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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기 5주차 수업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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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포츈쿠키 작성일16-08-19 13:04 조회2,4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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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수업후기

1교시에 공부한 내용은 폐, 대장.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게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음식이고 하나는 공기. 즉 지기와 천기이다. 외부의 천기를 받아들여 내 몸의 기운을 조절하는게 바로 폐다. 폐 그림의 24개의 구멍은 24절기와 호응하는데 천기를 받아들이면서 우주와 소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폐는그저 단순히 호흡기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동의보감은 이렇게 구멍까지 그려가면서 몸과 우주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말해주고 있다. 오장 육부의 그림은 언제 봐도 재미있다.

폐에 배속된 감정은 비우(悲憂)이다. 색은 흰색, 계절로는 가을. 가을에는 쓸쓸해지기 쉽고 폐가 약한 사람은 창백해지고 기침을 하고 심하면 선혈을 쏟으니 폐병이 낭만적 문학과 결합하기 쉬웠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폐의 이상증상은 우선 코로 나타난다. 폐가 풍한사를 감당하지 못하면 맑은 콧물이 흐르고 풍열사에 노출되면 누런 콧물이 흐른다고 하는데 나는 이번 여름 유난히 맑은 콧물을 많이 흘렸다. 속이 찼던 모양이다. 우리 기원장 식구들은 이 더위에 다리에 토시를 하기도 하고 뜸도 뜨면서 하체를 보호하는데 나는 겉열이 많은지 겨울에도 답답해서 토시를 할 수가 없었다. 여름이라 더욱 엄두를 못내었다.

조선의학 생활사의 저자 이문건을 두고 우리는 오늘도 이 사람 기록 중독증이 아니냐며 놀라워했다. 자신과 가족들, 종들의 병과 치료, 약재와 처방, 침구등 의학 전반에 대한 기록도 대단하지만 툭하면 종들을 매질했던 자신의 행동까지도 가감없이 기록했으니 도저히 쓰지 않고는 못배겼던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 시대의 글쓰기는 꼭 격식을 갖춘 것만이 아닌, 무엇이든 쓰고보는, 쓰는 것 자체만으로 좋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우리 동네에 약할머니가 있는데 제주도 오일장을 두루 돌아다니며 약재를 파는 분이다. 단아한 맵시에 마음도 정갈해보인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종종 그 할머니에게 처방을 받는다. 나도 몇 번 약재를 사서 달여 먹어보았다. 문득 그 할머니 장터에 따라가서 약재를 사고 파는 광경을 기록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묵재일기를 보니 다시 그 생각이 슬금슬금 기어오른다.

옛날엔 지금과 달리 종기가 많았다는 점도 이채롭고 약이나 침으로 구완하지 못하면 점쟁이나 무당에 의지했던 점도 그렇다. 하지만 당연하다. 근대 이전엔 보편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나만 해도 아이들이 어렸을적 무당과 동네 침할머니에게 의존했었다. 아이가 홍역을 앓았을 때 아슬아슬한 적이 있었다. 옆집 삼춘이 와서 보더니 이 지경이 되도록 병원만 의존해 있었냐며 빌어야 된다고 했다. 삼춘은 무당을 청해오고 남편이 직장간 틈을 타 몰래 무당을 청해왔다. 뜨거운 밥을 해서 상에 올려 향을 꽂고 빌고 또 빌었다. 그날 저녁 애기는 오랜만에 잠을 자더니 깨끗이 낳았다. 그 후부터 그 무당 할머니는 우리 아이들의 단골 주치의가 되었다. 지나치게 높은데를 올라가거나 열이 나면 그 할머니집에 가서 침을 맞았다. 동네 아이들끼리 때로 몰려가기도 했다.

나도 어릴 적 종종 어머니손에 이끌려 침을 맞으러 다녔다. 어머니가 돈을 조금씩 드리긴 했지만 그 분은 그저 예의로 돈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의술을 핑계로 부녀자를 희롱하고 재물을 탐하고 환자를 차별했던 일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묵재일기에는 그런 폐단을 고치기 위해 김수온이 의원정심(醫院正心)을 써서 전국에 훈시, 선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국의 히포크라테서 선서라 할만 하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난뒤 섹슈얼리티와 광기의 중간쯤에 나오는 현진건의 타락자로 토론을 시작했다. 기생을 사랑하다가 임질에 걸려 괴로워하는 주인공이 등장했다. 남편은 병이 이미 아내에게 옮겨졌다는 걸 알고 죄책감에 떨고 아내의 태중에 있는 생명에게 옮겨질까봐 전전긍긍한다. 기생 춘심을 사랑하면서도 수치심과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다. 이른바 강박적 주체의 탄생. 이로써 소설은 성이 가정 밖으로 나갈 때 임질과 같은 형벌이 가해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임질은 가정의 성윤리를 규정하기 위해 등장한 셈이다. 이러한 성윤리를 지키지 않을 때 가정은 해체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의 아내도 기생에게 가는 걸 허용하면서도 성적 교섭은 불허하는데 이 또한 가정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일부일처제, 가정안에 가두어진 성. 가정은 이제 방탕한 욕망을 판별하는 시금석이자 권력의 공간이 된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어렵지 않다. 아니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같다. 성윤리를 지키는 가정을 권력의 공간이라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가정은 해체되지 말고 안전하게 유지되어야할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얼마나 근대가정의 윤리에 내면화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아득한 석기 시대는 분명 모계사회였다. 옛날에 읽었던 어떤 소설에는 여자 추장의 지도아래 남녀들이 돌아가면서 짝을 짓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들은 사냥갔던 남자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들이 오신다라고 소리친다.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들‘. 어머니만 분명하고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른다. 요즘은 인도에선 50이 넘으면 각자 집을 떠나 수양의 길을 떠나기도 하고 우리 사회에서도 해혼식을 하자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가정의 성윤리라는 것이 만들어낸 윤리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푸코에 따르면 가정이 이처럼 성윤리를 규정하는 권력의 공간으로 등장한 것은 지극히 근대의 일이다. 이는 서양의 브로주아 가정에 한정되었던 윤리이며 브루주아 가정 또한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만들어졌을 뿐이다. 마지막 시간 비정상인강의 때 이게 잠깐 나왔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불변의 진리인것처럼 받아들이며 스스로 강박적 주체가 되어 살고 있는데 우리의 경우 그 기원을 올라가보면 1920년대, 이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가 아닐까? 라고 지은이 이수영은 말하는 것 같다. 또한 임질이라는 의학 지식이 강박적 주체를 생산하는 기제가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지식이 권력이 되고 마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돌파해야할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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