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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1학기 - 생각하고 말하고 쓰기를 증명하다 (간디이야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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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비 작성일24-03-21 23:18 조회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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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수줍은 사람이었다. 의외이지 않은가? 수십만명 앞에서 거침없이 연설을 하는 간디의 본연의 모습은 수줍음을 잘 타는 사람이었다는게. 간디는 영국에서 채식주의 증진을 위한 연설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공을 들여 몇 마디 연설문을 지었으나 정작 사람들 앞에서는 첫 마디 이상을 말하지 못했다. 그는 연설을 하려다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어 앉아 버렸다. 

간디가 말 한 마디를 못하고 그곳의 사람에게 비웃음 당하고 앉아 버렸다니 얼마나 부끄럽고 상처가 되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간디는 이 수줍은 경험을 다르게 체험한다. 자신의 수줍음으로 웃음거리가 된 것을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수줍음이 간디에게 말을 아끼는 버릇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줍음에 대한 본성이 단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힘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우리가 남들 앞에서 말을 못하고 더듬거리거나 한 마디도 못하면 주변에서 웅성대며 농담이 나올텐데 간디는 수줍음을 극복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성격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말을 못하는 것은 생각을 가다듬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는 말과 글이 수줍음을 활용하여 생각을 다듬어 나오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한 경우는 없었음을 밝힌다.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그의 마음 어디에도 상대에게 적개심이 없다. 24살의 청년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제어할 수 있었다. 이게 가능할까?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진실을 과장하고 감추며 변경시키려는 버릇이 인간 본연의 약점이므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침묵이 필요하다. 과묵한 사람은 생각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말을 신중하게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말하고 싶어서 참지 못한다. 모임의 사회자들이라면 발언권 허락 때문에 골치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다. 게다가 발언권을 얻으면 제한 시간을 넘기고, 허락도 받지 않고 계속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모든 말이 세상에 유익한 경우란 거의 없다.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내 수줍음은 내 방패가 되었다. 그것이 나를 자라게 했다. 그것 때문에 나는 진실을 알아보았다. - <간디 자서전>


이 글을 읽으면 간디의 역설적인 유머를 볼 수 있다. 말을 잘하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뒤집고 진실을 감추려는 인간의 본성을 극복하기 위해 침묵이 필요하다고 체험으로 알려준다.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말이 아니라 침묵하라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을 말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을 하고 있을 때 실수하거나 더듬으면 사람들은 웃는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그 장면이 우스운 것이지 그 사람이 우스워서 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럼에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비웃는다고 적의를 품는다. 그 적의를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놓는다. 

내 안에 품고 있는 마음이 적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상황을 반대로 놓아보면 알 수 있다. 남들이 연설을 하면서 실수하거나 더듬으면 그 자신도 웃을 것이다. 그 상황을 즐겁게 받아 들일 뿐 어디에도 적의는 가지고 있지 않는다. 그리고 금방 잊어 버린다. 자신이 어디에 위치했는가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잘 모른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모른다. 

화를 품고 있는 것은 나이다. 자신 안에 두고 자의식에 화를 가두어 그 화가 상대에게서 온 것이라고 핑계 삼는다. 이 화를 참지 못해서 벽을 치거나 주변에 화풀이를 하거나 결국은 나와 관계를 망치기 마련이다. 


간디는 말을 못하는 웃음거리가 된 것은 당연하고 자신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되려 수줍음으로 말을 신중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한다.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말과 글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게 유머이다. 말을 잘 못해서 바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을 하다보니 화를 면하고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고의 유연함이 놀랍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 사고 패턴이 간디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상황이 생기면 부정적으로 본다. 수줍음을 긍정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로 간디가 생각했다면, 현대인은 수줍음을 부정적으로 질병으로 본다. 그러니 수줍음에 걸린 자신의 모습을 비난하고 부정하고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불이익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부정적으로 받아 들여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이는 너무 자의식이 단단해서 스스로를 그 안에 가두려하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때 상처를 주었던 부분은 친구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 아마도 친구는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도 못할것이다. 당연히 아무런 의미없이 한 말인데 스스로가 그걸 상처로 떠안고 피해자라는 오류에 가두어 버린다. 이게 아니라고 간디는 본인의 체험으로 우리게 보여주고 있다. 


말도 훈련이 필요하다. 평상시에 대화를 하고 있으니 말을 잘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잘하는 사람은 없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알게 모르게 훈련을 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내가 말을 못한다고 해서 부끄럽거나 화를 낼 필요가 없다.한두번 말을 하거나 글을 쓰고 실수하면 입을 닫는다. 글을 잘 쓰지 못하거나 말을 잘하지 못하는 것은 질병이 아니다. 훈련이 부족하고 많이 해보지 않아서이다. 간디는 이후에 연설과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받아 들였다.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훈련이라고 생각했으니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몇년 후에 “연설을 꺼리는 것이 한때는 고통이었지만, 지금은 즐거운 일이다”라고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화를 자의식에 품지 않고 그걸 그대로 받아 드리고 긍정하는 것이 간디의 유연한 사고의 모습이다. 우리도 이와 같이 유연한 사고로 나를 긍정하고 내가 생각하는 고통을 겪어내려는 긍정이 우리 안에 있음을 느껴보기를 바란다. 그럼 우리는 니체씨의 말처럼 더 민감해지고, 기쁨에 대한 더 세련된 취향을,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한 보다 섬세한 혀를, 그리고 더욱 쾌활해진 감각과 기쁨 안에서 이전보다 백배나 더 영리해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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