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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사유의 토대가 흔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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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3-11-14 07:08 조회2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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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토대가 흔들리다

정 태 미(감이당 목요 대중지성)

공자께서는 ‘그림 그리는 일은 바탕을 희게 만든 후에 하는 것이다.(繪事後素[논어])’라고 말씀 하셨고 탕 임금은 자신이 매일 쓰는 세숫대야에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져라.(日日新又日新[서경][대학])’라고 새겼다. 이러한 구절들에서 삶과 공부에 변혁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공부의 변혁이란 유가의 고전인 사서와 삼경 읽는 것을 그만두고 도가의 고전인 장자, 노자를 공부하라는 말인가? 아니면 서양 철학이나 불교를 공부하라는 말인가? 하고 막연히 공부의 내용을 바꾸는 쪽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데카르트와 만난 지금, 공부에서의 변혁이란 내용이 아닌 사유의 토대를 바꾸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에 대해 의심할 수 있는 이유들을 개진한다. 그리고 이 의심은 모든 선입견에서 자유롭게 하고, 정신을 감각에서 떼어놓는 데 가장 쉬운 길을 열어준다고 말한다. 또한 내가 언젠가 학문에서 확고하고 불변하는 어떤 것을 세우길 원한다면, 일생에 한 번은 모든 것을 뿌리째 뒤집고 최초의 토대들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토대를 파헤치면 그 위에 세운 것은 모두 저절로 무너져 내리기 때문에, 곧장 내가 예전에 믿은 모든 것이 의거하던 원리들 자체를 공격할 것이라고 하였다.(『제1철학에 관한 성찰』 의심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36쪽, 37쪽) 그리고 이러한 토대를 바꾸는 힘은 참된 어떤 것을 인식하는 능력이 개체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나는 나에게 참된 어떤 것을 인식하는 힘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저 외부에서 공자가, 맹자가, 또는 장자가, 니체가 참됨을 인식한 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유방식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지금, 데카르트의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이 선입견에서 자유롭게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의심이 정신을 감각에서 떼어놓는다는 말은 의심한다. 이성뿐만이 아니라 감각에서 발생하는 의심도 선입견을 돌파하는 힘이 된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무엇을 먼저 의심해 봐야 할까? 대답은 아마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금까지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가를 탐색해야 나올 것 같다. 나는 인간이란 자연에서 가장 빼어난 기운을 얻어서 태어나고 변함없고 항상 된 나라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해왔다. 또한 그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선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수련하는 행함이 공부라고 생각해왔다. 아니, 생각해왔다고 하기보다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내가 생각한 사람이라는 존재는 현대 과학을 가지고 살펴보면 의심할 지점이 생긴다.

현대 과학에서는 존재가 한 순간도 같은 존재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몇 년에 걸쳐, 또는 며칠에, 또는 짧은 시간을 지나면서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0.001초 전의 세포와 0.001초 후의 세포가 같은 세포라도 그 세포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0.001초 전과는 다른 무질서도(엔트로피)를 갖는다. 때문에 그 세포는 0.001초 전의 세포와는 다르다. 그러니까 몸은 어느 순간도 같은 몸일 수 없음이다. 거기에 정신도 마찬가지다. 내가 예전에 좋다고 느낀 것이 지금은 싫을 수도 있고 예전에 크다고 느낀 것이 지금은 작다고 느낄 수도 있다. 더구나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명석판명하다고 생각하는 수학적 진리도 다른 생성 값을 내놓는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변함없는 나라는 몸과 마음으로 일생동안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애의 시간 전체는 무수한 부분들로 나뉠 수 있고, 그 각각의 부분들은 나머지 부분들에 어떤 식으로도 의존하지 않으므로, 내가 조금 전에 존재했다는 사실로부터 내가 지금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 만일 어떤 원인이 이 순간에, 말하자면 나를 한 번 더 창조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나를 보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실로, 어떠한 것이든 그것이 지속되는 매 순간 보존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직 현존하지 않았을 경우에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힘과 작용이 필요하다는 것은 시간의 본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들에게 명료하고, 그런 만큼 보존은 개념적으로만, 창조와 구별된다는 것 역시 자연의 빛에 의해 명백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데카르트가 말한 ‘내가 조금 전에 존재했다는 사실로부터 내가 지금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사유에 동의한다. 그 외의 내용은 조금 의심스럽다. 그렇다. 나는 그의 사유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동의한다. 이것은 데카르트를 읽기 전에 가지지 못했던 힘 있는 사유 방식을 장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멍게는 살기 좋은 환경을 만나면 머리를 땅에 박고 뇌를 소화시킨다고 한다. 그러면 멍게에게는 더 이상 예측하고 움직이기 위한 사유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훌륭한 진리를 말씀하시는 성현들을 만나서 그 진리를 받아들였을 뿐, 의심을 통한 거부나 동의를 하는 과정을 가지지 못했다. 이것은 곧 멍게가 땅에 머리를 박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텍스트에서 제시하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공부하기는 편하다. 하지만 이러한 공부 습관은 생각하지 않는 효율적 습관을 만들고 이는 또다시 같은 토대의 삶의 모습과 생각으로 나를 돌려놓는다. 그래서 토대 바꾸기를 실패하게 만들고, 내 안의 기만자, 삶의 거짓에 동의하게 만든다. 이에 예전에 믿은 모든 것이 의거하던 원리들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데카르트는 내 안에 있는 참된 어떤 것은 거짓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또 기만자가 아무리 유능하고 아무리 교활하다고 해도 나에게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도록 굳건한 정신으로 경계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이어서 그러나 이것은 고된 기획이며, 나태함은 나를 일상적인 삶의 습관으로 돌려놓는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꿈속에서 상상의 자유를 즐기던 수감자가 자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나중에 들기 시작할 때, 깨는 것이 두려워 매혹적인 환상들과 함께 서서히 눈을 감는 것과 다르지 않게 저절로 오래된 의견들 속으로 다시 빠져들고 눈뜨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고도 하였다.

지금까지의 공부는 시선이 외부로 향해 있었다. 그래서 밖에서 진리라고 하는 말들이 참됨인지, 거짓인지를 검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데카르트와 만나서 사유는 밖에 있는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참된 어떤 것을 인식하는 힘으로 의심이라는 사유와 함께 함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자님의 ‘회사후소(그림 그리는 일은 바탕을 희게 만든 후에 하는 것이다.)’도, 탕임금의 ‘일일신우일신(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져라.)’도 의심의 사유는 아니었을까? 바탕이 희지 않다는 것에 의심함이 없었다면 그림을 그리려는 기초 위에 흰 칠을 하는 행동은 없었으리라. 그리고 새로워짐이 확고부동한 진리여서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면 굳이 세숫대야에 새기고 매일매일 보는 행동도 필요 없었으리라.

 

/데카르트와 만나서 사유는 밖에 있는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참된 어떤 것을 인식하는 힘으로 의심이라는 사유와 함께 함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머리 박은 확고한 토대를 의심의 사유가 흔드는 현재, 데카르트와 함께 의심의 사유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시한부 사랑이 될 것 같다. 4학기에 스피노자를 만날 예정이므로. 아! 사랑도 존재와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변하기 마련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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