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종말론의 눈으로 모비딕을 읽어보면, 고래와의 결투를 클라이막스로 설정한 미국식 종말주의 분투를 새롭게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에이해브를 포함한 선원들은 모비딕을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가며 점점 고조되는 파멸의 힌트를 감지한다. 하지만 이는 에이해브를 더욱 날뛰게 만들 뿐이다. 마치 바이올린 현을 끝까지 감은 듯한 팽팽한 긴장이야말로 에이해브가 자신의 에로스적 힘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확장의 끝은 타나토스와 맞닿아있다. 상승의 선분은 점점 치솟으며 절정의 단 한순간을 위한 예비 폭탄으로 차곡차곡 쌓인다. “나는 지금 가장 높은 물마루에 도달한 바도 같은 기분일세.(같은 책, 672쪽)” 그가 만들어낸 높디높은 물마루는 그동안의 항해 과정에서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쏟아부어 세워 올린 것이다. 마침내 꿈속에서도 찾아 헤매던 모비딕을 만났을 때 창을 꽂지 않겠다는 그 최후의 고함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에이해브의 신체성은 완전한 합일을 추구하며, 합일 직전, 즉 끝에 거의 도달했다는 쾌감만이 그를 충동질한다. 에이해브가 모비딕을 정복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종말론은 신의 섭리가 현실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며 일치된 세계이기 때문에 종말이 곧 구원으로 연결된다. 작금의 현실은 사탄의 휘하에 놓여 있기에 아주 부정하고 비정상적이며, 이 때문에 지구상의 모든 것이 멸망한 뒤 세워질 천년왕국으로의 소망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종말론은 서양의 비종교인들에게도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는데, 현재를 싹 갈아 엎어버릴 이상적 세계를 상정하는 것은 그들의 사유 패턴에 있어서 기본적인 대전제다. 독일의 신학철학자 야콥 타우베스는 간단하게 정리한다. 서양 근대철학에 있어서 ‘진보’란 한마디로 세속화된 종말론이라고. 근대철학이 실패한 이유는 종말론의 불길을 꺼뜨림으로써 인간의 본질적인 진보 정신을 쇠퇴시켰기 때문이라고.
지난해 2019년 12월 28일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기해년 장자스쿨이 마지막으로 4학기 에세이를 발표하는 토요일이면서,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지구 멸망을 예고한 날이기도 했던 것이다. 운명의 그 날, 우리가 겪었던 하루를 말해보자면, 멸망의 순간은 당연히 오지도 않았거니와, 감이당에 모인 장자스쿨이 평화로운(!) 글 발표를 했으며, 왁자지껄 회식을 하고 저녁 내내 수다를 떨며 하루를 마무리했다는 것? 그 정도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토요일이 그렇게 있었던 듯, 없었던 듯 지나가 버렸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