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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1학기 렉처3 - 자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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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비 작성일24-03-15 20:03 조회4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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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비 / 화성 렉처 / 힌두 스와라지 / 20240313

 

“그 회사는 우리의 도움을 받아 창고의 수를 늘려 갔습니다. 창고를 보호하기 위해 인도인으로 구성된 군인들을 고용했습니다. 이 정도면 당시 우리가 한 것 때문에 영국인을 비난한다는 것이 소용없지 않습니까? 힌두와 이슬람은 서로 심한 적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이런 대립은 그 회사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으며, 결국 우리는 그 회사가 인도를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도를 빼앗겼다기보는 영국인들에게 우리가 갖다 바쳤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힌두 스와라지> 7장

간디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영국이 총칼로 점령한 것이 아니라고한다.  인도인들은 영국의 상품에 반해서 스스로 식민지인이 되기를 자초했고 인도인끼리 서로 싸우고 반목해 영국의 지배를 강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간디의  자서전을 읽고 이 말을 들으니 충격을 받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만약 다른 사람이 눈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그걸 인도인이 들었다면 귀싸대기를 때리지 않았을까?

제국주의는 총칼을 앞세워 그 나라의 권력자나 시민의 힘을 무력화하고 강압으로 지배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여기에는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가 된 것은 힘이 약해서 어쩔 수 없이 식민지가 되었다는 약자의 논리가 있다. 그런데 간디는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식민지가 된 것은 외부로부터 침략이 원인이 아니라 민중 스스로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 욕망이란 권력과 부를 유지하려는 인도 기득권층이고 기계 문명으로 만들어진 상품을 탐하는 인도인의 몸과 마음에 있다는 것이 간디의 진단이다. 

따라서 간디는 인도의 독립이전에 인도인의 자치(스와라지)를 요구한다. 인도인의 자치 없이 독립을 하는 것을 영국인이 인도 땅에서 물러났을 뿐 문명에 길들여진 인도인의 생활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이 떠나도 일상의 변화가 없는 인도인은 여전히 욕망의 노예로 남을 것이라 경고한다. 나라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인도인의 몸과 마음은 영국이 만들어 놓은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니 무엇하나 바뀌지 않는다. 간디는 이러한 상황을 ‘힌두스탄’이 아니라 ‘잉글리스탄’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라고 패러디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차지를 할 수 있을까? 

“진실한 인도인이라면 문제의 근원에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과식으로 소화불량을 일으켰다면, 물을 핑계로 그 사실을 회피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병의 원인을 엄밀히 조사하는 사람이 참된 의사인데, 당신이 인도가 앓고 있는 병을 고치려는 의사라면 인도병의 참된 원인을 찾아야 할것 입니다. “ <힌두 스와라지> 7장


그렇다. 자신의 병을 치료하려면 원인을 알아야 한다. 병에 대한 치료는 ‘원인을 아는 것에서부터’라는 간디의 말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말이 나를 강하게 끌어 당기게 하는 것은 어떤 지점일까? 병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나를 살펴보았다. 내가 아플때 이 병의 원인을 찾기 보다는 고통에만 집중한다. 아픈 몸을 원망하거나 왜 나만 아플까 신세 한탄을 하거나 이 고통만 없으면 죽어도 좋다라는 생각까지 한다.

아픈데 원인을 찾지 않는다. 병으로 생긴 고통만을 생각하고 바로 병원으로 간다. 의사에게 내 몸을 맡기고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의사가 내 병의 원인을 알려주기를 바란다. 여기에는 두가지가 나에게 작동하고 있다. 첫번째 병을 아는 전문가인 의사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신체를 모르는 나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두번째는 병이 생긴 원인이 내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의 원인을 찾으려는 회피이다. 

의사가 병을 나보다는 많이 아는 건 사실이다. 내 병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도 있다. 그러나 병을 진단할 뿐 그 원인은 진단하지 못한다. 의사는 나의 신체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체를 모를 뿐 아니라 나의 생활습관도 나보다 모른다. 아니 나에게 관심이 없다. 물어보는게 “술 마시세요. 담배하세요.” 정도! 내가 무엇을 먹는지 내 생활 습관이 어떤지를 아는 것은 바로 나다. 의사가 아니다. 

나는 2년간 허리가 아파서 고생을 했다. 한달에 한번 허리에 갑자기 통증이 오고 일어나는게 불가능하다. 고통 때문에 일어나는데 20분이 걸린다. 일어나기 위해 몸의 자세를 조금이라도 바꾸면 바로 허리에 칼로 찌르듯 아프다. 고통을 참을 수 없어서 바로 넘어지기도 했다. 통증이 오니 이렇게 살아야 할까하고 정신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힘겹게 동네의 한의원을 찾았다. 침을 맞으면 거동이 조금 편해진다. 그렇게 1주일간 침을 맞으면 통증은 사라지고 이제 살만하다. 숨통이 트인다. 

그런데 문제는 병이 반복이 된다. 부지불식간에 갑자기 허리 통증이 온다. 그럼 벌레가 되어 몸을 꿈틀거려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고통때문에 죽고 싶다. 다시 한의원을 찾아 침을 맞으면 허리가 나아진다. 1년간 5번이 반복되니 이상했다. 지금 내 상태가 병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 질문이 이 시기에 생겨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똑같은 증상이 반복되는 것은 원인이 있지 않을까를 생각하게된다. 이때 마침 니체와 간디를 읽었다. 간디가 스스로 병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이때 나에게 직방으로 왔다. 그리고 니체가 말하는 고통이 오면 섬세하게 관찰하는 말도 같이 들어왔다. 원인을 찾기로 했다. 먼저 어떤 통증인가를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안까지 아프지 않고 겉에서 아픈 느낌이다. 내부 뼈가 문제가 아니라 겉 근육이 문제라고 판단했다. 근육이 문제라면 자세가 문제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 질문을 해 보았다. 그럼 어떨때 아프지 하고 생각해 보니 장시간 3시간 이상 운전한 다음날이면 아팠다. 그럼 운전 습관에 문제가 있다고 추론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운전하는지 자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바른 운전 자세가 어떤지를 공부하니 문제를 알 수 있었다. 나 스스로 자세를 교정했고 그 이후 허리의 통증은 사라졌다. 그리고 한가지 더 4년전부터 운전을 하고 나서 부터 걷지를 않았다. 모든 이동을 차로 하다 보니 허리가 약해진 것도 원인이었다. 이 병의 모든 원인은 다른데 있지 않고 나에게 있었다. 병에 온전히 내 몸을 맡기고 겪어보니 내 문제의 원인을 알게된 것이다. 


단식은 자제가 목적이다

허리의 통증에서 내 신체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되었다. 내 신체를 들여다 보고 병에 대해 몸과 마음의 대화를 하는 순간을 체험했다. 체험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한번도 몸으로 겪어 보지 않았으니 병의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도 하지 못했다. 

이러한 체험 후에 궁금해졌다. 간디는 어떻게 자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채식과 걷기 그리고 단식이 간디의 핵심이 되는 건강법일까? 채식은 당장은 어렵고 걷기는 시작했고 그럼 단식을 해 볼까? 단식이 궁금해 졌다. 단식으로 내 신체가 달라질까? 단식하는 기분은 어떨까? 궁금해서 해 보았다. 단식 후에 뭐가 달라졌나라고 묻는다면, 달라진 것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마음에 변화가 있다. 주 1회 하루 단식을 총 4회를 했다. 그 과정은 힘들고 어려웠다. 배가 아프기도 하고 음식 냄새가 고통을 주기도 한다. 

단식을 몸으로 겪고 나니 단식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생겼다. 그리고 생각보다 단식의 배고픔이 고통스럽지 않다. 심지어 일을 하고 있을때는 배고픔을 잊기도 했다. 단식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행위에 아무런 의미를 두어서는 안된다. 목적이나 의미를 부여하면 그걸 핑계로 특정한 조건을 내세워 어긴다. 맛있으면 0칼로리 같은 핑계 말이다.  단식은  자제가 되어야 한다.자제를 목적으로 하면 핑계를 댈 수 없다.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브라마차리아를 어떻게 핑계를 댈 수 있단 말인가? 


자치는 일상이다. 

“사람이 자신의 감각을 쇠약하게 만들 때 감각의 대상들이 그에게서 사라져가지만, 그것들을 바라는 갈망은 사라지지 않느니라. 그가 지고자를 붙잡을 때 마침내 갈망까지도 사라지는 도다.” <바가바드 기타> 2장 59

단식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아직 내 몸과 마음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어떻게 아는가. 단식 후에 간디가 말한 심각한 후유증이 오기 때문이다. 단식을 끝마치면 폭식을 한다. 하루 못먹은 걸 보상하듯이 나는 먹깨비가 된다. 단식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단식이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을 알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몸과 마음을 망칠 뿐이다.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아침 안 먹기를 시작했다. 나에게 브라마차리아가 추가 되었다.

병을 온전히 겪어 내고 단식을 체험하면서 알게 된 것은 그 행위 자제가 목적이고 그걸 체험하면 기분을 전환할 수 있게 된다. 아플때 병을 원망하거나 내 신체를 증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게 되었다. 여기에는 병의 원인이 무얼까를 찾아가는 몸과 마음은 있지만 어디에서도 외부와 나를 향한 증오는 없다. 증오의 기분에서 고요함을 유지하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단식도 마찬가지다. 단식을 하면서 이걸 왜 하지, 왜 이래야 하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등 수 없이 일어나는 나에 대한 공격과 단식을 끝내고 보상하듯 나의 몸을 음식으로 폭격하는 마음이 잦아졌다. 그리고 마음에서 되뇌인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냥 하는 거야. 좋은지 나쁜지 그건 너의 몸이 잘 알고 있으니 하면 돼... 

간디가 본 인도인이 인도를 영국에게 가져다 바친 이유는 2가지다. 영국 제품을 갈망하는 소비의 욕망과 인도인의 서로 증오하는 마음이다. 이를 없애기 위해서 소비를 하는 욕망을 자제해야 하고 증오를 없애는 것이 자치를 위한 초석이다. 

일상에서 나를 화나게 하고 나를 괴롭히는 문제는 매번 만나게 된다. 이러한 증오는 결국 나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식사를 거르거나 술을 마시거나 거침없는 소비를 하거나 이런 것을 스트레스 해소라고 나를 합리화한다. 그런데 정작 기분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는다. 브라마차리아를 겪으면서 기분이 나를 좌우한다는 것을 알았다. 화가 나는 것은 내 마음에 있는 것이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원인 나에게 있으면 그걸 풀수 있는 것도 나에게 있다.  브라마차리아는 결국은 나를 보게 한다. 이 기분이 무엇일까? 이 증오와 화가 왜 나는 거지라고 나에게 물음을 던진다. 

 

병에 몸을 맡기고 단식 그 자제를 목적하듯이 이 물음은 온전히 나를 보게 한다. 내 마음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굶고 병을 앓고의 과정이 수련이 되고 있다. 자치는 바로 이 일상에서 수련이다. 이걸 정신승리와 혼동하지 하지 말라. 정신 승리는 내가 나약하고 피동적으로 만들어 남에게 의지하거나 굴복하게 만들고, 수련은 나를 강하고 능동적으로  만든다. 그건 기분을 보면 알 수 있다. 내 기분이 그 상황에서 쾌활한가 아닌가로 쉽게 알 수 있다.


댓글목록

당신뜻대로님의 댓글

당신뜻대로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

감이당님의 댓글

감이당 작성일

동완샘. 차지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