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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습록 2차시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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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곰실곰실 작성일14-04-08 21:22 조회2,82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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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의 전습록 후기 목성A-1 김연실
 

  양명은 대나무 격물에 실패하면서 자신은 성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심즉리의 단초가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후 권력의 실세였던 환관 유군을 탄핵하는 재상소문을 올리고 장형 40대라는 엄청난 형벌과 소수민족의 근거지인 듣도 보도 못했던 용장이라는 곳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곳 용장은 양명학의 태동지가 된다.
  그렇다면 용장이란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문화와 자연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게다가 언어도 소통할 수 없는 생소한 언어였다. 그들이 말을 하면 새가 지저귀는 것 같았다고 했으니,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된다.
  모든 게 낯선 환경, 자기가 가지고 있던 건 하나도 필요가 없어진 상황. 양명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들,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을 모두 버리게 된다. 여기서 양명은 질문만 남는다. 그리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바로 사유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양명은 어려서부터 성인에 대한 질문을 품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을까? 참 질문도 원대하다.(^^) 이 근본적인 질문은 낯선 용장이라는 곳에서도 유효했다. 만약 성인이라면 여기서 어떻게 살았을까? 매 순간의 생사의 기로에서 느끼는 불안감, 두려움. 깨달음은 정말 도둑처럼 찾아왔다.
  그 때까지 양명의 삶의 철학은 주자학이었다. 주자학에서 말하는 격물은 모든 것이 물()에 있다는 것이다. 물에 모든 이치가 있으니, 물에 나아가서 이치를 탐구해야 한다는 것. 자객의 이치는 자객에게서 찾아야 하고, 독사의 이치는 독사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자의 격물 사상은 생사를 알 수 없이 불안한 양명에게는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자객에게서, 주변에 널린 독사에게서 마음 편할 날이 하루도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양명의 깨달음의 지점이다. 아무리 물에 나아가 물의 이치를 탐구한다고 해도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탐구할수록 불안은 증폭될 뿐이라는 것.
  여기서 양명은 완전히 전제를 뒤집는다. 이치가 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다. 심즉리이다. 양명은 격물을 다시 해석한다. 격물이란 물에 나아가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고, 물과의 관계에서 바름()을 얻는 것이다.
  양명은 여기서 더 나아가 주자의 지행일치를 거부하고, 지행합일을 주장한다. 지행일치라는 말 속에는 지와 행은 다르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지선후행즉 아는 것이 먼저고 행하는 것이 그 뒤를 따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양명의 지행합일은 다르다. 지와 행은 하나다. 어떻게 아는데 행하지 못하며, 행하는데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는가? 앎은 행의 시작이고 행은 앎의 완성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우리의 앎으로부터 추동된다. 담배를 피우는 건 피워도 죽지 않음을 아는 것이고, 할 일을 미루는 건 미루어도 삶의 큰 지장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행하지 않는 건 앎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 일어나지 않아서라고 한다. ‘라는 것은 물과 사건과 세계의 만남의 사건에서 바름을 찾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궁금해졌다. 바름이라는 게 뭔지, 도대체 누가 정하는 건지.
  양명은 49세에 심즉리에서 더 나아가 치양지를 말한다. 양지는 누구에게나 있는데 순도만 다를 뿐이라는 것. 그런데 우리는 순도가 아닌 양으로만 생각하는 게 문제다. 구리나 아연등을 섞어서 양만 늘리면 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자기 양지를 다하면 성인인 것이다. 가진 능력이 90인데 80을 하는 것보다 가진 능력이 60인데 60을 다하는 것이 오히려 성인이라는 것. 그런데 자신의 능력은 자신만이 알 수 있다. 자기 검열을 계속해서 해야 한다.
  해서 양명학에서는 성인이 될 수 없다. 매 순간 치양지를 넘어서야 하므로 하나의 성인으로 계속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완성형인 성인은 없고 매 순간 실천하는 광자만 있다. 치양지는 누구를 따라가는 게 아니다. 나만의 길, 단 하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양명이 마지막 출병 직전에 했던 가르침이 있다. 네 구절짜리 가르침, 사구교.
       무선무악 심지체: 무선무악이 마음의 본체이다.
       유선유악 심지도: 마음이 움직일 때부터 선악이 생긴다.
       지선지악 시양지: 내 양지가 선악을 알게 해준다.
       위선거악 시격물: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게 격물이다.
  양명의 지행합일을 떠올리면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 내가 행동하는 딱 그 만큼만 내가 아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가들의 선두에는 양명학파가 있었다고 한다.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앎이 바로 행동이 된 것이다. 양명학은 실천의 학문이다. ‘치양지를 떠올리면 실천할 수밖에 없어진다.
 
댓글목록

양파님의 댓글

양파 작성일

덕분에 양명학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행동하는 딱 그 만큼만 내가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