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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리포트] 간만의 쿠바 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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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0-11-29 21:25 조회1,4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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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의 쿠바 귀환기

김 해 완

잠깐 딴 길로 샜던 과학 연재를 멈추고 본래 소식에 충실하기로 한다. 쿠바에 왔다.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올 여름 한국에 있었던 시간보다 더 오랜 기간 멕시코에서 발 묶인 채로 쿠바행 비행기를 기다렸었다. 상황은 희망적이지 않았다. 내 표를 쥐고 있는 항공사 아에로멕시코가 파산 직전 상태에서 멕시코시티-아바나 노선을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노선을 없애놓고 환불은 안 해주는 만행까지 보인다. 항공사들 모두 돈독만 잔뜩 올랐다.

‘화이팅 공중버스’를 타고 쿠바로

하지만 어떻게든 살 길은 열리나보다. 한 영세한 멕시코 항공사(비바아에로버스. 규모가 어찌나 작은지 그 이름도 ‘화이팅 공중버스’다)가 아바나 대신 그 옆 동네 바라데로로 들어가는 노선을 10월말부터 개시한다고 했다. 나는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표를 샀다. 눈물 나게 비쌌으나 이제 가격은 문제가 아니었다.

표를 사고도 내가 쿠바에 갈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쿠바가 정말 외국인 입국을 허용한단 말인가? 바라데로 공항까지 가서 입국 거절을 당하면 어떡하지? 입국한 후도 걱정이었다. 쿠바는 그간 지역 간 이동을 금지하다가 최근에야 규제를 풀었는데, 과연 해외입국자에게도 완화된 규제가 적용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기껏 입국해놓고 바라데로에서 아바나로 이동하지 못하면 큰일이었다. 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학생 신분이기 때문에 국가시설에서 격리당할 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격리시설 상태를 비디오로 미리 보고 말았다.) 그러나 몸으로 직접 부딪히기 전에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쿠바에 간다는 사실이 어찌나 의심스러웠던지, 실제로 들어가기 전에는 이를 연구실에 알리지도 않았다. 긴 의심을 요약하자면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 문제없이 입국했고, 1인당 50불씩 내야 한다는 PCR 검사는 웬일인지 무료로 받았고, 택시기사는 군말 없이 나를 아바나까지 태워다주었다. 학교에 도착하자 경찰이 나를 격리시설로 탈바꿈한 기숙사로 데리고 갔다. 이제 이곳에서 1주일만 기다리면 정식으로 쿠바 귀환을 마칠 것이다. 세상에, 나 정말 와버렸다. 쌀도 비누도 없는 이곳에!

멕시코 공항으로 떠나는 날 해완을 배웅하는 제프리

아무 일도 없지는 않았다

정말 아무 일도 없지는 않았다. 쿠바에 도착하기 전에 소동이 하나 있었다. 멕시코시티 공항에서 짐을 부치는데, 항공사 직원이 내 기내용 캐리어와 배낭 무게를 재더니 15kg에서 3kg가 오버되었다고 경고했다. 캐리어 10kg, 개인물품 5kg에 무게를 맞추는 것이 원래 비행의 정석이다. 안 지켜지는 경우가 태반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영세한 ‘공중버스’는 우리를 너그럽게 봐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기내용 캐리어뿐만 아니라 배낭까지 꼼꼼히 무게를 체크하는 치졸한 항공사는 처음 봤다.

나는 물건 정리를 할 테니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했지만, 직원은 탑승 전에 다시 한 번 무게체크가 있을 예정이니 그때까지 알아서 하라며 나를 거의 쫓아내다시피 했다. 내 뒤로 줄줄이 기다리는 쿠바인들의 모습에 압박을 받는 듯했다.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물러났다. 팬데믹 상황에서 쿠바로 향하는 우리는 철저한 을의 입장이었다. 갑은 항공사와 쿠바정부였다. 이들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겨우 뚫린 길마저 막힐지도 몰랐다.

아침을 먹으면서 나는 3kg의 짐을 어떻게 눈속임해서 들고 갈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기내용 가방은 제일 중요한 것들만 담는 곳이다. 노트북, 태블랫, 돈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튀김가루와 친구의 부탁으로 챙긴 망고캔디는 허리춤에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따라 통 큰 바지에 품이 넉넉한 겉옷을 입었기 때문에, 바지와 배 사이에 물건을 넣고 허리띠를 졸라매면 감쪽같았다. 배가 나와 보이겠지만 복부비만 아시아인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탑승구에 가서야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재수 없게 들켰다가 혹시 튀김가루를 마약으로 오해받으면 어떡하지? 나 멕시코에서 연행되는 거 아니야? 그러나 현실은 상상보다 몇 발 더 앞서 나갔다. 탑승 직전, 벼락처럼 방송이 나왔다. 쿠바 정부의 요청으로 인하여 규제가 바뀌었다. 이제는 15kg이 아닌 10kg의 단 한 개의 가방만 허용된다. 그리고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비행기를 탈 수 없다. 아…… 욕하면 안 되는데 된소리의 한국어가 내 혀를 채웠다. 이런 뭐 같은 상황에 뭐 같은 사람들이 다 있나. 지금 탑승객들보고 멀쩡한 짐을 5kg씩이나 버리라는 말인가? 그것도 마지막의 마지막인 이 순간에? 이 짐은 쿠바에서 물자부족으로 고통 받는 가족들을 위해서 사람들이 절박하게 준비한 물건들이었다.

공중버스 측의 통보에 탑승구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가방을 뒤집었고, 차마 버릴 수 없는 물건들을 옷 속에 마구 쑤셔 넣었다. 그러나 공중버스 직원들은 무표정으로 사람들을 한 명씩 잡아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우선 덜 중요한 물건들부터 버렸다. 튀김가루와 망고캔디는 물론이요, 스킨로션과 세면도구도 희생되었다. 옷이란 옷은 죄다 꺼내어 몸에 걸쳤다. 바지 속에 레깅스를, 긴팔 위에 반팔 두 개를 겹쳐 입었다. 거기에 수건까지 허리춤에 끼워 넣고 겉옷으로 가리니 몸이 임산부처럼 거대해졌다. 하지만 이런 눈물겨운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캐리어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책 <축의 시대>였다. 무게도 무게지만, 부피가 컸다. 그렇다고 책을 길바닥에 버리자니 손이 나가질 않았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탑승구에서 서성였다.

결국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대놓고 책을 옆구리에 낀 채 입장했다. 직원은 책을 흘낏 보기만 할 뿐, 그대로 나를 들여보내주었다. 앞서 손에 물건을 주렁주렁 들고 오는 탑승객들은 이 잡듯이 잡았으면서 말이다. 열 받은 내 표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학생의 책을 뺏을 수는 없다는 나름의 윤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감사할 여유도 없었다. 꼭두새벽부터 움직였던지라 지독히 피곤했고, 자리에 앉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껴입은 옷 때문에 땀을 뻘뻘 흘렸다. 눈을 뜨니 쿠바 상공이었다. 쿠바는 국가 홍보 문구를 바꿀 필요가 있다. 쿠바만의 매직 리얼리즘, 상상해보지 못한 생고생을 선물로 드립니다.

간신히 지켜낸 『축의 시대』

무엇이 그리웠는가

1주일의 격리생활은 원고를 쓰다가 다 지나갔다. 최악을 상정하고 갔더니 시설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변기 물은 안 내려갔지만 샤워기 물이 나왔고, 전기도 안 끊겼다. 식사는 우리 학교의 급식 수준을 고려했을 때 준수한 편이었다. 밥과 반찬의 비율 조절은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말이다. 정말 큰 문제는 식수를 안 준다는 것이었다. 인권침해 아니냐고 항의했더니, 자국 대사관에서 생수를 받아 마시거나 수돗물을 마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남한 대사관이 없는 쿠바에서 일부러 나를 약 올리려고 한 말은 아니겠지… 다행히 천사 같은 쿠바 친구가 손수 끓여 식힌 물을 5리터나 가져다준 덕분에, 나는 수돗물을 마시고 설사병 나는 참사를 피해갈 수 있었다.

쿠바 도착 후 격리장소에 입성

시설에 머무는 동안 나는 아침마다 작은 ‘쇼’를 했다. 8시마다 시끄럽게 울리는 쿠바 레게똔을 들으며 잠에서 깼다. 간호사들이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면서 틀어놓은 노동요다. 그렇게 눈을 뜨면 덕지덕지 녹이 낀 철제 창문과 손잡이 절반이 박살나 있는 방문이 제일 먼저 보였다. 지극히 쿠바다운 풍경이다. 놀랍게도 이 풍경이 몹시 그리웠던 것 같다는 생각이, 아직 잠이 덜 깬 정신머리에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삼 초 후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스스로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잠기지도 않는 방문과 열리지도 않는 창문을 그리워하나! 지난 봄 팬데믹과 함께 쿠바에서 했던 개고생은 모두 잊었는가!

하나도 잊지 않았다. 그게 더 문제다. 나도 모르게 품게 된 애증의 실체는 다름 아닌 고생, 개고생이다. (쿠바의 매직 리얼리즘이 이토록 강력하다.) 이곳의 고생에는 정말 특별한 구석이 있다. 물자 부족뿐만 아니라 안정성의 부재까지 일조한다. 가령, 수돗물이 안 들어오는 것은 문제다. 그러나 이 물이 들어오다가 안 들어오고, 또 갑자기 들어온다면 그건 더 큰 문제다. 이건 안정적인 공급망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안 열리는 창문, 안 잠기는 방문이 뭔 대수인가. 물이 없는 수도관, 가스 없는 가스관, 야채 없는 시장, 어제는 오백 원이었다가 오늘 오천 원이 되는 쌀 1kg의 가격, 지금 동시에 두 대가 왔지만 다음 두 시간 동안 한 대도 오지 않을 버스도 있다. 생활의 문법은 매번 새롭게 파괴된다. 아무것도 당연한 건 없게 되고, 그래서 무엇이든 당연하게 된다.

쿠바에 대한 애증 중에서 ‘증(憎)’을 차지했던 것은 이런 환상적인 일상 파괴였다. 쿠바의 ‘소박한 삶’은 단순히 ‘덜 바라는 것’을 넘어서, 일상의 개념을 아예 새로 발명하기를 요구한다. 이제 초점은 안정성에서 연속성으로 옮겨간다. 일상은 바라는 대로 꾸미고 성취하는 시간이 아니라, 작은 탈이 나도 큰 탈은 피해보자는 마음으로 연명하는 시간이 된다. 말하자면 물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징검다리를 건너가는데, 그 중 대다수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짧은 거리를 이동하려고 해도 미친 스텝을 밟아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곳의 임시변통은 절대 ‘임시’가 아니다. 영원한 라이프스타일이다.

그런데 이 난리통 속에서 이상한 ‘애(愛)’가 자라난다. 어디에도 고정적으로 의지할 데 없는 상황이 되면, 거꾸로 의지처 없이도 어떻게든 살아내는 내 힘과 주위의 힘을 확인하게 된다. 밥 한 끼를 하기 위해서는 친구들의 호의에 빚져서 식재료를 구해야 하며, 제한된 재료로 요리다운 요리를 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한다. 빨래 한 번을 하기 위해서는 물 들어오는 날에 모터가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하고, 이웃집이 물탱크의 물을 혼자 다 쓰지 않는 공동체의 윤리를 잊지 말아야 하고, 세탁기를 돌리는 순간에 전기가 끊기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날 비가 오지 말아야 한다. (하늘이 허락해야 빨래도 한다.) 이 모든 미션을 클리어한 후에야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영웅적인 행위는 일상을 연명하는 것 외에는 없다. 일상 속 행동 하나하나가 저절로 위대해진다. 오지 않은 버스를 기다리느니 매일 학교까지 4km 언덕길을 오르기를 자청하는 내 튼튼한 다리를 찬양하라!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는 환경, 녹슬고 부서진 물건들 가운데 있으면 역으로 나 자신의 존재의 중심이 분명하게 보인다. 초라한 풍경 속에서 나는 묻히지 않는다. 이런 물건들이 나를 규정할 수 없고, 불편한 생활이 삶을 제한할지언정 볼품없게 만들지 않는다. 그 속에서도 빛나는 것들이 있다. 쿠바는 내가 이 사실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매순간 다양한 방법으로 시험한다. 이번에 격리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전기가 끊겨서 세탁기를 돌릴 수 없었다. 전기가 돌아오자 그 다음에는 물이 끊겼다. 그때 내 이성의 끈도 끊어졌다. ㅎㅎㅎ…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ㅎㅎㅎ…… 여기서 ‘너’란 이런 환경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외치는 내 안의 나일 테다. ‘너’는 틀렸다.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 쿠바의 생활을 미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여러 방면으로 시험 당할수록 세상에 대한 수용력이 더 커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럴수록 나는 더 자유로워진다. 누더기처럼 구멍 뚫린 생활은 오히려 그 구멍을 통해 ‘삶’이라고 부를만한 순간을 드러낸다.

이반 일리치는 스물다섯 살에 뉴욕에 갔다가, 충동적으로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커뮤니티의 사제가 되기로 결정한 후 그들과 동고동락하며 오 년을 지낸다. 그는 훗날 <일리치와의 대화>에서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삶’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을 배웠던 인생의 유일한 시간이었다고. 그의 말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삶이 맨살을 드러낸다면 이런 느낌일까? 가난, 저개발, 없이 사는 행복 같은 전형적인 단어로는 그 치열함을 다 담을 수 없다.

반찬과 밥 사이 비율 조절을 실패한 식단

부조리 속에서도 내어줄 수 없는 것

지난 봄, 쿠바에서 코로나발 봉쇄를 경험하면서 나는 전례 없는 패닉에 빠졌다. 일상의 연명조차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때 MVQ에 썼던 글들을 봐도 불안정한 상태가 느껴진다. 다시 돌아온 지금도 위기감은 여전하다. 코로나만 이겼을 뿐, 나머지 부문에서는 붕괴되기 직전이다. 외화는 바닥났고 수입은 끊겼다. 자급자족을 하기엔 국내 생산력이 약하다. 쿠바가 이 정도의 강도로 고립된 것은 특별시기 이후 처음이다.

최근에 쿠바 정부는 외화를 긁어모으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MLC라는 새로운 종류의 가게를 연 것이다. 이 가게는 쿠바 페소가 아니라 오로지 미국 달러만 받는다. 화폐 유통을 통제하기 위해서 이 달러는 은행에 반드시 예금된 후 체크카드로만 사용될 수 있는데, 정작 은행은 달러를 팔지는 않는다. 외화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상황이 아주 기이해졌다. 한 나라에 두 개 이상의 화폐가 공존하고, 화폐별로 살 수 있는 물건이 차별화되었는데, 정작 사람들이 달러에 접근할 수 있는 공식 루트는 막혔다. 외국에서 외화를 송금해줄 친척이 없는 사람들은 돈이 있어도 MLC에 갈 수가 없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도, MLC의 가판대에는 물건이 꽉 들어차 있다. 나는 충격과 공포로 발을 떼지 못했다. 한국 가게를 보는 줄 알았다. 내가 쿠바에 산 지 햇수로 4년째지만, 이번처럼 양질의 물건이 쌓여 있던 적이 없었다. 치즈와 우유는 물론이요, 시장에서 오랫동안 실종된 치약까지 있었다! 세상에 먹을 거 가지고 차별하는 게 제일 치사한 짓이건만… 정부는 ‘예외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말하며 이해를 구한다. 그러나 이해와 수용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임시방편의 조치가 거듭되면서 사람들이 수용할 수 없는 구석까지 몰린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곳의 분노는 투쟁의 발화점에 쉽게 다다르지 않는다. 분노의 온도를 떨어뜨리는 것은 사람들의 피로감이다. 다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라는 태도를 보인다. 팬데믹은 지금까지 쿠바를 강타한 여러 위기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때마다 생활의 문법은 완전히 뒤집혔다. 이런 ‘예외상황’은 앞으로도 계속 찾아올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아예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말해봤자 입만 아플 뿐 바꿀 수 있는 건 없다. 그 시간에 쿠바 페소로 살 수 있는 쌀과 비누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편이 낫다.

다시 찾은 쿠바에서 나에게 가장 낯설었던 것은 달러의 부상도, MLC의 풍경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 난리통 속에서도 덤덤한 사람들의 태도였다. 예전에는 이것이 순응주의이자 패배주의라고 생각했다. 혁명의 땅에 더 이상 변혁은 없나보다고 섣불리 단정 지었다. 그러나 팬데믹급의 위기 속에서조차 크게 동요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니,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건 외부가 강요한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강도의 인내심이 아니다. 차라리 오랫동안 기초를 닦은 삶의 기예에 가깝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마음의 평화만큼은 내어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인 것이다. 떠날 수 없는 섬나라에서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닥쳐오는데, 마음까지 어지럽힐 이유는 없다. 나로서는 하고 싶어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마음가짐이다.

급격한 변수들이 삶에 끼어들 때, 우리는 그 변수를 받아들이면서도 일상을 멈추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그 노력의 형태는 저항일 수도, 순응일 수도 있다. 순응을 택한 쿠바인들은 삶을 조용히 지속시킨다. 안전장치 없는 롤러코스터처럼 생활의 기반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지만, 생활의 모든 것이 제도와 시장에 좌지우지되지는 않는다. 이 평정심은 제도와 시장 바깥의 영역에서 커뮤니티가 튼튼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내가 없는 곳에서도 나를 위해 쌀과 계란을 찾아줄 가족과 친구와 이웃이 있기에, 배는 고파도 마음까지 허하지는 않다. 마음의 평화에 흔들리지 않는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바로 네트워크다.

내 격리시설에 물을 가져다주었던 쿠바 친구는 “견디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저항”이라고 언젠가 말했었다. 핵심은 어느 시점까지 견디느냐가 될 것이다. 그리고 견디는 시간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줄 가족, 친구, 이웃을 옆에 꼭 붙드는 일이 될 것이다.

친구가 찍어준 '쉬는 시간에 자는 해완 몰카'

재생력

“이것은 또 다른 특별시기를 거치는 것에 불과하다”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는 이 사람들은 같은 인간이지만 또 외계인 같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말하는가? 트라우마가 되고 남을 극적인 경험을 한 후, 현재 전 세계의 트라우마인 팬데믹을 겪으면서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때 그 시절을 다시 끄집어내는가? 쿠바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과 수용하기 어려운 것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위기와 무질서 속에서 일상을 어떻게든 다시 궤도에 올려놓는 사람들의 재생력은 정말 대단하다. 대단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다.

재생, 이 말은 곱씹을수록 묘하다. 다시 산다, 다시 살아난다, 다시 치유된다 등등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다시’ 살려면 일단 한 번 죽어야 한다. ‘다시’ 치유되려면 한 번 아파야 한다. 병과 위기는 존재방식의 급격한 해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죽음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놀라운 것은 해체의 문턱을 통과하는 순간 다시 새롭게 구성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생사의 문턱을 관통하는 이 능력, 재생력이 있다. 이는 모든 층위에서 확인된다. 병에서 치유되거나 병과 함께 살아버리는 신체, 과거의 충격적인 기억을 현재의 유머로 승화시킬 수 있는 마음, 부조리한 현실에서도 옆 사람과 함께 일상을 지켜내는 라이프스타일.

쿠바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과 수용하기 어려운 것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위기와 무질서 속에서 일상을 어떻게든 다시 궤도에 올려놓는 사람들의 재생력은 정말 대단하다. 대단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다.

쿠바체류를 되돌아본다. 트럼프의 당선, 석유가 사라졌던 꼬윤뚜랄 기간, 뎅기열의 습격, 코로나바이러스와 식량 실종, 그리고 달러의 부활까지. 드라마 같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내 멘탈은 해체되었다가 재정비되었다. 이런 소소한 재생의 경험이 쿠바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끝이 곧 끝이 아님을, 고통이 재생의 시선을 만나면 인식의 전환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쿠바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직설적으로 배우기 어려웠을 테다. 한국 사회는 청년들에게 한 번 발을 삐끗하면 영영 정상 궤도로 돌아올 수 없다는 공포를 심는다. 그 공포에 사로잡힐수록 우리는 심신을 사리며, 어둠 속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그럴수록 스스로의 재생력을 경험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렇지만 세계인들을 모두 정상 궤도 밖으로 밀어내는 코로나19 앞에서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다. 한 번 우리의 면역계와 커뮤니티 방역의 힘을 믿어보는 수밖에. 마음의 평화를 지켜내는 수밖에!

간만의 쿠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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