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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처음처럼? 아니, 처음부터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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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3-10-31 06:56 조회1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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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아니, 처음부터 다시!

깨 비(토요 글쓰기학교)

니체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그야말로 영원에 걸쳐서 물릴 줄 모르고 처음부터 다시라고 부르짖는다.’(프리드리히 니체,<선악의 저편>, 아카넷, 134)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도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영원히 반복해서 겪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만이 아니라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들까지가 다 포함된다어쩔 수 없어서 받아들이는 반복이 아니다니체는 있는 그대로 다시 겪겠다고 스스로 외치고 있다니체의 저 넘치는 자신감과 건강함이 놀랍고 부럽다어떻게 하면 니체처럼 처음부터 다시를 외칠 수 있을까?

무한 긍정은 완전한 부정에서부터

나처럼 어떤 수수께끼 같은 갈망을 가지고 염세주의를 그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사유하면서염세주의를 마침내 금세기에 쇼펜하우어 철학의 형태로 나타났던반쯤은 그리스도적이고 반쯤은 독일적인 편협함과 순진함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랜 동안 노력해왔던 사람아시아적이거나 초아시아적인 눈으로 온갖 사고방식들 중에서 가장 세계 부정적인 사고방식의 정체를 ? 부처나 쇼펜하우어처럼 도덕적인 속박이나 망상에 사로잡혀서가 아니라 선악의 저편에서 ? 꿰뚫어보고 그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내려다본 사람은 아마도 이로 말미암아 전혀 의도치 않게 정반대의 이상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니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영원히 있는 그대로 다시 겪어 내겠다는 무한 긍정을염세주의로부터 터득했다세계와 인생은 어떤 의미도 없이 그저 덧없이 소멸해 간다인간 삶의 밑바탕에 깔린 삶의 허무는 인간 사회의 중요한 테마이다니체 외에도 염세주의를 탐구했던 사람들은 많다.

종교도 삶의 허무함을 극복하고자 했던 노력의 산물이다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종교는 주로 염세주의를 부정하는 쪽으로 극복의 방향을 잡았고이 점에서 니체와 다르다덧없는 삶에서 어떻게든 생의 의미와 목적을 만들어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가는 방식이 종교다니체는 그런 종교를 인간이 염세주의적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창조한 최고의 예술품 중 하나라고 했다.(위의 책, 139)

최고의 예술품이기는 하지만 니체는 종교를 통해서는 염세주의를 근본적으로 극복하지는 못한다고 보았다염세주의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종교는처음에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궁극에는 스스로가 목적이 된다종교가 목적이 되는 순간삶은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도되고삶의 고통은 내세를 위해 견뎌야 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다결국 삶의 근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멀어진다.(위의 책, 139쪽 참고)

또 선악으로 상징되는 도덕의 경우도 확실한 의미목표를 설정한다는 면에서는 신을 내세우는 종교와 유사하다굳이 종교나 도덕 등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원리도 염세주의를 극복하는 방식과 비슷하다어려운 시련은 의미를 부여해야 겪어나갈 수 있다성숙한 삶을 위해 거쳐야 할 과정성장을 위한 아픔 등이 그 의미이다언뜻 보기에는 부정적 세계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보이지만이 역시 니체의 무한 긍정과는 다르다.

대입을 위한취업을 위한 공부를 하면서 겪는 불안하고 힘든 시간들도 지나고 보면 삶에서 나름 의미가 있었다 할 수 있다하지만 그 일은 처음부터 다시를 외칠 수가 없다의미가 있다고 해서 그 과정을 고스란히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더 좋은 대학더 좋은 직장을 위해 그 길을 다시 걷는 사람들은 있다하지만 그건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하고 가는 또 다른 길일 뿐이다.

삶의 허무와 극복의 양상들을 두루 꿰뚫어 본 니체는 염세주의로부터 완전한 해방이 되려면 무언가를 덧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허무한 삶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고 결론짓는다삶이 원래 그렇게 덧없는 것이라면 그 삶에 대해 가치 판단 없이선악의 저편에 서서덧없는 그대로 온전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삶이 원래 그렇게 덧없는 것이라면 그 삶에 대해 가치 판단 없이, 선악의 저편에 서서, 덧없는 그대로 온전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롯이 지금 여기

그렇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어떻게 무한 긍정으로 이어질까일단 지금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줄 목적이나 지향이 애초부터 없다는 걸 완전히 인정하게 되면 남는 건 삶 자체밖에는 없다이 삶을 그대로 사는 것밖에는 기댈 데가 없다그렇게 되면 지금여기의 시간 전부가 다이기 때문에 지금여기 자체가 목적이자 의미이자 모든 것이 된다.

고전 글쓰기 공부는 입시 시험이나 취업 준비학위 취득과는 다르다고전 글쓰기 공부도 처음에는 대개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어좀 더 좋은 삶을 살고 싶다는 포부를 가지고 시작하게 된다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한 중간 과정으로 책을 잘 읽어 내고조금씩 더 나아지는 글을 쓰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며그것이 어려운 수련 과정일지라도 감수하겠다는 마음을 기꺼이 낸다.

그런데 공부하는 기간이 쌓일수록 깨닫게 된다쌓인 시간만큼 책을 더 잘 읽게 되지 않는다글쓰기는 더 말할 것도 없다그동안 니체를 여러 번 읽고 써 왔지만마감을 앞둔 늦은 밤까지 계속 글을 엎으면서 이렇게 헤매고 있는 걸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그러니 니체를 통해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건 더욱 언감생심이다물론 가끔씩 가다가 내가 예전보다는 그래도 여러 모로 좀 괜찮아지지 않았나하는 착각을 하는 순간들이 있기는 하다하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금세 아니라는 걸 공부의 현장과 일상은 따박따박 냉정하게 일러준다.

그런데 또 신기하다이렇게 힘들게 읽고 쓰고 늘 깨지고그러면서 나아지는 건 없고지금까지로 보아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충분히 짐작이 되는데이런 마음 장 위에서는 공부를 그만 두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정말 처음부터 다시 다음 강좌다음 년도 공부를 신청한다.(물론 니체가 외치는 처음과는 격이 다르다.) 오히려 이 공부를 계속해야 하나말아야 하나라는 고민은 언젠가는 더 좋은 글지금보다는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지향이 올라올 때 하게 된다.

그냥 관성으로 좀비처럼 남산에 다니고 있어서가 아닌가 의심을 해 본 적도 있지만읽고 쓰는 공부가 자학적인 좀비가 그것도 오랜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니체의 말처럼 읽고 쓰고 나누는 일을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가능한 게 아닐까 싶다책에서 읽은 내용을 글로 표현하고 싶고수업 시간에 새로 깨달은 걸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공부에서 생명력이 가장 넘치는 때가 아닐지그런 상태일 때는 과정 중에 좀 힘든 부분들이 있어도 만족하고 화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아이처럼 여가처럼 대수롭지 않게

니체의 처음부터다시가 힘차고 멋있기는 하면서도저 위 가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는 외침이라고만 여겨졌었다그리고 처음처럼다시의 상징적인 존재, ‘아이처럼도 어려웠다이미 아이가 아닌데 어떻게 아이가 될 수 있나어떻게 아이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건지 접근 경로를 찾기가 어려웠다그런데 위에서 말한 고전 공부 말고도 니체가 일러주는 더 보편적인 예가 있다삶의 일정 부분에서는 매일 똑같은 소꿉놀이를 지치지 않고 하는 아이처럼 살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노동과 대비되는 여가가 어른들에게는 아이처럼 되는 순간이다.

나에게도 산에 가는 건 좋아서 가는 거 말고 다른 목적이 없다매번 올라갈 때마다 죽도록 힘들지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100대 명산 등의 타이틀도 목표인 거 같지만 사실 이 산 저 산 다니려는 핑계이다. 100대 명산이 목표였다면하고 난 다음엔 산에 갈 필요가 없을 텐데 주변에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보상을 떠올려 본 적도 없지만 굳이 누가 묻는다면 오로지 산에서 있었던 그 시간들이 보상이라면 보상이다그래서 언제든 바닥부터 다시 오를 수 있다.

아이처럼이 이렇게 여가처럼과 통하는 것이라면이제 여가로만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여가처럼 살아갈 것인가의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노동을입시 공부를취업 준비를 어떻게 여가처럼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그렇다면 이나 와 같은 가장 장엄한 개념들즉 그것들을 위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싸워왔고가장 많이 고통을 받았던 전쟁과 고난을 초래했던 개념들도 아마도 언젠가는 노인의 눈에 비친 아이의 장난감이나 고통처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그때 노인은 아마도 새로운 장난감과 고통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그는 여전히 아이이며영원한 아이인 것이다! (위의 책, 135)

 

니체는 이제까지 인간이 무겁고 엄숙한 개념들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 왔지만그런 상태로는 삶을 제대로 직면할 수 없다고 보았다인생을 거쳐 오면서 노인이 장착한 지혜의 핵심은 대수롭지 않음이다지혜로운 노인은 영원히 아이처럼 산다지금 가지고 노는 장난감놀이 외에 대단하거나 중요하게 여길 것이 없다따로 품고 갈 뜻도 목표도 없다그래서 노인의 눈에는 세상이 아이 장난감처럼 가볍다고통마저도 그렇다.

 

 

 

우리는 생활이 흐트러지고 중심을 잃었을 때 처음처럼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나가겠다고 다짐했던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그런데 지혜로운 노인이라면 처음처럼이 아니라늘 그냥 있는 그대로 처음부터다시를 외칠 것이다인생의 각 과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결과나 목표를 다 떠나 그냥 매 순간이 전부인 듯이 살기는 쉽지 않다그래도 처음처럼이 떠오를 때, ‘처음부터다시를 외쳐 보는 것부터는 해 볼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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