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인용한 181조목은 ‘마음은 하나’라는 말이 의미하는 중요한 측면을 보여줍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것은 이 마음과 그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이, 그리고 천하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 즉 ‘하나’라는 것입니다. ‘나는 너다!’(feat. 황지우 시인). 스케일이 갑자기 확 커져버린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마음이 하나라는 거냐, 라는 물음은 잠시 괄호 안에 넣어두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정말로 중요한 건 마음이 하나냐 둘이냐 혹은 여럿이냐 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마음은 하나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마음은 모든 것이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더 헷갈려 합니다.(^^) 양명 선생의 어려운 말을 쉽게 풀어주지는 못할 망정, 양명 선생의 쉽고 간명한 말을 오히려 어렵게 푼 셈입니다.
또한 마음이 하나라는 말에는 마음에는 안과 밖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어떤 결정을 후회하는 마음의 내가 또 다른 결정의 마음을 바라보는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조금 다른 얘기로 비유를 해보면, 저는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지(良知)를 설명할 때 종종 양심(良心)과 비교하곤 합니다. 양심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마음 앞에서 더 옳은 마음을 선택하는 문제라면, 양지는 어떤 마음이든 그 한 마음일 뿐입니다. 양지가 가려졌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있을 수 있지만, 양지를 떠나 마음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고 마음은 하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인용된 181조목을 살펴보겠습니다. 양명의 문장은 비록 번역된 글로 읽더라도 통쾌하고 유장하고 가슴이 벅차고 신나고 등등 정말 다이내믹합니다. 이 문장도 역시 그러한 문장중 하나인데, 맹자의 측은지심을 해석하는 대학자의 멋진 솜씨를 보는 것 같습니다. 결국 핵심은 마음은 하나이고, 천하의 마음은 곧 나의 마음이라는 것.
이는 곧 부모나 자식 형제 등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면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정신없이 구하려드는 것처럼 천하사람들이 위태로운 상황에 빠진 것을 차마 외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훗날 만년의 양명 선생은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대인은 천지 만물을 한몸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천하를 한 집안으로 보고, 중국을 한 사람을 여긴다”(feat.<대학문>). 대인이 천지만물과 한몸이라는 것은, 대인의 인(仁)이 천지 만물의 인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는 그가 대인이어서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만물의 인과 하나일 수 있어서(/하나일 수 있는 사람이) 대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나 자식 형제 등의 위태로움을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측은지심은 우리가 대인이어서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본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본래 하나라고 해도, 마음의 그러함을 우리가 잃지 않고 놓치지 않으면, 즉 우리가 측은지심을 발휘하여 부모나 자식 형제 등의 위태로움에 하나가 될 때 그 순간 나의 인은 그들의 인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양지를 제대로 발휘한 것입니다.(치양지!)
이 대목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대승불교의 ‘보살’이 떠오릅니다. <유마경>에는 중병 때문에 병이 난 유마거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병을 온 문수사리보살이 유마거사에게 어째서 병이 났는지 묻자, 유마거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중생이 병들었는데 어떻게 보살이 아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생이 아프지 않으면 보살의 병이 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