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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클래식]하루헌(何陋軒) / 군자가 머무는데 어찌 비루함이 있으랴 – 시공간을 리모델링하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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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0-06-03 11:37 조회1,5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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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헌(何陋軒) / 군자가 머무는데 어찌 비루함이 있으랴 – 시공간을 리모델링하기 (2)



왕양명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 슬기로운 유배생활

2부 슬기로운 유배생활(1) - 군자는 어떻게 유배지와 만나는가

문리스(남산강학원)

외부성; 청년 양명의 다섯 가지 중독

  슬기로운 유배생활 두 번째는 하루헌(何陋軒)입니다. <하루헌기>를 보면 당시 양명의 모습이 부분부분 그려집니다. 저는 양명 선생이 용장에서 어떻게 생활했을까 하는 구체적인 모습도 궁금하지만,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이 글은 그런 지점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제가 놀라는 것은 양명 선생의 그릇이랄까요, 그 넓다란 품 같은 것입니다. 결코 호락호락하거나 만만한 기운이 아닌데, 깐깐하고 딱딱한 게 아니라 굉장히 유연하고 포근한 느낌마저 든달까요. 아마도 이건 양명학의 외부성과 통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왕양명에 관한 절친 담약수(담감천)의 흥미로우면서도 참고할 만한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감천(甘泉)이라는 호를 쓰는 담약수(甚若水)는 명대 학문의 큰 흐름을 만든 백사(白沙) 진헌장(陳憲章)의 제자입니다. 거칠게 말해 주자학이 주지주의적 경향으로 빠지는 데 대해 정좌(靜坐) 수행을 강조하는 학문 흐름을 제창하고 실천한 것인데, 그래서인지 양명과 담감천은 서로를 완전히 설득시키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우정을 이어가는 인연을 보여줍니다. 특히 담감천의 수처체인천리설(隨處體忍天理說; 이르는 곳에서 천리를 체득한다)은 기존의 주자학을 답습하던 학자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도전적인 테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양명도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언급한 적이 있고 일정 부분 그 성과를 긍정했습니다. 담감천은 훗날 양명의 묘지명을 쓰게 되는데 뜻밖에도 거기에서 젊은 날의 양명이 오닉(五溺), 그러니까 다섯 가지에 흠뻑 빠져있었다고 폭로(!)합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청년 양명의 은밀한 다섯 가지 중독! 임협(任俠), 기사(騎射), 사장(辭章), 신선(神仙), 불교(佛敎).

이 다섯 가지는 어느 한 가지도 평범한 유학자 집안의 청년이 즐겨 할 취미론 적절한 것이 아닙니다. 그나마 가장 이해할 만한 것은 사장 즉 시문(詩文) 같은 것일 텐데, 이조차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대부 유학자 자제라면 당연히 시와 문장을 가까이 할 거라 생각하지만, 시와 문장에 능하다는 것은 결과이지 그 자체를 위해 공교롭게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아야 하는 기예(테크닉)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학문은 경전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대부는 경세 제민하는 도를 고민하고  그에 적절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자리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서나 오경 등을 읽고 세상을 위한 글을 써야 합니다. 시문 따위(!)를 쓰는 게 아닌 것입니다. 요컨대 사장에 빠져있었다는 건 글짓기 자체에 탐닉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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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신선(도교)는 그 자체로 이단(?)이니 일단 괄호 쳐 놓겠습니다. 논의가 불가해서가 아니라,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참으로 기운이 뻗치시고 재능이 막강하시고 관심이 다양하셨구나…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실제 양명학은 불교와 상당부문 통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주자학 쪽에서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 부를 때 그 명칭은 불교에 가깝다는 멸칭입니다.

그런가 하면 도교는 중국 민간 신앙을 폭넓게 받쳐주는 고유의 신앙 체계입니다. 핵심은 일단 양생(養生)인데, 양명은 도교의 정좌 수행을 오래 경험했고 실제로 효험도 크게 보았으며 한때 크게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도교적 수행이나 삶의 감각들이 유학자들의 생활과 배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 같은 경우에는 유학이 도드라지면서 불교가 정면으로 배척되었고, 도교는 애초에 크게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게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전근대 시기 중국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기 동안 유불도 삼교가 마치 솥의 세 다리처럼 힘을 나눠가지는 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배경과는 별도로,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공식적으로 사대부 가문의 전도 앙망한 청년이 중독에 가까운 불교생활 도교 생활을 한다는 건 확실히 특이한 사실입니다. 그러니 담약수도 그걸 지적했을 거구요.

임협은 협기 즉 의협심입니다. 좋게 말하면 의기로운 청년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청년시절의 다섯 가지 탐닉 혹은 중독이라는 전체 국면에서 보면 의기롭긴 의기로운데 지나치게 의협에 빠져있었다는 뜻입니다. 지나치게 의롭다는 건 어떤 정도일까요? 우리에게도 ‘의리-‘ 하는 연예인도 있고 합니다만 좀 희화하자면 그런 겁니다. 양명의 연보 등을 보면 초년 시절에 동네 친구들과 군대 병정놀이 같은 걸 했다 하고, 또 과거 급제 후 중앙 관료로 처음 배정된 공부(工部)에서 건설 현장 부역민(!)들을 군대 병영의 조직처럼 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일관성이 있습니다. 환관 유근과 같은 인물에 저항하는 것도 어찌 보면 생래적인 반응이었을 수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의협 근육 같은 게 있어서 불의를 보면 꿈틀대는 뭐 그런 것 말입니다.

기사의 기(騎)는 말타기이고 사(射)는 활쏘기입니다. 그러니까 말타기에 능하고 활을 잘 쐈다는 뜻입니다.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상당히 왕성하고 거친 활동력에 바탕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엄청난 공을 들여야 가능한 각각의 전문분야이고 한 마디로 또 다른 ‘세계’입니다.

말을 탄다는 것은 자동차에 비견할 만하지만 사실 전혀 다릅니다. 요컨대 말의 생명성을 빼고 이동성만 놓고 볼 때 일견 가능한 비유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이해했다간 정확하게 빗나갑니다. 말은 생물입니다. 말 잘 듣고 인간에 길들여진 만만한 가축처럼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말은 예민하고 고고한 동물입니다. <걸리버여행기> 보세요,  휴이넘편을 보면 구제불능 말종 생물 인간=야후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품행방정 고고한 휴이넘=말들의 세계가 있지 않습니까.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말을 탄다는 것은 일단 말안장, 말고삐, 발걸이 등등 마구(馬具) 일체를 갖추어야 하고(매일 설치해놓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탈 때 일일이 하나하나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말과 교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활은 오늘날의 총 같은 것에 비교할 수는 있겠지만 이 역시 표면상으로만 그러합니다. 근대는 확실히 이런 면에서 경쾌(실용)하지만, 얕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중국 심양(현 선양)에 가면 청나라 건국 이전 만주족들의 성이 남아있습니다. 중원 입성 이전 만주족(정확히는 여진족)들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갔다가 큰 감동을 받았는데, 우선 특이하게도 궁 안에 팔기군영이 있습니다. 참고로 명대 자금성 안에는 입구에서 한참을 걸어가도 나무 한 그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상한 사람들의 은신처가 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주족들의 궁 안에는 각종 병장기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활, 칼, 마구 등등인데 손때가 묻고 손질이 잘 된 소중한 생활필수용품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물건들입니다.  지금 보면 그저 살생하는 병기(兵器)이겠습니다만,  <논어>나 <맹자> 등에서 보듯 활쏘기는 용맹이나 신체 수련 이전에 자기 수양의 문제와 관련됩니다. 활을 쏜 사람은 과녁에 활이 맞지 않는다고 과녁 탓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돌이켜보고 자세든 뭐든 원인을 찾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죠. 이 해결 과정은 어떤 문제를 대하는 유학의 기본 벡터이기도 합니다.

양명의 다섯 가지 탐닉은 그 자체로 외부적인 것에 대한 양명의 왕성한 호기심 혹은 저쪽에 대한 이쪽의 적극적인 유동성입니다. 저쪽은 이쪽에서 보면 외부[他者]입니다. 외부라는 건 시공간의 장[지반]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조금 쎄게 말하면 원리적으로 이 양자는 만날 수도, 섞일 수도, 건너갈 수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남입니다.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내가 그런 외부에 놓이게 되는 경우라면 어떻게든 그 시공간에 맞춰 살아가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 수동적으로 놓여서야 그렇게 길을 찾기 전에 미리 그럴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여간 해선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나마 그렇게 방향을 잡고, 그렇게 타자를 향해 길을 만들어 볼 요량을 갖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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