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우리 사고의 날것 버전인 야생의 사고는 세계 전체를 ‘동시’ 속에서 파악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무궁무진하면서도 유한해진다. 야생의 사고는 그 유한한 물질들을 분류할 수 있는 데까지 분류하고, 만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질서 짓겠다는 광대한 포부를 가진다. 기본 공식은 ‘이항대립’. 왼쪽과 오른쪽, 여자와 남자 등으로 대립시켜 질서를 만든다. ‘위와 아래’ 정도의 추상적인 대립에서 페커리 야생돼지와 카에테투 야생돼지처럼 구체적인 대립까지, 무수한 기준으로, 무수한 관계 속에서, 무수한 대립이 가능하다(“하나의 사물은 무한히 많은 사물들”일 수 있다). 이론상으로는 모든 것을 분류할 수 있지만, 새로운 사물을 만나면 야생의 사고는 다시금 열심히 활동해야 한다. 새로 만난 사물까지 ‘세계’에 포함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질서는 재조정되며 ‘세계 전체’의 그림은 조금 움직이게 된다.
이 세계는 질적 변화가 불가능하다. 매번의 재조정, 균형 잡기를 통해 세계 전체가 계속 유지되기 때문이다. 어떤 새로운 사건이나, 새로운 사물 혹은 생명을 인식하게 되면 야생의 사고는 그것까지 품는 전체-질서를 구상한다. 모든 것을 한 평면 위에 펼쳐놓고 질서화하는 것이다. 야생의 사고가 사용하는 체계 중 하나인 ‘토템’은 유한한 동식물종과 유한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매개해 문화와 자연에 대해 설명한다(이야기를 만든다). 자연과 인간은 같은 평면의 평행한 두 계열로 여겨진다.
변증법적 사고는 야생의 사고와는 완전히 다른 시간 축을 쓴다. 매번 힘써 조정해서, 매번 같은 세계의 반복이라니, 이것은 힘 낭비가 아닌가? 변증법적 사고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의 선분 위에 놓고, 과거보다 진보한 현재, 현재보다 나아질 미래를 그린다. 역사 속에서 자연과 인간은 하나의 계열로 합쳐지며(정확히는 자연이 인간의 역사 속에 포섭되며) 연속적 진화를 향해 나아간다. 일어나는 사건들, 생겨나는 사물들은 하나의 인과 속에서 연속을 이룬다.
문화는 인간의 사고를 이런 방식으로 길들였다. 우리는 계속 진보한다. 어떻게? 나와 부딪히는 타자를 만나, 나와 타자 양쪽 모두를 넘어서는 진보한 존재가 되는 것으로. 인간은 세계와 적대하며 진보를 이뤄가고, 이 선분은 끝없는 역사가 된다. 과거는 현재의 나를 구축하는 것, 미래는 현재의 나를 극복하여 도달되는 것. 따라서 우리는 진보한다. 현대인들이 야생의 사고를 (어느 정도) 포기하고 변증법적 사고를 시작하며 얻게 된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균형대신 진보, 무한한 관계 대신 무한한 대상.
#야생의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