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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화성] 공부, 인정욕망 내려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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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수천수 작성일19-04-30 19:53 조회2,6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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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인정 욕망 내려놓기



                                               

                                                                         정지원

 

활보로 자립하고 공감하다!


나는 늦은 나이에 대학을 갔다. 전공은 차()문화학과. 공부를 해 보니 흥미도 있었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공부하고 싶어서 편입을 하려던 차에, 얽히고설킨 일들로 문제가 생겨서 그만 못 가게 되었다. 하지만 1년 후에는 갈 수 있었다. 이 이유로 1년의 시간이 주어졌고 그때 마침 감이당 생각이 나서 짐을 싸들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막연히 나중에 나의 직업에 고전 공부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감이당 공부를 도움 삼아 편입을 하고, 대학원을 가서 차()선생이 되고, 다도(茶道)를 가르치면 멋있어 보일 것 같았다.


여기 오기 전에는 찻집을 해서 경제를 꾸려갔다. 얼마간은 옛 남친에게 경제적 의존도 했었다. 그런데 감이당 공부를 시작하면서 남친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 시작한 일이 장애인 활동 보조 일이다.


장애인 활동 보조 일이란, 장애인의 집으로 직접 가서 가사와 신체, 사회적 활동을 돌보는 일이다. 처음엔 생활비도 빠듯할 정도의 수입이었다. 그러다 차츰 일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저축도 하게 되었고 학비와 책값, 생활비의 전반을 해결하게 되었다. 나로선 정서적 의존에서 벗어나서 완전 자립을 한 것이다. 그야 말로 돈이 있어야 자립하는 게 아니라고, 자립을 할 때 경제활동이 시작된다는 것.”(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53~54, 저자, 고미숙, 프런티어)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의 이용자 그녀는 뇌병변장애인이다. 뇌병변장애가 있으면 뇌의 손상으로 신경근육이 마비되고 틀어져서 손발을 쓰는 것도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원활하지 않게 된다. 해서, 밥을 먹고 씻고 외출하는 일을 내가 돕는다. 그녀는 집에만 있는 게 아니고 야학도 다니고 직업도 있고, 아르바이트도 하며 일상을 바쁘게 보낸다. 그래서 나도 엄청 바쁘게 돌아다닌다. 그녀는 장애인들이 시설 밖으로 나와서 활동하도록 돕는 멘토 역할을 한다. 그녀의 소통 방법은 핸드폰. 떨리는 손가락으로 핸드폰에 문자를 써서 상대 장애인에게 소리로 들려준다. 그러면 상대 장애인은 그 소리를 듣고 휠체어 발판에 로 글을 써서 의사를 표현한다. 이때 나의 업무는 이들이 주고받는 의사 표현에 집중해서 서로가 이해하도록 의사를 전달하는 일이다. 전달이 안 될 땐 여러 번 묻는다. 이것을 글로 받아 적어서 전달할 때면, 내가 배운 글쓰기가 이렇게도 쓰이는구나 싶은 생각에 흐뭇하기도 했다.


한날은 그녀가 시무룩해 있었다. 밥도 잘 못 먹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이냐고 하니까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는 앞으로 있을 상견례 때 시댁 식구를 만날 일이 걱정이라고 했다. 그녀는 올 5월에 결혼을 한다. 결혼 전에 시댁 식구들을 한 번 만나야 하는데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한 달은 더 남았는데 아직 오지 않은 일에 쫄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상견례 진행 상황을 물어보고 메모한 후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해 주었다. “다른 절차는 다 준비 됐으니 그날은 인사드리고 밥만 맛있게 먹고 오면 된다. 그러자 고민이 풀렸는지 그녀의 얼굴에 바로 화색이 돌았다.



사람을 사귀는 데는 서로 알아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즐겁기로는 서로 공감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지.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90, 고미숙, 프런티어




도반이 더 좋아!


이처럼 활보 일은 나에게 경제적 자립을 넘어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고 상대와 공감하는 일의 기쁨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때론 예기치 못하게 노총각의 고백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장애인 관련 센터인 ○○ 야학에 가서 여러 가지 수업을 듣는다. 그녀가 수업에 들어가고 끝나는 시간까지 나에겐 귀한 시간이 주어진다. 이 시간에 나는 책을 읽거나 낭송을 준비한다. 그런데 나의 금쪽같은 시간을 뺏고 요런 저런 말을 붙이면서 수작을 걸어오는 50대 후반의 노총각이 있었다. 그는 더 늦기 전에 결혼이라도 해볼 작정인지 나에게 데이트 신청하기를 여러 번. 그때마다 나는 그럴 시간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왜 만날 시간 없다고 핑계를 대냐는 거다. !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 그는 나한테 직접 하는 작업이 안 먹히니까 다른 야학에서 수업을 가르치는 여선생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 여선생이 내게 와서 그 사람 좋은 사람이라며 한 번 만나보라는 거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옛날의 나였다면 노총각에게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 생각하니 당시 나는 외로울 짬이 없었다. 나에겐 함께 공부하고 무궁한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가 있고, 매일 함께 밥을 먹고, 서로의 기운을 주고받는 도반들이 있었다. 이런 일상이 있었기에 외롭지 않았고 노총각의 유혹을 갈망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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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알아주면 뭐해!


물론 나는 공부가 참 어렵다. 특히 남들의 평가를 의식하는 마음,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이 컸다. 또한 시간에 쫓겨서 일을 처리하듯이 공부를 했다. 그러다보니 내 앞에 있는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인정욕망에 시달리고 남들만큼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다 보니 몸이 바로 무거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2017년 나는 청년 백수 두 사람과 감이당 산책로 가는 길 언덕 위 하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여름에는 유난히 모기가 많이 들어와서 잠을 설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전자 모기채로 모기를 잡았다. 윤하는 죽은 모기가 피를 빨아먹는 것도 아닌데 모기 시체를 싫어했고, 석영은 전자 모기채에서 나오는 붉은 빛을 무서워했다. 나는 위잉~위잉~ 하며 소리를 내며 잠을 깨우는 모기가 싫었다. 침전문가도 아닌데 아무데나 쏘는 침도 맞고 싶지 않았다. 해서 나는 밤마다 홀로 모기를 잡아야 했다.


8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천장을 올려다보니 모기들이 곳곳에 별처럼 박혀 있었다. 모기 채를 들고 책상위에 올라가 그동안 잠 못 들게 했던 요 모기를 향해 분노의 눈을 부릅뜬 채 팔을 올리는 순간 한쪽으로 힘이 쏠려 책상이 확 뒤집어졌다. 그 탓에 허리가 책상에 부딪쳐서 숨이 꼴~! 넘어가는 것 같았고, 동시에 ! 이렇게 사람이 순식간에 죽을 수도 있겠구나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죽으면 안 돼. 아직 더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 라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도 이 반응에 깜짝 놀랐다. 나에게 공부가 그렇게 간절했었나 싶었기 때문이다. 죽을 것 같은 그 순간에 왜 공부가 떠올랐을까? 지금으로부터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4년 전에 나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와서 49제를 지내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의 사정을 안 장금샘이 “49제를 지내는 동안 아버지를 위해 티벳사자의 서라는 낭송 집을 읽어드리면 좋겠다고 했다. “자식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면서.


이 책은 죽음을 여행하는 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함께하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안내서이다. 그 책에서는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 설명을 보여준다. 죽음 후 낮선 환경에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제 갈 길을 가야한다. 이 과정에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존재들이 있다. 해탈을 상징하는 흰빛을 따라 가야한다. 속세의 환상, 미혹을 벗어나기 위해서다. 그런데 망자가 생전에 어떤 잘못된 습관들, 즉 질투, 무지, 불안, 집착, 소리 등에 이끌려 가면 길을 잃고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그 과정의 길을 통과하지 못하고 헤매게 된다. 이것을 막기 위해 망자에게 이 책을 읽어 주는 것이다.


나는 아침마다 연구실에 나와 아버지께 낭송 집을 읽어드렸다.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들을까 궁금했는데, 이때는 육체가 몸 바깥으로 나온 상태라 더 잘 들린다고 했다. 가족이나 스승, 친분이 있었던 사람이 읽어주면 더 잘 들린다고 해서 참 열심히 읽었다. 그때 나는 오직 아버지가 딸의 말을 잘 들어주길 바랐고 이 말을 길 삼아 그 길을 잘 통과하기만을 바랐다.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티벳사자의 서를 낭송하는 동안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생전의 습관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후세계와 내세로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생전의 습관은 그곳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그렇다면 지금을 잘 살아야 한다. 지금의 삶을 위한 공부가 결국 죽음을 위한 공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감이당에서 하고 있는 공부가 바로 그 공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것이 공부라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을 따라갈 게 아니라 흰빛을 따라가야 하는데. 남이 알아주면 뭐해! 그냥 오늘 하루를 집중해서 사는 게 중요할 뿐이다.

 


태어나는 것도 그 어느 오늘이고, 죽는 것도 그 어느 오늘이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사느냐가 인생 전체를 가늠하는 지렛대다. 같은 책,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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