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바라문이 수행승을 지켜보면서 사소한 것 하나하나씩 수행자의 편의를 챙기면서 자신의 업의 때를 제거한 인연담이 있다. 수행승이 가사를 걸치는데 옷자락이 풀에 닿아 이슬에 젖는 것을 본 바라문은 삽을 가져와서 탈곡할 마당처럼 깨끗이 만들었다. 다음 날 그 장소에 와서 한 수행승이 가사를 걸치는데 이번에는 옷자락이 땅에 닿아 흙먼지에 끌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다음날 그 장소에 모래를 깔았다. 어느 날 식전에 폭염이 덮쳐서 수행승들이 가사를 걸칠 때 땀이 몸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그 장소에 천막을 지었다. 또한 비가 올 때 가사가 비에 젖는 것을 보고, ‘여기에 회당을 지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회당을 지었다. 회당을 짓고 축성식을 할 때 수행승과 부처님을 초대하고, 회당을 짓게 된 연유를 부처님께 말했다. 그리고 부처님은 현명한 자는 조금씩 조금씩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해나가고, 점차 자신의 악하고 불건전한 업의 때를 제거한다고 말했다.
섬세하게 수행승을 살피며 점점 공덕을 짓는 바라문의 인연담을 보면서 나의 관계를 되돌아보았다. 그동안 나는 남을 잘 배려하고, 문제없이 사람들과 잘 지낸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니 잘 지낸다는 의미는 내가 피곤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거리 유지였다.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동료들과 소통할 때는 빠르고 간결하게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만 했고, 사적인 대화는 점심시간 외에는 거의 하지 않았다. 결혼 생활 또한 효율적인 소통을 중요시 생각해 서로의 스케줄을 구글 캘린더로 공유했고, 집안일은 더 꼼꼼한 남편의 몫이었다. 각자의 라이프를 존중한다면서 남편의 술 약속을 크게 상관하지 않았고, 나는 일과 공부에 집중했다. 존중이라고 포장된 마음은 ‘나 빨리 가야 하니깐, 방해하지 마’라는 이기심이었다.
관계 또한 자본의 논리인 효율성의 연장선으로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경주마처럼 내 앞만 바라보면서 옆에 있는 사람을 경쟁 상대 아니면 걸림돌로 여긴다. 오직 나의 세계에 갇히는 것이다. 올해 공부를 시작한 이유 중 하나는 아이를 낳고서도 다른 사람의 말이나 사회에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앎을 중심으로 삶을 꾸리면 평안해질 것이고, 자연스럽게 남편도 궁금해하면서 언젠가 따라올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너무 급했고, 그에게 남겨준 건 공허함과 쓸쓸함이었다. 그동안 남편과 함께 즐겼던 콘서트, 쇼핑, 맛집 투어는 이제 시시하다고 생각했고, 남편이 ‘영화 볼래?’ ‘쇼핑 갈래?’ 했을 때 ‘숙제해야 하는데’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처음에 열심히 공부하라고 응원했지만, 점점 멀어져가는 나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헤어질 결심을 했다. 가장 가까이서 함께 가정을 이뤄야 하는 남편을 쏙 빼고 나 혼자 달려간 것은 정작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모르는 어리석은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