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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클래식]우리는 대체 무엇에 승리했을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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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9-11-19 22:31 조회1,2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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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체 무엇에 승리했을까? (1)




[청년 니체] 청년과 에로스 - 1)

신근영(남산강학원)

1871년 1월 1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수백 장의 거울들과 휘황찬란한 샹들리에로 장식된 거울의 방은 희망의 열기로 뜨거워져 있었다. 드디어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격에 겨운 침묵과 환호성. 독일의 제후들은 그를 독일 제국의 첫 황제로 추대했다. 꿈에 그리던 독일이, 하나의 독일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독일, 승리에 도취되다

19세기 초, 독일은 크고 작은 제후국들로 나뉘어 있었다. 구교와 신교 사이의 갈등의 골은 깊었고,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수많은 민족들이 혼재해 있었다.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제국 같은 주변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되지 않도록 독일의 통일을 막았고, 제후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통일을 위한 국민 의회가 독일 제후국들 사이에서 열리곤 했지만, 서로 다른 이념들을 가진 계파들이 충돌하며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 독일의 통일은 요원해 보였다.

독일을 갈라놓던 장벽을 무너뜨린 것은 돈이었다. 1834년, 독일관세동맹이 맺어졌다. 제후국들 사이에 관세 없는 자유무역의 길이 열린 것이다. 자본은 제후들의 성벽을 넘어 자유롭게 흘러 다니며 분리된 독일을 하나로 묶었다. 독일은 경제 공동체로 거듭났으며, 이를 발판으로 유럽 최고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리고 이 중심에 ‘프로이센’이 있었다. 프로이센은 이후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1862년,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를 새로운 재상으로 임명한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그는 광신적인 민족주의자이자 보수주의자였으며, 좋게 말하면 남다른 카리스마와 추진력을 가진 인물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꼴통이었다. 어찌됐건 비스마르크는 탁상공론만을 일삼는 국민 의회를 참을 수 없어 했다. 독일의 통일은 연설이나 다수결이 아니라 철과 피로써만 이룰 수 있다! 비스마르크는 군비 증강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으며 유럽 최고의 군대를 만드는 일에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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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군사력을 증명할 기회를 맞이했다. 독일 통일의 첫 번째 걸림돌인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일전이었다. 프로이센 연합군은 보름 만에 오스트리아 군대를 거의 괴멸시키며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제 남은 것은 프랑스. 비스마르크는 전력을 가다듬으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다. 독일 전 지역이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연합군을 형성했고, 프랑스는 독일 연합군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유럽의 전통 강호 프랑스도 오랜 시간 군사력을 키워온 독일의 적수가 아니었다. 독일 연합군은 대승을 거두었고, 베르사유 궁전에 입성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독일제국 선포식을 가지며 통일 독일의 위용을 뽐냈다.

독일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 사건은 독일이 품고 있던 열등감을 한 방에 날려주는, 독일 국민들에게는 통쾌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동안 독일은 주변국들보다 늦어지는 통일로 끌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통일을 이룬 것이다. 그것도 유럽 문화의 중심인 프랑스를 보기 좋게 눌러버리고! 독일은 승리에 도취되었다. 국민들은 환호했고, 지식인들은 민족주의에 열광했으며, 언론들은 독일의 밝은 미래를 노래했다. 민족적 자부심과 국가에 대한 찬사로 독일은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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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스물여섯의 청년 니체에게는 모든 것이 이상하게만 보였다. 니체는 이 국민적 열광에 동참할 수 없었다. 마치 형체를 알 수 없는 유령을 붙잡고 희망에 부풀어 기뻐하는 모습이랄까. 사람들은 무엇에 열광하고 있는 것일까. 프랑스를 이겨서? 하지만 모두가 여전히 프랑스 문화를 최고로 치며 따라 하기 바쁘지 않은가. 그럼 통일 국가를 이뤄서? 허나 그것이 곧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독일이 통일 국가를 이룬 힘은 돈과 피와 철이었다. 철저하게 이익을 따지고 계산하는 능력이, 순종하고 복종하는 군인의 덕목이 승리의 비결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야말로 자유인의 삶과는 가장 먼 것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뤘다는 듯이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뿐, 정작 물어야 할 것은 묻지 않고 있다! 독일이 열광하는 그 승리라는 게 대체 뭐란 말인가.

어느 젊은이의 성공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젊은 나이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맡은 것일까? 아니면 천성에 어울리지 않는 일을 했기 때문일까? 이도 아니면 그 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1869년, 니체는 바젤 대학의 고전 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스물넷의 나이였다. 게다가 박사 학위도, 교수 자격 논문도 없었다. 그러나 대학 시절 그를 아꼈던 지도교수와 유명 학회지에 실린 니체의 논문들을 눈여겨봤던 바젤시 문부 담당자는 니체의 교수 채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니체는 필요한 논문들을 면제받았다. 오늘날 같으면 특혜 시비에 휘말리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니체는 별 무리 없이 바젤 대학에 입성했다. 스물넷의 젊은 교수, 성공한 인생이었다.

니체에게 교수직 제안은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니체는 사실 고전 문헌학을 그만둘 생각이었다. 신학자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기대를 뒤로하고 니체는 문헌학을 택했고, 그만큼 열심이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리스 고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니체는 문헌학에서 멀어져갔다. 그리스 철학은 삶을 위한, 고귀한 삶을 위한 사유들과 실천들로 넘쳐났건만, 문헌학은 죽은 문자들만을 뒤졌다. 니체는 문헌학에 흥미를 잃어갔다. 고전 문헌학은 “철학이라는 여신이 잘못 낳은 자식”, “고대 벌레와 곤충의 뒤를 쫓는 나방” 같았다.

그러나 교수직은 니체로서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공부가 인정받았다는 자부심,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줄 안정적 수입, 그리고 교수라는 이름에 따라붙는 명예. 물론 니체는 대학교수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억압적인 분위기, 무거운 책임감, 단조로운 업무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것은 더 이상 자유롭게 진리를 탐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니체는 바젤로 향했다. 그는 “속물”이 되기로 마음먹었고, 기도했다. “속물, 대중 속의 사람이 되도록 제우스여, 지켜주소서, 그리고 모든 여신도!”(크렐, 베이츠, 《좋은 유럽인 니체》, 박우정 역, 글항아리,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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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대학과 고등학교를 오가며 수업을 했다. 그는 가르치는 일을 꽤 즐거워했다. 학생들의 반응도 괜찮았다. 니체는 고전 문헌들을 살아있는 사유로 번역해 내려 노력했고, 학생들이 그것들을 잘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왔다. 어디에도 고압적인 태도는 없었으며,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를 할 때까지 기다려줄 줄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니체는 수업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는 말이 아니라 삶을 가르치고 싶었고, 직업적 수단이 아닌 고귀한 삶을 연마하는 앎를 가르치고 싶었다. 그러려면 깊이 성찰하고 탐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침 7시부터 시작되는 수업들과 세미나 지도, 거기에 단조로운 업무들까지 대학교수의 삶은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강의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저 아는 것들을 잘 정리해서 적당히 전달해 주면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니체는 그럴 수 없었다. 니체는 자신의 삶을 내버려 둔 채, 오직 입으로만 하는 강의를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니체는 아직 자신의 삶으로 소화되지 않은 지식들을 뱉어내는 자신을 보는 일이 괴로웠다. 니체는 자기모순에 시달렸고, 속물이 되는 일에 한없는 어려움을 느꼈다.

바젤에 온 지 삼 년째 되던 해, 니체의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각한 위장 장애와 불면.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때마침 철학과에 교수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문헌학이 전공이기는 했으나 니체는 고전들 속에서 철학적 사유를 훈련했고, 박사 논문도 칸트를 중심으로 한 철학적 문제를 다루려 했었다. 니체는 철학과로 자리를 옮기길 희망했다. 케케묵은 고문헌들 대신, 살아있는 사유와 진리를 철학에서는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수업에서 느끼는 괴로움도 줄어들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학계는 전도유망한 젊은 청년을 교수로 임명할 만큼 파격적일 수는 있었지만, 전공이라는 학문의 준엄한 경계까지 넘나들 만큼 유연하지는 않았다. 니체로서는 자기 내면의 그 모순들을 계속 안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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