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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금성] 공자님은 왜, 주역에 날개를 달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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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희씨 작성일19-07-19 20:03 조회2,0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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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은 왜, 주역(周易)에 ‘날개’를 달았을까

오창희(금요 감이당대중지성)


『주역』을 공부하면서 가장 뜻밖이었던 것은 공자님이 점서인 주역을 공부하셨고, 거기다가 열 편의 해설까지 붙이셨다는 사실이다. 이름하여 십익(十翼). 그 중 하나인 「계사전」을 읽으면서 또 한 번 놀랐다. 『논어』의 공자님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본 때문이다. 『논어』의 공자님이 솔직하고 친근하며 제자들과 시시콜콜한 인간사에 대해 토론하기를 즐겨하는 분이라면, 「계사전」의 공자님은 도가들이 말했을 법한 음양을 이야기하고 자연의 이치와 우주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너무도 스케일이 큰 분이셨다. 그러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주역』은 도대체 어떤 책이며, 공자님은 여기에 왜 이렇게 많은 날개를 달아놓으셨을까. 그리고 점서인 『주역』이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살아남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까지 날아왔을까 등등. 


세 분 성인의 마음 
 
주나라 역(易)인 『주역(周易)』은 크게 몸체인 역경(易經)과 이를 해설한 역전(易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경의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공통으로 언급되는 분은 셋이다. 전설 속의 인물인 복희씨, 후에 문왕으로 추존된 서백 창(西伯 昌)과 그의 아들 주공 단이다. 복희씨가 8괘를, 문왕이 64괘와 괘사를, 주공이 효사를 썼다고 전해진다. 역전은 공자나 공자의 사상을 배제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는 뜻에서 그 저자가 공자라는 게 통설이다. 

복희씨는 중국 고대 전설상의 임금인 삼황(三皇) 중 한 사람이며 중국 최초의 황제라고 전해진다. 복희씨가 황제로 있을 때 어떻게 하면 천하를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그러던 어느 날, 황하에서 머리는 용의 모습을 하고 몸은 말의 모습을 한 신비로운 용마가 나왔다. 그 등에는 쉰다섯 개의 점이 무늬를 이루고 있었는데 복희씨가 그 무늬를 바탕으로 천지가 창조되고 만물이 생성된 원리와 이치를 탐구하였고, 그것을 여덟 종류의 간단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부호로 나타낸 것이 팔괘다. 이것이 주역의 시작이다. 복희씨는 용마에게서 얻은 자연지(自然智)를 바탕으로 문명을 일구기 시작했다. 
  
창(昌)은 은나라 말기인 기원전 12세기-11세기 사람이다. 은나라는 고대사회가 흔히 그렇듯이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로, 제의[禮]가 통치의 중심이었다. 하늘의 신인 제(帝), 자연신, 조상신을 함께 섬겼고 그들에게 모든 문제를 물어서 결정했다. 이런 물음과 응답 그리고 그것의 해석을 갑골문으로 기록하여 통치의 중요한 자료로 사용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와 자연신보다는 살았을 때 자신들을 위해 일한 조상신을 섬기는 걸 더 중요하게 여겼고, 조상들이 자신들에게 유익한 행위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의는 점차 더 촘촘하게 조직되었고 호화로워졌다. 왕이나 제후가 죽으면 보석이나 물건들을 아낌없이 묻었고 적게는 수십에서 수백 명을 함께 묻는 풍습이 있었다. 당시 백성들은 인간이 아니라, 오로지 지배층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조상신의 보호를 받는 대상에 백성은 없었다. 
  
그런 시대에 창은 은나라의 서쪽 변방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임명되었다. 그 이름 앞에 서백(西伯)이 붙는 이유다. 창은 선조들의 선업을 본받아 노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자를 우대하며,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백성들을 돌보았다. 그 소문을 듣고 은나라의 폭군 주(紂)를 피해 창에게 귀의한 제후가 40에 달했다고 한다. 이를 경계한 주가 창을 유리옥에 가두고, 창이 소문처럼 성인이 맞는지 시험하겠다며 그의 아들을 삶아 그 국을 먹게 했다. 아들을 삶은 국을 앞에 두고, 창은 자신이 죽으면 천하의 도가 끊어질 것을 우려하였고, 결국 아들의 살점을 먹으면서도, 폭군을 물리치고 천하를 다시 안정시킬 방도를 고민했다. 그 간절한 마음으로 7년간의 감옥 생활을 견뎠으며, 그 안에서 복희 팔괘를 중첩시켜 64괘를 그려 인생사 모든 국면을 담았다. 그리고 각 괘마다 ‘사(辭)’를 달아, 처음 복희씨가 팔괘에 담았던 천지자연의 지혜를 준칙으로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을 안내하고자 했다. 옥에서 풀려난 뒤 그를 따르는 제후들이 그에게 ‘천명을 받은 인군[受命之君]’이라 칭송하며 주를 칠 것을 종용했으나, 그는 아직 천명이 자신에게 내리지 않았다며 끝까지 신하의 예를 지킴으로써 스스로도 그 길을 따랐다.

주공 단은 문왕의 둘째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나라를 치고 주나라를 세운 뒤, 즉위 2년 만에 죽고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왕이다. 세상 사람 모두 주공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서경』에 실린 연설문-동쪽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면서 했던-에서 주공은 '은왕조 말년에 더욱 비참해진 백성들은 괴로워하며 하늘에 호소했고, 하늘은 온 땅의 백성을 보고 몹시 슬퍼서 은나라의 통치자에게서 천명을 빼앗아 더 자격을 갖춘 주 왕조에게 주었다. 왕은 백성이 길을 잃고 그른 일을 하더라도 가혹한 엄벌로 다스리지 말아야 한다. 왕이 자신의 덕을 겸손하게 돌본다면 백성들은 왕을 본받을 것이며, 이로써 왕은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성왕이 잊지 말 것을 당부한다. 주공은 그런 마음으로 주 왕실을 중심으로 각 제후국들이 각자의 위치와 힘에 맞는 역할들을 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규칙을 만들었고, 이에 따라 천하가 다스려질 수 있도록 했다. 심지어는 전쟁조차도 이러한 예(禮)에 따라 수행되었다. 그 뒤 조카인 성왕이 성인이 되자 섭정에서 물러나 봉토인 노나라로 돌아감으로써 스스로 천명을 받드는 모범이 된다. 주공은 이런 사심 없는 마음, 예(禮)가 바로 서서 천하가 태평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아버지 문왕이 만든 64괘에 각각 효사를 달았다. 이렇게 하여 인간사 중대한 갈림길에서 ‘역’에 그 나아갈 바를 묻는 사람들이 우주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점서인 「역경」이 완성되었다.
 

'그 마음’이 통하다  

공자는 주공의 시대로부터 오백여 년 뒤인 기원전 551년,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주 왕실이 그 권위를 거의 잃고 중국 천하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기 시작한 춘추시대 말기였다. 그나마 명목상으로 유지해 오던 주 왕실마저 힘을 잃고 새로운 질서는 나타나지 않아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주나라 예의 전통이 강한 노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어려서부터 문왕과 주공을 흠모하였으며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갈수록 천하는 혼란스러워졌고, 버림받은 백성들은 더욱 살기가 힘들었으며,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80이 넘은 노인들조차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에게 예의를 되살려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공자가 그 전범으로 찾은 것이 주공 시절의 주나라였다. 문왕과 주공의 마음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면 거기에는 각각의 역할이 있을 뿐 위계나 지배나 예속이 없는, 백성들이 편안한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 믿었다. 
  
공자는 오십이 넘어서 자신이 꿈꾸는 예를 펼칠 수 있는 나라를 찾아다녔다. 제자들과 함께 광(匡)땅을 지나던 공자는, 양호(한때 노나라를 주무르던 강패 정치인)로 오인 받아 닷새를 민병대에 포위된 채 죽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사색이 된 제자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묻자 공자는, “문왕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나 그 문(文)이 여기 있지 않은가? 하늘이 없애려 하셨다면 그것이 어찌 지금처럼 이렇게 남아 있겠는가? 하늘이 원치 않거늘 광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는가!”하고 확신에 차서 외쳤다. 그 문은 주례(周禮)에 있었으며, 예란 하늘과 땅을 관찰하고 거기서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변화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그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 바로 역(易)이었다.  
  
오백 년을 이어서 공자께 두 분 성현의 ‘그 마음’이 통했다. 공자는 죽간의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역경을 읽었으며, 모든 사람이 역의 가르침대로 천지자연을 본받아 삶의 윤리를 삼고, 그것을 온전히 실천함으로써 모두가 군자가 되는 세상을 꿈꾸면서 열 개의 날개를 달았다. 그 중 하나인 「계사전」은 역경을 점서에서 철학서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계사전을 통해, 역에 담겨 있는 우주의 탄생과 만물의 생성 원리를 설명하고, 동시에 효 하나하나를 분석하면서 아주 구체적인 일상의 국면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를 밝힘으로써 우주 자연의 이치에서 인간의 길을 도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이치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공자가 오십에 깨달았다는 천명이며, 문왕이 유리옥에서 아들의 고깃국을 먹으면서 64괘와 괘사에 담아내던 천명이었고, 주공이 조카를 도와 주나라를 정립하며 효사에 담아낸 천명이었다. 이렇게 성인들의 '그 마음'이 서로 통하여 『주역』이 탄생했다. 


『주역』은 날개를 달고

그로부터 『주역』은 모든 지식인들의 필수 텍스트가 되었고, 『주역』을 해석하면서 자신들의 사상들을 정립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주역은 중국의 전통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천문, 지리, 악률, 병법, 운학(韻學), 의학, 산술, 연단술 등. 이렇듯 역학이 중국 문화의 베이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역이 상, 수, 의리라는 서로 다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과 그 전제가 자연의 이치와 인간 삶의 이치가 같다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시대를 거쳐 20세기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성리학도 주역을 바탕으로 한 학문이다. 송대에 들어와 위진남북조와 당나라를 거치며 불교와 도교의 위세에 눌려 있던 유학자들이 유교를 부활시키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이 과정에서 유불도 삼교를 유교 중심으로 통합한 신유교 철학이 성립되었다. 그때 핵심 텍스트가 주역이었다. 북송 시대, 주돈이를 중심으로 주역의 상(象)을 중시하는 학파와 소강절을 중심으로 수(數)를 중시하는 학파, 그리고 호원과 정이를 중심으로 의리(義理)를 중시하는 학파가 서로 경쟁하였다. 남송의 주희는 이런 흐름 위에서 정이의 의리역학을 골간으로 삼되 상수학을 비롯한 여러 역학가들의 관점을 흡수하면서 유학을 형이상학의 절정에 올려놓았다. 주희는 이때 주역이 본래 “복서의 책”임을 환기시키면서, 우주론에서부터 인간사 윤리적인 측면까지를 포괄하는 주역 본래의 모습을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문제는 성리학이 조선에 들어와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20세기 내내 우리는 우주론이 사라진 유학을 배웠다는 것이다. 공자와 주역이 이렇게 깊은 관계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공자님이 말씀하시는 그 윤리는 곧 우주자연의 원리와 이치에서 본받은 것이기에 우주론이 없는 윤리는 반쪽짜리 윤리에 불과하다. 뿌리가 없는 메마른 윤리를 경직되게 받아들임으로써 급기야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제 다시, 중국 사상의 절정이며 원천인 『주역』이 날개를 달고 많은 사람들에게 날아가길,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자기 삶을 완성하여 군자가 되기를 바랐던, 공자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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