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는 ‘그림 그리는 일은 바탕을 희게 만든 후에 하는 것이다.(繪事後素[논어])’라고 말씀 하셨고 탕 임금은 자신이 매일 쓰는 세숫대야에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져라.(日日新又日新[서경][대학])’라고 새겼다. 이러한 구절들에서 삶과 공부에 변혁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공부의 변혁이란 유가의 고전인 사서와 삼경 읽는 것을 그만두고 도가의 고전인 장자, 노자를 공부하라는 말인가? 아니면 서양 철학이나 불교를 공부하라는 말인가? 하고 막연히 공부의 내용을 바꾸는 쪽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데카르트와 만난 지금, 공부에서의 변혁이란 내용이 아닌 사유의 토대를 바꾸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에 대해 의심할 수 있는 이유들을 개진한다. 그리고 이 의심은 모든 선입견에서 자유롭게 하고, 정신을 감각에서 떼어놓는 데 가장 쉬운 길을 열어준다고 말한다. 또한 내가 언젠가 학문에서 확고하고 불변하는 어떤 것을 세우길 원한다면, 일생에 한 번은 모든 것을 뿌리째 뒤집고 최초의 토대들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토대를 파헤치면 그 위에 세운 것은 모두 저절로 무너져 내리기 때문에, 곧장 내가 예전에 믿은 모든 것이 의거하던 원리들 자체를 공격할 것이라고 하였다.(『제1철학에 관한 성찰』 의심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36쪽, 37쪽) 그리고 이러한 토대를 바꾸는 힘은 참된 어떤 것을 인식하는 능력이 개체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나는 나에게 참된 어떤 것을 인식하는 힘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저 외부에서 공자가, 맹자가, 또는 장자가, 니체가 참됨을 인식한 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유방식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지금, 데카르트의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이 선입견에서 자유롭게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의심이 정신을 감각에서 떼어놓는다는 말은 의심한다. 이성뿐만이 아니라 감각에서 발생하는 의심도 선입견을 돌파하는 힘이 된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무엇을 먼저 의심해 봐야 할까? 대답은 아마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금까지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가를 탐색해야 나올 것 같다. 나는 인간이란 자연에서 가장 빼어난 기운을 얻어서 태어나고 변함없고 항상 된 나라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해왔다. 또한 그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선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수련하는 행함이 공부라고 생각해왔다. 아니, 생각해왔다고 하기보다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내가 생각한 사람이라는 존재는 현대 과학을 가지고 살펴보면 의심할 지점이 생긴다.
현대 과학에서는 존재가 한 순간도 같은 존재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몇 년에 걸쳐, 또는 며칠에, 또는 짧은 시간을 지나면서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0.001초 전의 세포와 0.001초 후의 세포가 같은 세포라도 그 세포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0.001초 전과는 다른 무질서도(엔트로피)를 갖는다. 때문에 그 세포는 0.001초 전의 세포와는 다르다. 그러니까 몸은 어느 순간도 같은 몸일 수 없음이다. 거기에 정신도 마찬가지다. 내가 예전에 좋다고 느낀 것이 지금은 싫을 수도 있고 예전에 크다고 느낀 것이 지금은 작다고 느낄 수도 있다. 더구나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명석판명하다고 생각하는 수학적 진리도 다른 생성 값을 내놓는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변함없는 나라는 몸과 마음으로 일생동안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