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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탄자 타고 천일야화로] 재물과 약속에 관한 페르시아의 에피스테메(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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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08-13 15:38 조회8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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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과 약속에 관한 페르시아의 에피스테메(下)
김희진(감이당)

상인과 정령의 약속

한 상인이 있었다. 그는 길을 가다가 잠시 쉬면서 간식으로 대추야자를 먹었다. 그리고 무심코 뱉은 대추야자의 씨… 갑자기 나타난 무시무시한 정령은 그 대추야자 씨앗에 맞아서 자기 아들이 죽었다며 다짜고짜 그 상인을 죽이려 했다. 이렇게 저렇게 빌어보고, 억울함을 호소해보았지만 정령은 막무가내다. “네놈이 내 아들을 죽인 것처럼 나도 네놈을 죽여야겠어!”라는 말만을 반복한다. 결국 누군지도 모르는 정령 아들의 죽음에 자신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상인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도 인정하게 된다. 그래도 갑작스런 죽음을 지연시켜 조금의 말미를 얻는 것에 성공한 상인은 1년 후에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 조급한 정령이 뭘 믿고 보내줬냐고? 상인이 ‘하느님(알라)을 증인 삼아’ 맹세를 하자마자 정령은 사라진다.

이것은 천일야화의 첫째 날 밤을 여는 유명한 이야기다. 목숨이 달린 일이건만 상황은 매우 웃긴다. 얼마 전 한 친구가 간식으로 대추야자를 가져왔는데 포장지에 고대 아라비아의 도시가 그려진, 중동지역의 특산품이었다. 그 열매는 대추와 똑같이 생겼고 맛도 훨씬 더 달콤한 대추 맛이다. 대추야자의 씨앗은 대추씨앗만큼 작다. 그 씨앗을 맞고 죽을 만한 생명체는 과연 누구일까? 이야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정말 죽은 개미 시체라도 있는지를 확인하지도 않는다. 그저 정령이 아들이 죽었다며 복수를 하려하자 울며불며 매달리는 내용으로 직행한다. 이상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정령의 아들이 죽었다면, 이 무시무시한 복수가 정당하다고 당연하게 여겨지며, 상인 역시 자기 목숨으로 갚을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인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상인이 뒷정리를 하고 1년 후 돌아오겠다고 알라를 걸고 맹세하자 정령이 안심하고 싹 사라져버렸다. 정령에게 이보다 더한 보증은 없는 것이다.

autumn-3400000_640대추야자의 씨앗은 대추씨앗만큼 작다. 그 씨앗을 맞고 죽을 만한 생명체는 과연 누구일까? 이야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여기엔 대추야자씨앗이니 정령이니 재밌는 요소들이 많이 들어있지만 이야기는 이 소재들엔 관심 없다는 듯 휙휙 점프하듯 전개된다. 또 상인이 겪게 될 운명에 대해 억울함이나 괴로움, 또는 빠져나갈 궁리 같은 것도 없다. 이 간단한 이야기는 시종일관 ‘원칙’과 ‘약속’이 지켜져야 한다는 메세지를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다. 삶이 어떤 공식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정령은 자식의 죽음에 슬픔에 빠져있거나 복수를 하려고 다짐하며 절규하지 않는다. 그저 상인에게 빚을 받으러 온 것처럼 요구한다. 목숨에는 목숨으로만 빚을 청산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공약이 이들 사이에 흐른다. 그래서 이 상인이 목숨을 갚아야 하는 그 대상이 개미인지, 지렁이인지, 꼬마정령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크기에 상관없이 목숨은 목숨으로!

죽음을 준비하기-가진 것 내려놓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계약을 맺고 거래를 하는 상인이다. 상인에게 주어진 1년의 말미는 정령이 생각해도 죽기 전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허락해 주었나본데, 상인은 역시 돈과 재물에 관해 청산하고 오겠다고 사정하여 정령을 설득했다. 제게 시간을 조금만 주세요가서 마누라와 자식새끼들도 좀 보고또 아직 유언장도 작성 못했는데 재산도 분배해 주어야죠그래야 제가 간 후에도 분쟁이 없을 것 아닙니까?”(1권, 55쪽)

상인은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자신이 1년 후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말한다. 가족들은 오열하며 남편과 아비를 떠나보내는 슬픔에 겨워 어쩔 줄을 모른다. 이 가족들 역시 가장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정령이기 때문에 그의 초인적 힘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다. 왜냐면 정령은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죽일 수가 없기 때문에 꼭 돌아오겠다고 ‘알라’에 맹세한 후에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며,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삶의 공식으로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슬퍼할지언정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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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은 1년 동안 자신이 말 한대로 주변정리를 해나갔다. 빚진 것이 있으면 모두 갚았고, 친구들에게는 선물을 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적선하고, 노예들에겐 자유를 주었다. 또 재산을 자식들에게 분배하고, 아내에게도 모든 권리를 돌려주었다. 이럴수가! 그는 모든 부가 알라에게 속한다는 원칙아래 자기가 소유하고 있었던 모든 것을 죽기 전에 되돌려 놓고 간다. 무슬림이 모두 이런 원칙하에 죽음을 준비한다면 이들에겐 강제적인 상속세가 필요 없다. 재산 중에서 자식에게 물려줄 몫은 계산하되, 알라에게 되돌아가야 할 재산은 모두 가난한 자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다. 상인이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의 소유권 정리, 권리의 포기, 채무의 이행 같은 것들이다.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가려고 할 뿐, 1년의 시간동안 향락을 누리며 재물을 모조리 쓰고 죽겠다는 식의 아쉬움과 탐욕이 보이지 않는다. 재산만 알라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라 삶이 알라의 이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1년이 지나고 떠날 시간이 되자 상인은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들아내가 너희들을 떠남은 하느님(알라)의 명에 순종하기 위해서란다너희들도 내 본을 따라서 어쩔 수 없는 이 운명을 용감하게 받아들여라그리고 죽는 게 인간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려무나.”(1, 57)

정확하게 1년 후, 상인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로 돌아온다. 정령 역시 목숨을 받으러 그곳에 나타났을 때, 길 가던 노인들이 정령에게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상인을 구하는 것으로 이 스토리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정령은 알라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상인을 믿는다. 상인 역시 이 약속을 지키는 것, 그리고 목숨은 목숨으로 갚는 행위를 알라의 명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의 중심은 ‘알라’와 ‘약속’인 것이다. 이슬람은 계약의 종교다. 이들의 알라는 구약의 하느님과 같아서 다분히 인간적인 면모를 지녔다. 인간과 계약을 하고, 인간이 약속을 어기면 분노하면서 단죄하고 징치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계약의 말들, 약속의 언어를 지키는 것이 신앙이고, 그걸 어길까봐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신앙이다.

contract-1464917_640이슬람은 계약의 종교다.

진리에 다가가는 약속이행

이슬람 이전은 어땠을까? 페르시아 지역은 고대로부터 종교와 영성이 발달해왔다. 오랜 시간 페르시아에서 아리안족의 전통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였다. 창시자 조로아스터는 기원전 1400~1100년대의 사람이라고 추정되는데, 그가 조로아스터교를 만들기 이전에도 아리안들은 유목민족답게 다신교 신앙이 매우 발달해 있었다. 유목시절, 그들은 보이지 않는 모든 감정, 행위, 현상에 이름을 붙였다. 그것이 신들의 이름이 되었고, 인간은 자신의 원하는 감정, 행위, 현상을 위해 그 신들이 그 반대의 신과의 대결에서 이겨서 자신에게 영향력을 미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수많은 신들 중 ‘미트라’라는 신이 있다. 미트라는 인도에서도 동일한 이름으로 ‘태양’의 신이다. 이 태양의 신 미트라가 관장하는 인간의 행위는 약속 이행인데, 그는 심판관이며, 삶을 주는 자다. 페르시아인들은 미트라신에 대한 경배를 중시했다. 계약에 대한 이행은 그들 삶의 가장 중요한 윤리였는데, 미트라신이 자신들을 르타(진리)에게로 이끈다고 여겼다. 페르시아인들은 약속이행으로 진리와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을 오랫동안 지녀왔던 것이다.

천일야화의 이야기는 마법이나 뜻밖의 사건을 통한 사태전환은 종종 나오지만, 인간적인 고뇌 속에서 배반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벌어지는 반전은 없다. 약속을 이행하기만 하면 되니 매우 단순한 구조를 지닌다. 하기로 했으면 하는거다. 오늘의 주인공은 죽기로 했으면 죽는 거라고 하면서 순순히 죽으러 가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그가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에 주목해본다. 그저 맹목적으로 약속이니까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약속을 지킴으로써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진리를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삶이란 ‘어쩔 수 없는’거라는 것을 알려주고, 모든 걸 신께 돌리고 그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을 몸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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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게 인간의 운명이라는 말과 세헤라자드가 이 이야기로 첫째날의 포문을 연 것이 연결되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녀 역시 목숨은 술탄에게 맡긴다는 무시무시한 계약 아래, 그 운명을 용감하게 받아들이며 죽음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기 때문이다. 용기 있는 이 상인이 노인들의 이야기로 목숨을 구했듯, 운명 앞에 목숨마저 내려놓은 세헤라자드도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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