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성취 이후 혼란을 경험했다.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변질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뜻을 함께했던 바그너는 성취와 동시에 대중에 영합하는 예술가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니체를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나는 육이효에 놓여있는 니체를 발견했다. 육이효는 부인이 가리개를 잃은 상태로 표현할 수 있다. 부인이 ‘가리개’가 없으면 밖으로 외출할 수 없듯이, 활동을 잃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구오효와의 관계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구오는 ‘이미 성취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뜻을 함께했던 육이효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니체에게 바그너는 ‘가리개’였다. 니체는 자신이 세운 철학을 바그너가 예술로써 실현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행동할 수 있는, 그런 가리개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가리개를 잃은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육이효에서는 ‘쫓지 말라(勿逐)’고 한다. ‘쫓지 않는다는 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육오를 쫓던 그 마음을 점검하라는 뜻이다. 기제괘에서 구오는 이미 뜻이 궁색해진 것을 모르고 화려하고 과도한 제사를 지냄으로써 복을 비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성찰하지 않는 구오를 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관계를 포기하는 것, 바그너와의 관계에 미련을 갖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끊어내는 것이 필요한 때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대중의 욕망에 쉽게 변질되는 ‘예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 바그너와의 관계도 과감하게 끝을 냈다. 동시에 교수생활을 하던 대학도 떠났다. “나의 생명력이 가장 약했을 때, 나는 염세주의자이길 포기했다. 자기 회복의 본능이 궁핍과 의기소침의 철학을 금한 것이다”(니체, 『이 사람을 보라』, 1장 2절) 당시 니체의 결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되면, 7일 만에 다시 얻게 된다(七日得)고 한다. 구오의 마음을 다시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중정의 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중정의 도는 다른 게 아니다. 본래 철학을 했던, 진리를 추구하던 그 마음을 뜻한다. 그래서 구오를 쫓지 않으면, 그 마음이 다른 데에 쓰이게 되는 때(時)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니체는 다시 ‘글쓰기’라는 본래의 작업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반시대적 고찰』, 『이 사람을 보라』 등이 줄줄이 출간된다. 바그너와의 작업도 냉철하게 바라보게 되고, 그렇게 깨닫게 된 것을 모두 글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