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탐닉해 들어간 관능적인 미라는 것도 그렇다. 거기서 그들이 노린 것은 감각적 자극의 극대화. 이를 위해 그들은 금기를 넘는다. 무언가를 자극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은 금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흔히 야하다고 얘기되는 것들은, 야해서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금지되었기에 야해지는 것이다. 요컨대 금기의 정도가 곧 짜릿함의 정도. 해서 이로부터 병리적이고 범죄적인 쾌락이, 퇴폐적 취향이 생겨나게 된다.
데카당스들이 도덕을 부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도덕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도덕 그 자체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시대가 요구하는 도덕적 가치들이 삶을 얼마나 비루하게 만드는지, 하여 삶을 고귀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새로운 가치의 도덕들이 필요한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들이 비도덕적인 행위들을 하면서 바란 것은 하나. 짜릿함! 그들의 비판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었고, 부정이 주는 자극적 쾌락을 향유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하여 데카당스들은 창조를 모른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금기의 벽을 무너뜨리는 것. 그들은 기를 쓰고 그 장벽을 파괴한다. 그러면 그걸로 끝이다. 혹여 누군가 ‘그 다음에는’이라고 물으면, 그들은 답할 것이다. 파괴할 때의 그 열정과는 사뭇 다른, 시들하고 시큰둥해진 목소리로, ‘인생이란 헛되도다!’ 그렇게 그들은 파괴와 파괴를 이어갈 뿐이다. 더 큰 자극을 찾아, “점점 더 강한 양념을 원하는 그의 취향”을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