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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일요대중지성] 짧았던 정념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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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2-07-21 17:58 조회4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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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았던 정념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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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운 섭(감이당)

정념이라는 불꽃놀이

첫 문장에서 물질과 정신, 외부세계의 실재성이나 관념성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다던 베르그손의 약속은 (제1장 안에서는) 대체로 지켜졌다. 나의 신체를 바탕으로 순수 지각을 설명하는 부분이 익숙하지 않은 개념들 때문에 곤혹스러웠지만 어렵사리 따라갈 수는 있었던 것이다. 책 속에 깔아둔 인간 조건, 즉 <지금, 여기 나의 신체가 있고, 바깥의 우주에는 물질이 가득 차 있다. 신체와 물질은 자극을 주고받는다. 나는 신경계가 매우 발달한 고등 척추동물로서 행동하는 물체이다>라는 전제가 우려하였던 기독교 신학이 아니라 생물학에 기반한 덕분이라고 본다. 이어진 정념 부분은 제1장에서 가장 쉽게 이해되었던 곳이다.

감각적 요소는 작업의 분할로 인해 자신의 운명이 된 상대적 부동성을 보존한다. … 모든 고통은 노력으로 이루어지며, 더욱이 무익한 노력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모든 고통은 국부적 노력이며, 바로 이 노력의 고립 자체가 그것의 무능력의 원인이다. (『물질과 기억』 100쪽)

현존하는 이미지의 부분적 인식이 표상이라고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전체 유기체와 부분적 감각 요소의 괴리를 찾아 고통을 위치시킨 것은 귀신같은 발상이다. 깜찍하면서도 참으로 명료하였다. 이어서 정념을 우리 의식의 주관적 요소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자극을 거부하는’ 고통과 밖으로부터의 작용에 ‘투쟁’하는 정념이라는 묘사는 용감한 게릴라 전사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마침내 ‘정념은 지각을 만들어내는 첫 번째 질료가 아니다. 정념은 오히려 지각에 섞이는 불순물일 뿐이다’(104쪽)라는 표현에서 ‘불순물’이라는 단어의, 내 생애 가장 긍정적 용례를 찾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정념의 시간은 너무 짧았다. 부지런히 형광펜을 움직이던 나의 손길이 멈추었다. 나의 신체에 폭포수처럼 또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쏟아지던 정념의 이미지가 갑자기 사라지고 책 끝까지 어디서도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물론 뒷부분에서도 ‘나의 현재’에 대한 개념 정의나 기억이 현재의 지각으로 환생하는 순간에 관한 서술에서 보듯이 치밀한 구성과 수사적 현란함의 극치를 만나서 감탄할 수밖에 없는 사례들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이 모두는 오직 기억의 독무대였을 뿐이었다. 

짧았던 정념의 이유

왜 이렇게 빨리 정념은 사라졌는가? 에세이를 쓰기 위해 전체를 조감하다 보니 정념은 베르그손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추측하게 되었다. 그는 신체의 지각 작용만으로 물질의 실재성과 정신의 실재성을 일관되게 설명하려는 목적에 따라 순수 지각과 기억이 맡을 역할의 정교한 배치를 핵심과제로 삼았다. 그 결과 물질이 주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가능적 행동을 선택하는 중심인 신체의 의식적 지각과 아울러, 물질의 순간들을 응축한 기억이 현재의 지각에 되살아나 미래를 결정하게 되는 정신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대신 정념이란 이를테면 흑백으로 된 의식적 지각에 주관적 요소를 치장하기 위해 그냥 색깔을 입히는 정도의 역할이면 충분하였나 보다. 그 방법으로 고통이라는 전형적인 정념 하나를 골라 인상적으로 설명하고 난 뒤, 정념 일반이란 외부자극이 나의 신체에 닿아서 나의 내부에서 느끼는 인식이라고 하고서는 설명 끝. 정념이 신체의 지각 자체에서 나오기만 하면 주어진 배역은 완결되는 것이니, 정념의 자세한 내용이 낄 자리는 애초부터 아주 좁았던 셈이다. 

그런데 왜 나는 정념 부분이 가장 아쉬운가 생각해 보면 나의 관심사가 다른 데 있기 때문인 듯하다. 120년 전 그의 관심사는 이제 보편적 상식이 되어 내게는 그냥 통과해버리는 이미지일 뿐이다. 베르그손 이후 과학적 세계가 훨씬 뚜렷해졌지만 그가 지각이나 기억의 역할을 설명한 것과 그다지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반면 사람은 자원이나 자본의 하나로 다루어지면서 감정도 각자가 상황이나 입장에 따라 가지는 부수적이고 주변적 특질로 그 중요성이 축소되는 듯하다. 따라서 지금 이 책을 읽는 나의 관심은 현재 세계에서 정념의 기반과 위상이 더욱 분명해지고 굳건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정념에 대한 베르그손의 짧은 설명이 곳곳에서 반증에 부딪히지 않을까 불안하다.

그 대신 정념이란 이를테면 흑백으로 된 의식적 지각에 주관적 요소를 치장하기 위해 그냥 색깔을 입히는 정도의 역할이면 충분하였나 보다.

내가 궁금한 정념의 내용

책 속에서는 affection의 번역어인 정념을 내 신체 내부에서 감정과 감각의 형태로 일어나는 모든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라고 한다(36쪽 역주1). 솔직히 이 정념이 통상의 감정, 이를테면 동아시아에서의 칠정(희노애락애오욕)과 같은 걸 포함하는지조차 헷갈린다. 

어쨌든 문외한에게는 교묘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너무나 짧았으므로 생략하고 넘어간 정념에 대해 좀 더 풍부한 설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다. 예를 들어보자. 책에서는 고통 이외의 다른 정념들도 고통과 마찬가지로 부분과 전체의 괴리에서 나온다는 건가?(아니다.) 내가 뱀을 보고 느끼는 원초적인 두려움은 고통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되나?(아니다.) 전율은 보통 온몸으로 짜릿하게 느껴진다고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내 신체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느끼는 정념이라고 하면 틀린 것인가?(틀리지 않다.) 무익한 국부적 노력이라는 고통의 기원에서 사회 내 소수자의 비애를 떠올린다면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그런 것 같다.) 더 나가면 정념은 주관성의 요소라고 하는데, 의식적 지각도 사실은 주관성의 원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아닐 것 같다.) 정념과 기억이 주관적 요소의 2가지 원천이라면 양자 간에 주관적 요소로서의 특질 상 차이는 없는가?(있을 것 같다.) 책에서 내세운 이 정도의 개념 구성만으로 인간과 다른 생명체 간에 정도의 차이만 있다는 사고방식을 확립한 획기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가?(찬반이 다 가능한 것 같다.) 이런 궁금증들이 책 속에, 강독 중에 해결된 건데 나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각으로부터 정념과 기억을 다 설명하려는 베르그손의 원대한 포부 속에 방치된 부분, 또는 지각이란 신체에 유용한 행동하고만 관계된다는 강한 가정이 만들어낸 빈틈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불순물(=정념)’이 제거해야 할 요소가 아니라 개체의 본성의 차이를 낳는 출발점이라면 이를 훨씬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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