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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스 3주차 수업후기 - 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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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미 작성일16-03-07 06:45 조회2,4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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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시: 의역학-  육친 강의

이상하게 지하철이 한가하다 싶더니... 삼일절이란다. 감이당은 국가가 정한 시간표가 아니라, 우주적 시간표를 따르는 곳^^. 남들 다 놀 때 우리는 공부한다. 의역학을 공부하고 나니, 왜 삼일운동이 31일에 일어났는지를 알거 같았다. ‘못살겠다. 뒤집어엎자!’ 寅月 의 강한 기운이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은 거다. 이렇게 음양오행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 재미가 쏠쏠하다.

육친은 바로 그 음양오행의 프레임으로 인간의 삶의 문제를 해석한 방법론이다. 우주가 인간의 삶을 만나면, 오만가지 재미난 이야기가 펼쳐진다. 육친은 단순히 남편복, 재물복, 자식복 등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음양오행의 상생상극이라는 우주적 원리가 우리 삶의 동선과 리듬, 즉 운명을 만들어낸다. 사계절의 차서가 있듯, 우리가 살아가면서 밟게 되는 다섯가지 스텝이 바로 육친이다. 육친을 다른 말로 십신이라고 한다. 내 운명은 내안에 있은 열가지 들이, 즉 기운과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결국 내 운명의 주인은 나 자신이다. 의역학을 공부하면 점점 남 탓하기 힘들어진다.

이번 육친을 공부하면서 전형적인 식상생재형 사주인 내가 넘어서야할 지점이 어디인가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나는 꼭 재성에서 관성으로 넘어가야할 지점에서 넘어지는 동일한 패턴을 반복한다는 것을. 올해도 그 문턱을 넘기 위한 공부를, 낭스 도반들과 지지고 볶으면서 한번 해볼라고 한다.

 

2교시 : 낭송과 강독: 글쓰기와 반시대성

우리 조는 모두 식상이 발달하거나 과다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 조모임이 화기애애하다 못해, 딴 길로 새기 일쑤다. 서로 돌아가며 낭송을 하고, 왜 그것을 낭송했는지 나누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그래서 다음 주부터는 낭송한 이유에 대해서 쪽 글을 써와서, 글만(!) 읽기로 했다.

이번 <글쓰기와 반시대성>에서는, 김려와 이옥의 우정이 감동적이었고, 또 다산의 유배와 이옥의 유배를 비교한 부분, 유배를 여행으로 변주해내는 이옥의 시선이 흥미로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모두들 <글쓰기와 주체화 과정>이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말해, 함께 강독을 하면서 의문점을 나누었다. 주체화, 코드화, 영토화 등등의 난해한 철학적 개념들이 마구 뒤섞여 있는 불친절한(^^) 채운샘의 글을 해석해내느라, 모두들 머리를 모을 수밖에 없었다. 집단지성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텍스트다.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곧 권력을 의미하고, 이옥처럼 지배담론과 다른 글을 쓴다는 것이 갖는 저항의 의미를 함께 이야기 나누었다. 1학기 에세이 주제가 나는 왜 글을 쓰는가?’이다. 이옥에게 글쓰기가 저항이었다면, 나에게 글쓰기는 무엇인가를 계속 질문으로 가지고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3교시 : 글쓰기 : 균형과 변주의 달인, 소동파

작년에 소동파에 대해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전적벽부> 원문을 낭송하면서 나의 짧은 한자실력으로도 감동할 수 있게 글을 쓰는 소동파의 문장력에 감탄했었다. 달과 바람을 벗삼아 강호에서 유유자적하는 소동파가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장금샘의 강의를 통해 만난 소동파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다가왔다. 소동파는 빼어난 문장력 때문에 모함을 당하고 생사를 넘나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그가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다르게 바라보기 위해 훈련했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디서건 결핍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는 소동파의 모습이 나를 돌아보게 했다.

또한 그가 의 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상을 꼼꼼하게 챙기는 생활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적은 돈을 30개로 나누어 들보에 올리는 계산, 서사계까지 지어서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소동파. 어찌 보면 그 디테일함이 쪼잔함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냈기 때문에, 현실에 초연한 우주적 사유를 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혁명적 사유란 일상의 혁명에서 나온다는 걸 소동파의 삶에서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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