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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동물병원에 갑니다] n개의 사랑, n개의 건강(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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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11-28 04:58 조회5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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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개의 사랑, n개의 건강(上)

2편. 심약한 동거-인간(上)

박소담(남산강학원)

동거-인간의 사랑, 병을 만들다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있다. 옛날엔 자기 팔자가 너무 사나울 때 차라리 개 팔자가 낫겠다며 한탄하는 말로 자주 쓰였다고 한다. 그땐 어지간히 나쁜 팔자가 아니라면 그래도 개보단 사람 팔자가 낫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물론 이 말은 지금에도 많이 쓰인다. 옛날과는 사뭇 다른 의미로. 꼭 동물을 키우지 않는 사람이라도 요새 개 팔자가 어떤지는 한번쯤 들어봤을 거다. 유기농 식재료로 만든 반려동물 사료(거의 식사다)부터 해서 강아지 유치원(심지어 학년제다), 반려동물 전용 생일 케이크(수제다), 명품 브랜드에서 만든 개 옷(강아지는 프X다를 입는다) 등등등등등…. 이쯤 되면 다음 생엔 누구네 집 개,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이 왜 나오는지 알겠다. 딱히 내가 못살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나보다 훨씬 잘 살아서다. 그렇다. 지금에 와서 개 팔자는 ‘진짜’ 상팔자가 되어버렸다!

내가 동물을 키우지 않아서 그런가. 처음 상팔자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사람도 아니고 개, 고양이들한테 저런 지극정성이라니. 사치도 저런 사치가 없다 싶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면서 보호자들을 직접 만나다 보니 그들의 지극정성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보호자에게 자신의 동물은 진정한 가족과도 같다. 내가 가족을 잘 챙기고 싶고, 가족이 아프면 마음이 불편한 것처럼 보호자들 역시 자신의 반려동물에 대해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에게 온갖 지극정성을 하는 엄마들도 넘치는데 또 다른 가족인 동물들에게 그러지 못할 건 또 뭔가. 보호자는 부모의 마음으로 동물이란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일 텐데 말이다. 비록 그들은 때로 극성인 엄마들이긴 했다. 그래도 내가 가족을 아끼는 마음과 같이 보호자들도 반려동물들을 소중히 대하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런 줄 알았다.

hayffield-l-ZVdZw2p08y4-unsplash그렇다. 지금에 와서 개 팔자는 ‘진짜’ 상팔자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왜일까? 나는 그렇게 지극정성인 보호자들을 보면서도 그들이 진정으로 반려동물을 위하고 있는 것인지 늘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보호자가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대한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할 장면들을 계속해서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하루는 간식을 많이 먹고 배탈이 나서 찾아온 반려동물이 있었다. 이런 경우 약도 약이지만 회복될 때까지 간식은 피하는 게 좋아 보호자에게도 당분간 간식을 주지 말라고 당부를 했더랬다. 그런데 웬일. 보호자는 또 똑같이 간식을 먹고 배탈이 난 동물과 함께 병원을 다시 찾아왔다. 아니…, 그때 분명 간식은 주지 말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이에 보호자가 답하길, 아이가 자길 너무 간절하게 쳐다보아 간식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단다. 놀랍게도 내가 수의사로서 간식을 먹어서 애가 아픈 거라고 몇 번을 말해도 똑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 나중엔 심지어 간식 먹는 게 얘 삶의 낙인데 어떻게 간식을 안 줄 수 있냐며 도리어 따지기까지. 간식을 주지 않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나? 애가 계속해서 배탈이 나는 꼴을 보면서도?

이뿐만이 아니다. 또 하루는 백신 접종을 하러 온 반려동물이 있었다. 컨디션도 매우 좋다고 하니 기본적인 체크만 하고 접종해서 보내면 될 것 같았다. 루틴하게 백신에 대한 설명을 끝내고 주사를 놓으려는데, 갑자기 보호자가 애가 주사를 많이 아파하는지 물었다. 주사가 아프냐고? 내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바늘은 뾰족하고, 피부는 말랑말랑하니 당연히 아프겠지. 물론 아프지만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하며 주사를 마저 놓으려는데 그 대답을 듣던 보호자는 냉큼 강아지를 챙겨 버린다. 그리곤 접종은 다음번으로 미루겠다며 사라지더니 그 이후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아픈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사 표현이겠다. 심지어는 백신이 아니라 아파서 주사를 맞는 경우에도 종종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정말이지 주사 맞는 게 그렇게 심각한 일이었던가? 아니, 다 좋자고 하는 일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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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의 보호자들은 결코 반려동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그래서 반려동물을 막 키우려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걱정했던 것은 반려동물의 건강보다도─간식을 주지 못하거나 주사 바늘 때문에 잠깐 아픈 등의─굉장히 사소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심약하되 너무도 무지한 보호자들! 이런 보호자들이 계속해서 있는 이상 그들과 동거하는 동물들이 건강해지기란 너무나도 요원해 보였다. 그렇담 이제 묻지 않을 수 없다. 보호자, 즉 동거-인간의 사랑의 본질은 무엇이기에 동거-동물을 위험에 빠뜨리게 되는 걸까?

사랑─가장 무능한 존재를 만들다

만약 위의 사례가 인간 부모와 인간 아이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인간 아이가 간식을 많이 먹어 배탈이 났다. 그렇다면 부모는 당연히 아이에게 간식을 금지할 것 같건만 부모는 예상을 깨고 이렇게 대답한다. 아이가 너무 간식을 먹고 싶어 해서 안 된다. 간식을 먹는 게 그 애 낙인데 어떻게 그러겠냐, 하고. 여기다 대고 ‘부모가 참 아이를 사랑하네요’라며 감탄하는 인간은 없으리라. 부모의 언행은 오히려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아무리 부모라 해도 아이의 삶의 낙을 함부로 결정할 순 없는 노릇이다. 두 번째 사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백신 접종을 할 때 (백신 부작용도 아니고!) 주사 바늘이 아픈 게 염려되어 아이의 접종을 거부하는 부모가 있다고 해 보자. 그 부모는 분명 아이의 건강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평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주사 맞는 게 물론 아프긴 하지만 때론 그 고통을 감수하면서 건강을 챙겨야 할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동거-인간은 마치 주사 맞는 고통을 피하는 게 동물에게 전부인 것마냥 굴었다. 동거-인간은 인간 부모와는 다르게 동거-동물의 삶의 의미를 제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랬다. 동거-인간은 동거-동물의 일거수일투족을 결정한다. 무엇을 먹는지, 어떤 버릇을 들일지, 어떤 친구를 사귀고 어떤 최후를 맞을지까지. 무엇이 동물에게 좋고 나쁜지를 결정하는 건 모두 동거-인간이다. 너무 당연한 얘기인가?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인간이 아닌) 동거-동물은 동거-인간에게 모든 것을 의탁해야 하니까. 동거-인간들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대부분의 동거-인간들은 동물을 위해 자신이 가장 좋은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막중한 의무감 아래 산다. 위 사례에서 봤듯이 자칫 잘못 선택하면 그 피해를 입게 되는 건 자신이 사랑하는 동거-동물이다. 그러니 인터넷을 뒤지고, 여러 사람들한테 물어도 보고, 거액의 돈을 들여 전문가에게 묻기도 하면서 동거-동물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열심히 고민한다. 더 많이 알아보고 더 많이 고민한다면 적어도 위 사례의 동거-인간들처럼 어리석은 선택은 내리지 않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그러나 나는 줄곧 의문이 들었다. 이게 정말 동거-동물의 건강을 너무너무 잘 챙기는 동거-인간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문제인 걸까? 내가 동물병원에서 만나는 동거-인간들은 대부분 동물을 지나치게 잘 챙기려다가 도리어 동물들을 괴롭게 만드는 자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문제는 동거-인간이 얼마나 더 잘 챙겨주느냐에 있지 않았다. 동거-인간에게 사랑받을 때조차도, 아니 사랑받으면 사랑받을수록 동거-동물은 더욱 위험에 처했다. 이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위험이었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모든 것을 의탁할 때 생겨나는 위험. 동물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꾸려갈 힘이 없을 때 찾아오는 위험. 동거-인간의 사랑이 만들어내는 이 존재적 무능력 앞에서 동거-동물은 언제나 연약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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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동물은 근본적으로 약한 존재이다. 동거-인간이 누구보다 호들갑을 떨면서 동거-동물들을 챙기는 이유는 그 존재적 연약함에 대해 뼈저리게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거-동물이란 내가 없으면 밥 한 끼도 못 먹고, 산책 한 번도 못 나가고, 제 아픈 몸을 챙길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 아니던가. 동거-인간은 매일같이 이런 무능력한 동물들을 마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그들은 더 동물들을 챙기고 더 동물들을 사랑해주려 한다. 그 사랑이 더욱더 동거-동물들을 연약하게 만든다고는 알지 못한 채.

극단으로 치닫는 연약함의 굴레는 동거-동물의 죽음에서 결국 폭발하고 만다. 아무리 지극정성인 동거-인간이라 한들 동물의 죽음마저 대신해줄 순 없다. 한데 그 연약한 동물이 어떻게 인간조차 마주하길 꺼리는 죽음을 대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동거-동물의 죽음은 늘 비극이고 슬픔이 된다. 나는 매번 동거-동물의 죽음 앞에서 죄책감에 사로잡힌 동거-인간들을 봤다. 그들은 하나같이 동거-동물의 죽음 앞에서 자기 자신을 탓했다. 조금 더 빨리 알아챘으면, 조금 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동거-동물이 그토록 고통받지 않았을 텐데. 치료를 중단한 것도, 치료를 계속한 것도, 치료를 한 것도, 치료를 하지 않은 것도 모두 잘못의 이유가 되었다. 동거-동물의 죽음은 단 한 번도 ‘좋은 죽음’이 될 수 없었다. 동물 자신이 제 죽음을 맞이할 어떤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인간의 도움만이 필요했을 뿐! 어쩌다 동거-동물은 자신의 삶마저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을까? 동물은 이토록 인간에게 의존하는 방식으로밖에 인간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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