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1학기 5주차 20240317 > 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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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1학기 5주차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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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상준 작성일24-03-19 18:39 조회5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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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당에는 직장을 그만두고 오게 되었다. 아무래도 직장이라는 곳은 '거래'로 이루어지는 노동과 급여의 주고받음의 현장이라고 생각하여 그 가치를 낮게 여기는 생각의 방식이 내 머릿속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사고 구조가 '삭막하다', '냉랭하다', 형식적이다'와 같은 느낌을 직장에 부여했다. 그러한 상을 내 머릿속에 만들고 직장에서 벗어나 감이당에서 공부하면 제대로 된 공부, 의미있는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또 다른 상을 지니게 됐다. 이번 5주차 수업을 들으며 같이 공부하는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에 대해 고찰하며 내 자신을 돌아보니, 그러한 상을 상당히 지니고 있었음을 자각하게 되어 알게된 사실이다. 하나의 상을 또 다른 상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이러한 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내 의식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의 처음 2~3주간은 굉장히 힘들었었다. 처음엔 왜 힘들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됐다. 왜냐하면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들을 집에서 자율적으로 하면서 굉장히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일요일에 감이당에서 공부를 하고 집으로 갈 때는 단순히 힘들어서 녹초가 된 것을 넘어, 마음이 지극히 혼란스럽고 괴롭다는 느낌에 다음날인 월요일까지 타격을 받았다. 이를 그저 '배우는 과정은 원래 힘든 법이야'라는 식으로 마음속 감정을 죽이고 넘어가기엔 상당한 꺼림칙함이 있었다. 대체 왜 나는 즐거운 공부를 하는 곳에서 즐거움이 아닌 고통을 지니고 돌아가는가?

 

 

이러힌 의문을 풀기 위한 친구들과의 대화, 더 지속된 감이당에서의 공부, 그리고 나름의 고찰을 통해 판단한 해답은 - 내가 또 다른 ''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직장과 사회라는 상과 감이당이라는 공부 공동체의 상을 지니고 전자의 상이 후자의 상보다 못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후자의 상이 더 긍정적이고 밝은 미래를 함축하고 있다고 내리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상이 어떠한 상보다 좋고 나쁘다라는 분별은 어떠한 가치 척도에 기반하는가?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자신의 습성에 기반할 것이다.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그 무엇인가가 아니다.

 

 

금강경 발제를 맡은 한 도반께서는 법륜스님이 쓰신 흥부, 놀부, 그리고 제비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시며 베푸는 것으로 다 끝난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즉 베풂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지, 거기에 무슨 상을 부여하여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욕심을 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른 도반께서는 아파트 단지 청소일을 하시며 겪었던 에피소드를 언급하셨다. 처음에 자신이 좋아서 옆의 분의 일을 도와주셨는데, 딱히 감사하다는 표현도 안하고 무심한 그의 행동을 보고는 화가 올라오는 감정을 느끼셨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옳고그름에 대한 판단과 아상이 작용하여 화가 비롯된다는 설명도 하셨다.

 

 

이렇게 본디 자연스러운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특정한 상을 짓고 그 상에 부합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져, 세상을 재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상에 부합하지 않으면 괴로워한다. 그러한 습성에 대한 경계를 도반들로부터 들으면서 나 또한 어떠한 습성으로 인해 괴로움이 올라오는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심지어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께서 설한 바 법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곧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당신께서 설하신 법조차 없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하는 자신의 행동에 특정한 상을 부여하며 실체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존 직장에 대한 판단을 달리하게 된다. 직장에서 생활을 하며 그곳에서 내가 가졌던 상과 실제 모습의 격차를 받아들이기 싫어서 괴로움을 많이 지녔던 것 같다. 으레 그렇게 흘러가는 모습들은 애초에 잘못된 것이 없는 법인데, 나는 이래서 잘못됐고 저래서 잘못됐다고 느끼고 괴로워했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다. 문제가 있는 것은 그것을 문제가 있다고 여기려는 내 마음뿐이었다. 그러한 괴로움 때문에 감이당으로 오게 된 듯하고, 감이당에서도 감이당에 대한 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상에 현실은 또한 부합하지 않았다.

 

 

종교적 색채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상당히 불교-친화적인 종교적 느낌이 있다고 다가왔고 나라는 사람을 청년이고 여기서 열심히 공부하러 온 사람이라는 인식도 있다고 여겨진다. 감이당이라는 곳이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라면 나이가 많든 적든, 남자든 여자든, 과거에 무슨 일을 했든, 재산이 얼마든 뭐든 간에 사람을 구분짓고 분별하는 게 아닌, 그저 그 사람 그대로의 인격체로 온전히 존중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상을 또한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이번 금강경에 대한 도반들과의 공부를 통해 이러한 내 마음 속 상의 존재를 실감하게 됐다. 그런 상이 있었음을 느끼니 마음이 편해진다. 알아차리게 된다.

 

 

과학 시간에서는 근영 선생님을 통해 상호작용(관계)’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주체와 객체라는 Entity(독립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상호작용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카를로 로벨리의 <나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주된 요지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알아차린다는 것도 상호작용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괴로움이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면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든 말든 존재하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게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아차림으로써 그것과의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그 실체성이라는 착각은 흐려진다.

 

 

더더구나 놀라운 건 정보에 대한 카를로 로벨리의 설명이다. 한 물리적 대상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정보의 (최대) 양은 유한하다. 대상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우리는 항상 새로운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정렬의 방식은 안 바뀌더라도, 끊임없는 재정렬이 가능하다. 즉 세계는 이러한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매일매일 새로 거듭나야함을 느낀다.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와 동일하여 그렇게 시간 관념에 따라 쌓은 지식이나 노력이 축적됐다고 생각하고, ‘과거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으니까그리고 이 만큼의 축적을 하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내가 더 많이 축적하여 뛰어나니까와 같은 상식에 기반한다고 생각했던 사고방식들이 양자역학에 의하면 산산히 조각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나는 새로운 나이다. 그러기에 새롭게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아이와 같은 경탄으로 말이다. 어제 이미 본 세상이니까 지겹다고 느끼는 건 양자역학에 따르면 정신적 기만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고립된 시스템에서의 엔트로피(무질서도)는 감소할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증가한다. 열이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이동하면, 고립된 시스템에서의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그래서 낮은 온도에서 높은 온도로 열을 이동시키려면 추가적인 외부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방을 청소하는 것과 같다. 방은 깨끗하고 질서 잡힌 상태에서 더럽고 어질러지는 상태로 자꾸만 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력을 투여하여 방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일이다. 생명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데 우리는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죽음이 자연스러우니 마땅히 받아들이라는 명제를 만드는 게 자연스러운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려는, 부지불식간의 노력을 하고 있구나라는 걸 알아차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까 싶다.

 

 

과학을 통해 세상에 대한 놀라운 식견을 배울 수 있게 되는 건 참 근사한 일인 듯하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통해 배운 부처님의 가르침에 강력한 실증적 근거를 부여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또한 이리도 위대한 과학자들에게 그래서 어떻게 해야할까요?”라고 질문하며 삶에 대한 의미와 방향성을 묻고 싶은 마음도 때때로 든다. 부처님은 돌아가셨지만 과학자들은 현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은 어찌보면 삭막하다. 그냥 그저 그럴 뿐이라는 대답밖에 해줄 수 없는 듯하다. “Questions of science, science and progress(과학이 이야기하는 질문들과 발전들은) / Do not speak as loud as my heart(제 마음을 대변해줄 수 없는데 말이죠).”라는 Coldplay - Scientist 곡의 가사가 떠오르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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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강은설님의 댓글

강은설 작성일

저는 양자역학을 공부하면서 물리학자들이 왜 물리학에 매료되는지를 알게 된 것 같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는 경이로움에 매료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교랑 연결되는 지점도 재미있었고 뭔가 실체가 있다는 저의 생각을 깨주어 머리가 가벼워진 느낌도 들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