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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붓다와의 대화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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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나무 작성일22-05-17 22:55 조회336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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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당 목요 대중지성 신나경
5-12 붓다와의 대화 후기

나는 불교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에고 없이 오로지 맹목적인 깨달음을 향해 가는 것은 의미가 있을까? 에고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한가? 내가 초기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부처님에 대한 최초의 인식은 어떠하였나?
이번 후기를 작성하며 반조해보고자 하는 물음들. 부처님은 불교일까? 곰샘의 물음과 오래 전 참선 법회에 다니던 때에 부처님과 나란히 걷고자 하던 기억이 겹쳤다. 지금만큼 머리가 복잡하지 않던 때. 절에 가면 불상이 모셔져 있으나 자칫 내 안의 불성이 아닌 외부 대상을 찾게 되는 건 아닌지, 모든 것은 내 마음 안에 있다. 존경 받아 마땅한 세존 고따마. 그의 가르침. 내가 대학에 붙길 바라며 새벽기도에 나가시는 부모님의 간절함이 좋진 않았다. 나를 섬으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삼아 정진하는 것. 누구나 깨달을 수 있고, 法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이 좋았고 보이지 않는 보호 아래 있다는 느낌이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 마음을 모으기 위해, 거짓된 자의식을 털어내기 위해 108배를 할 때, 법당에 앉아 고요함을 찾고자 할 때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을 힐끗 보기도 한다. 부처님과 나란히 걷는다는 것은 부처님이 몇 만겁의 생을 거쳐 부처가 되었건 나 역시 똑 같은 존재로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있다는 거다. 그 과정에 있다는 것, 깨달음은 본성이고 싯다르타가 자신의 경험과 판단으로 길을 걷던 것처럼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나 역시 나라는 고유한 존재로서 삶을 경험하고 스스로 길을 찾아나갈 기회를 얻은 것이다.

나는 왜 초기불교를 공부하려고 할까? 무언가를 발견하고 싶은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이라는 한 구절이 맘을 울리던 것처럼 내 본성과 깊이 연결되고자 하는 어떤 강렬하고 멈출 수 없는 욕망인가. 숫타니파타를 읽던 20대의 감수성은 희미하고 그 간 거친 삶에 상처입고 너덜거리는 몸과 마음, 정신을 이끌고 죽기 전까지 살아보고자, 맑고 서늘한 바람 같던 기억 속의 법정 스님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을 지금의 내가 다시 만나보고자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하는 집착적인 행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경전의 핵심이 삶의 핵심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일부가 경전이 될 수 있지만, 꼭 지나가야 하는 관문처럼 여기고 꾸역꾸역 이 길에 발을 들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욕망은 나쁜가?” 인간의 갈애로 인한 괴로움을 이야기하는 사성제. 욕망은 나쁜 것인가? 깨달음을 향한 욕망은. 욕망은 갈애를 깨닫게 해주는 방편이 될 수도 있다. 부처님은 돈을 많이 벌라고 하셨다. 올바른 방법으로 돈을 벌면 된다. 자아에 갇혀서 욕망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이야기가 수업 중에 나왔는데, 그것 또한 과정일 수 있다. 해보지도 않고 위험하니 물가에 가지 말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물에 한 번 빠져서 허우적 대보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으로 아는 것이 진짜 공부가 되었으면 한다. 남에게 해를 입히고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는 선에서 경험이란 것이 진짜 공부였으면 한다. 그래서 계를 지키라고 한다.
‘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계신가요? 자연스러운 계에 대한 인식은 ‘보호’ 였다. 모를 때 강압적으로 억압하며 지켜내야하는 계보다 수행자를 보호하고, 감각기관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 계의 순기능이겠다.
“에고는 꼭 지워야 하는 것인가?” 에고는 우리진리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고 선한 것을 지향하고 건강한 삶을 살게끔 하는 조력자로서 존재할 수 있다.
“자아는 나쁜가? 나의 욕망은 무엇인가?”
자아는 생명력이 될 수도 있다. 탐진치가 삼독이라는 면을 강조하다보면 솟아오르는 생명의 샘을 막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정체성의 위기와 상실을 경험 중이다. 정신증적인 질환 때문일 수 있지만 내가 사라질 것 같은 공포는 에고 때문일까 생각할 때가 있다. 에고는 나쁜거여. 사라져야 혀. 하면서 나를 몰아갈 때 이제는 그게 별로 건강하지 않고 폭력적인 일인 줄 안다. 안전한 수행처에서 붓다의 명상법을 따라 숨을 바라보며 내가 사라지는 것과 현실에서 나를 지켜주는 에고를 없애는 것은 다르니까. 요즘 읽고 있는 아니타 무르자니의 책, 민감한 영혼 엠패스를 위한 안내서 <두려움 없이, 당신 자신이 되세요>를 읽으며 타인과 나의 경계를 찾지 못하는 나를 이해하고 세상에 적응 시켜 보려는 시도 중이다. 이 책에선 에고를 나를 살리는 내 편으로 만들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조언한다. 건강한 에고를 키우라는 것이다. 초기불교. 외길인생은 지루하다…. 담임 선생님께서 니까야를 두고 재미있다 하신 것이 충격이었다. 니까야가 재밌다니? 나를 속이진 않는 구나. 다행이다.
인간들이 살아오며 만들어놓은 관념과 경계 때문에 어지러울 때가 있다. 아직도 세상에 적응을 못하는 어린양이 초기불교를 공부하며 좀 더 평온함에 가까워져 지혜로워지길 바란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는 사랑의 말처럼 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쾌락을 위하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
운전자로서 보행자를 보호할 때, 내게 여유가 생기면 여유를 잃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우리의 지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낼 때 깊고 안정적인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낀다. 건강한 쾌락인 것 같다. 나는 나에게 어떤 폭력을 가하고 있을까도 생각 해본다. 특정 감정이나 생각을 억압하는 것. 모두 나의 책임인양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 셀프 가스라이팅 등등.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삼보에 귀의하지 않으면 내쳐질 것 같은 공포가 있는 거 같다. 요즘 세상에 종교가 어떻게 폐쇄적이 되는가. 안팎은 정말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내가 자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두 다리로 두 발로 이 땅을 딛고서 세상에 태어나 두발로 서서 하늘과 땅을 가리킨 싯다르타처럼. 당당히 살아갈 수 있기를. 그것이 나의 욕망이다. 생명 그 자체!
댓글목록

신미숙님의 댓글

신미숙 작성일

처음 불교를 접하는지라 가볍게 접근하고 있는 저와 다른 도반님의 글을 읽으니 좀 더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안성옥님의 댓글

안성옥 작성일

많은 사유와 정진속에 사시는 군요 나무님의 노력을 응원합니다. 후기 감사합니다.

반야수님의 댓글

반야수 작성일

후기 올려주시니 늘 그렇듯이(?)  재학습효과를 누립니다. 나무님의 바람처럼 당당히 살아갈 수 있기를 같이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