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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나는 애매모호하고 끊임없이 흘러간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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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3-11-07 10:18 조회2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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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매모호하고 끊임없이 흘러간다, 고로 존재한다

서 재 순(목요 감이당 대중지성)

시들지 않는 꽃

조화(가짜)와 생화(진짜)를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든 꽃잎을 찾아보는 거라고 한다. 그 말 때문인지 시든 꽃잎까지 포함된 조화가 나왔고, 질감도 실제 꽃잎과 거의 비슷해서 만져보면서도 ‘이게 생화야? 조화야’ 고개를 갸우뚱했던 적이 있다. 시들지 않는 꽃! 반갑지 않다. 부담스럽기도 하다. 사회 초년생 때 사무실에 누군가 국화를 가져온 적이 있는데 어찌나 시들지 않는지 버릴 수 없었고 늘 보고 있자니 지루했다. 유머가 잘 통했던 입사 동기와 나는 국화를 보면서 농담을 했다. “국화 같은 사람..하면 욕이다, 욕. 우리, 국화 같은 사람은 되지 말자.” 함민복 시인의 산문 중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평생 강화에 살던 어떤 사람이 동해 쪽으로 이사를 했는데 처음에는 서해보다 웅장하고 푸르고 깊은 동해가 멋져 보였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크지 않아, 아침이고 저녁이고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은 동해가 벽처럼 느껴지면서 답답했다는 것이다. 바다에 살아본 적이 없는 나는 그 사람이 가졌다는 답답함을 느껴본 적은 없지만 짐작은 간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하지만 사랑이야말로 변해야 하는 거 아닐까? 다섯 살 아이를 사랑하는 방식과 열다섯 아이를 사랑하는 방식이 같으면 열다섯 아이는 숨이 막힐 테니까. 물론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는 말에서의 사랑은 방식이 아니라 마음 또는 내용이겠지만 때로는 방식이 내용이나 마음을 지배하기도 하니 방식도 분명, 사랑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명석판명? 확실함?

데카르트를 읽으면서 (내용은 파악 못하고 글자만 읽었지만) 가장 걸렸던 단어는 “명석판명” 이란 말이었다. 물론 이 말은 데카르트 철학뿐 아니라 철학 전반에 쓰이는 말이라고 한다. 명석판명이라..! 2+2=4이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다. 평행선은 만나지 않는다.라는 식의 명석판명한 사실들로만 이 세상이 구성돼 있다면 동해에 살게 된 강화 사람처럼 답답하지 않을까? (물론 내가 명석판명한 것과 불변하는 것을 혼동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만 할 뿐 뭘 어떻게 헛갈리는지 혼동의 내용은 명석판명하게 규명할 수 없으므로 혼동한 채로 글을 이어갈 수밖에 없겠다.)

학교 졸업하자마자 우리 팀에 합류한 후배 A가 있었다. 밤에 일을 해야 해 우리는 매일 함께 저녁을 먹었는데 그전의 20대 여성 후배들은 밥을 반 공기 정도만 겨우 먹은 반면, A는 한 공기를 싹 비웠다. A는 일도 잘했지만 먹는 것으로도 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고기를 먹고 밥을 볶을 때 두 공기와 세 공기 사이에서 망설이면 누군가는 꼭 이렇게 말했다. “세 공기 볶아야지. A가 있잖아” 그러면 모두 웃으며 동의했다. 20여 년이 흐른 후, A와 밥을 먹으며 왜 이렇게 양이 줄었냐니까 그녀가 말했다. 자기가 먹는 걸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팀 사람들이 자기가 많이 먹는 걸 매우 좋아해서 양이 찼을 때도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먹었다는 것이다. A는 우리 팀 사람들에게만 ‘잘 먹는 A’ 였는지 모른다.

B라는 후배는 교회 오빠를 좋아했다. 수련회 갔을 때 리더십이 강하면서도 팀원들을 자상하게 배려하는 모습에 반했다. 특히 사람들이 이리저리 주차해 놓은 차를, 키를 받아 일렬로 정돈했을 때 B는 교회 오빠에게서 후광을 보았다. 오빠도 B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둘은 사귀기 시작했지만 길게 가지 못했다. 교회 오빠가 아니라 남자친구가 되자 리더십과 자상함과 배려심이 있던 자리에 징징거림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오빠는 다른 사람에게는 여전히 리더십 있고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일 것이다. B와의 ‘관계’가 달라지자 다른 모습, 어쩌면 진짜(?) 자신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A와 그 당시 팀원들, B와 교회 오빠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는 평생 겪고 사는 것 아닐까? 그러면서 그렇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또 하나의 사소한 예는 다음과 같다. 20년 전 캐나다로 이민 간, 한국에 일이 있어 10개월 정도 함께 살게 된 언니는 발에 뭔가를 바른 후 슬리퍼를 신지 않고 다니는지 거실 바닥에 얼룩이 지는데 젊어서는 라식을, 몇 년 전에는 백내장 수술을 해서인지 어떨 때는 가까운 데가 안 보이고 어떨 때는 먼 데가 안 보인다고 한다. (어떨 때가 어떤 때인지는 신만이 알 것 같다.) 어쨌든 자신이 낸 거실 발자국을 못 본다. 그렇게 깔끔하지도 않은 나는 그 발자국이 거슬린다. 그래서 ‘내가, 내가 아는 것보다 깔끔한 사람이었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같이 살게 된 언니 말고 다른 언니의 딸인 조카가 5년 만에 캐나다에서 한 달 일정으로 왔다. 그 아이는 언니보다 더 했다. 샤워를 하고 온몸에 로션을 바르고는 수건만 두르고 나와 거실 바닥에 엉덩이로 앉아서 조잘거린다. 조카가 일어나면 바닥에 언니 발자국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넓은 면적이 번들거리는데 거슬리기는커녕 귀엽다. 나는 결국 번들거리는 바닥이 거슬린 게 아니라 언니(와 그 주변부, 또는 언니와의 관계)가 거슬렸던 것이다. 조카가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다.

그런 일들은 대상이 없어도, 혼자서도 일어난다. 어렸을 때는 누가 돈을 줘도 먹고 싶지 않았던 마늘장아찌나 청국장을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다. 그때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사랑이 아니었던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때, 그와 다투고 헤어진 일이, 꼭 붙고 싶었던 시험에서 떨어진 사건이, 믿었던 사람에게 당한 배반이, 이 길을 걷지 않고 저 길을 걸은 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내 인생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는지 내가 알 수 있을까? 나를 거슬리게 한 것이 언니인지, 언니 발자국인지, 언니에 대한 내 마음인지도 모르는 내가? 나는 이렇게나 불확실하고 명석판명과는 거리가 멀다.

남의 사유 위에서

내가 안다고 지껄였던 그 많은 말들을 내가 정말 알고 한 것일까?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내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일까? 내 가치관이나 세계관은 내가 선택한 것일까? 내 취향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그 단초가 내 내부에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어디선가, 누구에겐가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내가 스스로 알아내고 느낀 것처럼, 내 생각인 것처럼 말했고, 내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선택했고 내 취향으로 삼았다. 물론 내 안의 ‘인’과 남의 사유라는 ‘연’이 만난, 시절 인연의 결과일 것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도 그렇게 탄생한 건 아닐지..라고 이, 진지한 감이당 분위기에서 해도 될는지 자신이 없지만 일단 써본다.

내가 안다고 지껄였던 그 많은 말들을 내가 정말 알고 한 것일까?

어쨌든 수학적 사실 말고 마음 또는 관계에는 명석판명함이나 확실함이 거의 없다는 게 나는 솔직히 안심이 된다. 나의, 그리고 우리의 마음 또는 관계가 지금 이대로 멈추거나 여기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안심이다. 나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애매모호하고 끝없이 흘러감으로써 존재함을 느낀다. 지금은 이렇지만 바로 1분 뒤에는 어떤 모양새일지 알 수 없다. 시들지 않는,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확실한 꽃이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다. 나는 行者다. 적어도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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