되는 일들과 충돌을 하게 된다. 이렇게 출발이 되어야. 에세이는 이런 문제를 파고들어가 보겠다고 시작해야지. 이게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이다.
질문을 도출하는 과정을 못한다. 왜 이게 안 되냐면 글쓰기에 요령이 없어서가 아니다. 내가 푸코에게 뭘 읽었는가? 푸코의 텍스트에서 출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모든 문제가 내 남편, 내 자식, 가족으로 환원되는 걸까? 거기서 확장되지는 못하는가? 의심스럽다. 실존의 문제가 가족을 벗어나서는 고민할 것이 없는가? 나의 늙음 문제, 내가 활동하면서 부딪치는 자의식의 문제 등
내 문제로 다가온다는 게 남편이든 엄마든 그 관계 속에서 생각되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과 연결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비전속에서 생각이 되어야 하는 게 공부다. 그런데 글을 쓰라고 하면 그 영역을 벗어나질 못할까? 왜 경험하는 게 내 문제로 오지 않고 그 시선 속에 머무르게 될까?
텍스트를 읽으면서 자기 문제에 대한 질문을 다르게 가져야 한다.
푸코를 읽었다는 겉멋만 있는 거지 과정은 없다.
*** 선생님 코멘트를 들어보니 내가 푸코를 너무 몰랐다는 생각과 자의적으로 책을 읽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질문부터가 틀렸다.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과 연결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비전속에서 생각하라는 말씀을 되새겨 보겠습니다.~~
 
박수진
푸코의 책을 단 10장이라도 읽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 글을 이해하려고 깊이 고민해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나의 생각들을 집약해서 풀어내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그것이 푸코에 대한 예의였고, 그 날 그 곳에 모인 학인들에 대한 예의였다. 나의 글은 이것저것 떠도는 상념들을 모아놓았을 뿐이었다. 다시 읽어보는 내 글 어디에도 푸코를 제대로 이해한 부분은 없었고, 일기라는 형식을 빌어, 쓰고 싶은 대로 쓰면서, 에세이가 주는 무게감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또 내 글은 하나의 문제의식을 갖고 집요하게 물고 끝까지 가지 않았다. 소주제 글에서도 이런 부분이 계속 반복되었고, 인용글에 대해서는 너무 무책임했다. 나는 왜 글을 이렇게밖에 못 쓰나를 생각해보면, 우선 나는 책을 꼼꼼히 읽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작가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 책을 느낌으로 읽어버리고 그 느낌을 갖고 내 방식대로 이해하며 글을 쓴다. 누가 나에게 글쓰기를 통해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가 간절했나? ’를 물어본다면, 나는 그저 쓴다는 것 자체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 같다. 3학기 에세이를 통해 나는 지금까지 내 글에 책임감 없이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에 대해 많이 부끄럽게 생각한다.
 
정지원
결국은 에세이를 못 쓴 거다. 자기 억압이 뭔지도 결국 파악을 못했다. <약한 자의 슬픔>을 읽어 봤느냐? 이걸 보는 순간 딱 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그러면 왜 이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냐? 정말 맘만 있고 행동은 안 하고 있는 나를 봤다. 왜 그걸 안 하고 내가 공부가 안 되고, 막 나는 자신감이 없을까라는 한탄만 하고 있었다. 왜 엉뚱한데 가서 자기 문제를 찾고 있냐고? 채운 샘은 만약에 이런 글을 읽다가 짤막한 글이지만 엘리자베트가 딱 였다고 생각이 들었다면 그 소설을 막 찾아서 읽을 거 같았다고. <약한 자의 슬픔>은 길지도 않다. 그걸 읽고 그 소설을 가지고 뭘 해보던가. 그런 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감을 어디에서 찾느냐? 자신감은 누가 주는 게 아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진짜 자신감이 없어져요. 내가 모르는 게 아닐까, 내가 못하는 게 아닐까? ! 나는 여기까지 밖에 아니구나. 그거는 다 자기 수준에서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채운 샘도 그렇다고. ! 나는 이거 이상은 안 되는 게 아닐까?, ! 이렇게 모르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거다. 누구나가 다 이런 생각을 한다고 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고. 누구나가 자신감이 없고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고. 근데 그때 그걸 벗어나는 일은 왜 자신감이 없지 이런 게 아니라 그래도 읽는 거야. 이게 이해가 안 되면 이것을 좀 찾아서 읽고 이게 좀 재밌어 보이는 이거라도 찾아서 읽고 그렇게 뭐 좀 쌓여야 자신감이 생기지. 그런데 나는 왜 자신감이 없고 글을 못 쓰지. 그러니까 글을 못 쓰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글을 못 쓸 수는 있는데 글은 좀 타고난 것도 있으니까. 근데 어쨌든 글을 정말 재주가 있게 잘 쓰는 거는 따로 있어. 그런데 훈련을 하면 재주 있게는 못 쓰더라도 글이 단단하게 잘 쓸 수는 있다. 글을 쓰는 거에 어떤 기본적인 재주도 필요한데 그런데 기본적으로 내가 공부하고 글 쓰는 것에 대해서 나를 속이지만 않으면 글을 쓸 수 있다는 거다. 김현식 선생님처럼 글이 현란하지 않아도 진심이 느껴지면 된다. 그러면 된다. 그런데 글쓰기에 대한 욕망은 강한데 글이 안 써진다. 이게 문제다. 글쓰기에 욕망을 강하게 갖지 마라.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강하게 갖지 말고 성실하게 읽고 싶다는 욕망을 강하게 가져라. 성실하게 읽으면 그 읽은 게 내게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떻게 읽는데 내 것이 안 되느냐. 읽고 읽고 또 읽는데. 그럼 문장이 새겨진다. 그럼 나도 모르게 글을 쓰는데 그 문장이 어디선가 온다. 외우면 온다. 놀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냥 음악만 나와도 노래 가사가 나오잖아. 이것과 똑같은 거다. 성실하게 읽으면 성실하게 읽은 만큼 내 어딘가에 새겨진다.
그럼 글을 쓸 때 아 맞아 내가 예전에 읽은 것에 저런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러다가 이 생각이 펴지고 글이 되는 건데. 왜 그런 욕망은 안 가지고 글을 잘 쓰겠다는 욕망만 가지는 걸까. 그러니까 안 써지지. 써지면 이상한거지. 진짜 여기서 공부를 계속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한다면 왜 자신감이 없을까가 아니라 본인이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열심히 읽어내고, 내가 열심히 읽은 것을 열심히 정리하는 방식으로 해라. 남들보다 그게 훨씬 더 없어 보이더라도 지금 내가 그 상태인데 어떻게 해. 나는 그냥 정리하고 그 상태서부터 해야지.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어는 순간 쓰게 된다. 솔직하거나 성실하면. 글 쓰는 거 딴 게 있느냐 그거 두 개지.
 
최소임
채운 샘 코멘트 : 푸코가 분석해 놓은 것들에서 중요한 것들을 빼놓고 아주 작은 부분만 가지고 글을 썼다.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 전체 맥락 속에서 보지 못하니까 부분적인 것에 꽂혔다. 근데 왜 그 부분에 꽂혔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에세이 앞, 뒤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본인이 이해 가능한 부분만 정리했다. 그것을 둘러싼 정말 중요한 것들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결론이 이상하다. 제목과 내용이 맞지를 않는다. 글을 쓸 때는 반드시 자신이 왜 이걸 중심으로 글을 쓰는가에 대한 내용이 있어야한다. 그래야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있게 된다.
소감 : 다른 학인들에 비해 코멘트가 짧았다. 책 전체의 맥락을 파악하지를 못하다보니, 내 말로 쓸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에세이 준비 기간 내내 멘붕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궁여지책으로 겨우 이해되는 부분만 골라 책 내용을 요약정리 했다. 나의 문제의식이나 관점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샘께서 코멘트를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으셨나보다. 많이 속상하고 아쉽다. 다른 학인들이 애정 어린(?) 코멘트를 듬뿍 받는 것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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