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궁금하다!] 토테미즘은 인간을 생각한다 > MVQ글소식

MVQ글소식

홈 > 커뮤니티 > MVQ글소식

['인간'이 궁금하다!] 토테미즘은 인간을 생각한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2-01-08 15:47 조회673회 댓글0건

본문



토테미즘은 인간을 생각한다
이윤하(남산강학원)

1. 신화의 전경

레비-스트로스가 20여년을 몰두해 연구했다는 남북아메리카의 신화들은 인간과 자연의 드라마다. 신화를 현대의 이야기들과 (비교가 가능하다면) 비교했을 때, (물론 너무 많은 것이 다르지만)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들의 스펙트럼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이야기가 ‘인간’과 ‘인간’ 사이, 혹은 ‘인간’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라면, 신화에서는 구체적인 동물, 식물들과 인간이 섞여 동등한 요소로 등장한다. 신화에서 자연은 인물이 등장하는 배경이 아니다. 야생돼지, 개구리, 거북이, 벌새, 리아나 덩굴, 옥수수, 플레이아데스 성단, 무지개… 동물부터 기상현상까지 모든 것이 맞물려 하나의 전경(前景)을 만든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이러한 신화의 이야기 방법론을 ‘토테미즘’으로 설명했다. ‘토테미즘’은 흔히 동물 숭배 정도로 여겨지지만, 레비스트로스가 보여주는 토테미즘은 인간이 자연과 관계 맺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 방법론을 따라가다보면, ‘인간’에 대한 표상도 흔들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연과 어떻게 만났는지를 들여다보자. 자연이라곤 창가 화분의 식물(그마저도 무슨 종인지 모르는), 여러 무늬의 길고양이 정도를 만나는 21세기 도시-인간은 무엇들과 전경을 만들어갈 수 있는지도 생각해보자.

doruk-yemenici-M7Qzh_PD2mM-unsplash신화에서 자연은 인물이 등장하는 배경이 아니다.

2. 토테미즘의 변환 능력

토템적이라고 주로 일컫는 명명이나 분류체계의 활용가치는 그 형식적 특성에서 오는 것이다. 그 체계는 부호로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합한 것이고 그 메시지는 다른 코드로 변환될 수도 있으며 또한 다른 코드에 의해서 받아들인 메시지를 스스로의 체계로 표현할 수도 있다. 과거 인류학자의 잘못은 이 형식을 어떠한 내용이라도 동화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실체로 보아 일정한 내용과 결부시키려고 한 데에 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한길사, p142)

토테미즘은 원시 사회 사람들이 명명하고 분류하는 양식 중 하나다. ‘토테미즘에 따르면 다람쥐 부족은 곰 부족보다 위계가 낮다’ 따위의 내용이 ‘토테미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약간의 오류다. 다람쥐 부족과 곰 부족의 관계가 어떠한지 실체적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 간의 ‘관계’를 설정한다는 것에 토테미즘의 필요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연구한 부족 사람들은 주로 동물과 식물의 종을 부호로 신화의 메시지를 짰다. 동식물들은 기호일 뿐, 그 자체가 실질적 내용을 갖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가능해지는 것은 ‘코드 변환’. 무엇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신화의 표면은 지금 자연현상들의 유래를 설명하는 데에 그치는 것 같지만, 그 메시지는 사회 윤리 코드, 의례 코드로 변환될 수 있다. 토테미즘의 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음식 금기’가 그런 코드 변환의 대표적 예시다.

예를 들어 ‘쥐는 사람들이 손에 쥔 채로 씻고 있는 카사바도 뺏어간다’와 ‘어린 아이, 특히 여자아이는 쥐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도둑맞을지도 모르기 때문에)’가 ‘쥐’라는 부호를 통해 토테미즘 해독격자 안에서 연관되는 것이다. 자연사적 지식과 사회적 윤리가 맞붙는다.

이들이 중요한 사고방식으로 채택하고 있는 ‘토테미즘’의 핵심은 이렇게 자연과 문화를 중개하는 데에 있다. 여기가 (<‘인간’이 궁금하다> 첫 번째 편에 썼던) 마음의 ‘0공간’이 등장할 곳이다. 하나의 기호는 메타포로서, 우리 마음에 ‘0공간’을 만들어 자연과 문화가 손잡게 해준다. 토테미즘을 변환 체계로 쓰는 신화는 하나의 시(詩)고, 거대한 은유체계다. 자연현상을 해명하는 것도, 문화현상을 합리화하려는 것도 아닌, 자연과 문화 사이, 불합리(프레이저)와 상식(말리노프스키) 사이에 있는.

jeremy-bezanger-knjzvCAYB_w-unsplash이들이 중요한 사고방식으로 채택하고 있는 ‘토테미즘’의 핵심은 이렇게 자연과 문화를 중개하는 데에 있다.

3. 인간‘을’ 생각한다

 

원시 사회 사람들의 이런 인식을 ‘임의적’인, 혹은 ‘인위적인’ 것이라고 (쉽게 말해 미신이라고) 치부해버리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아무 금기나 만드는 것이 아니고, 아무 생각이나 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자연의 일부로서 사고하고, 토테미즘을 통해 자연을 사고 가능한 것들로 변환시킨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자연은, 문화는 어떤 것일까? 또 이 대립을 중개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과 자연환경의 관계는 환경이 인간적인 수준에까지 높여지면서 비로소 이해 가능하게 되는데 그 관계는 여전히 사고의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은 그 대상을 결코 수동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며 그것을 개념화한 후 다시 골고루 혼합하여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낸다. 그 체계는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며 상황이 같다고 하더라도 체계화될 수 있는 방식은 여러 가지인 것이다. 만하르트와 자연주의 학파의 잘못은 신화가 해명하고자 하는 대상이 바로 자연현상이라고 믿었던 데에 있다. 오히려 자연현상이란 신화가 설명하고자 하는 사실─자연적 사실이 아닌 하나의 논리체계─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같은 책, p163)

사람들은 자연 그 자체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설명하고, 만들고자 한 것은 ‘논리체계’다. 토테미즘은 자연을 의인화한다. 의인화된 자연물들 간의 관계를 사고하고, 자연물 간의 관계를 인간 사회의 관계 위에 오버랩시켜 구별된 자연물처럼, 인간 사회도, 사회 안의 인간들도 구별시킨다. 신화의 논리체계 안에서 자연과 문화는 동등한 재료라고 할 수 있다.

지난주에도 썼듯, 신화적 사고 안에서는 자연과 문화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해석되지 않은 그 자체의 자연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여기에서 인간의 위치는, 순전히 자연을 해석하는 자가 아니다. 인간은 토테미즘에 의해 동물들과 상호 변환이 가능한 요소, 신화적 사고에 의해 자연과 함께 사고되는 요소다. 쓰려고 할수록 문장이 꼬이는데, 인간은 신화적 사고에 의해 자연과 동등한 평면에서 사고되면서, 동시에 인간은 그 사고를 통해 ‘인간’의 윤리와 ‘인간’의 정체성, 문화를 만들어낸다.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연을 해석-창조하면서, 또 그 자연에 의해 해석되는 문화 위에 산다. 반면 21세기 도시-인간은 자기를 전경으로 다른 것들을 배경으로 만들며 산다. 결국 자연은 화분의 식물과 길고양이뿐 아니라, 자기 아닌 모든 외부라고 할 수 있다. 도시-인간은 외부를 해석-창조하기 위해서, 또 외부에 의해 해석-창조당하기 위해서 좀 더 열려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문의 열쇠는 (신화적 사고에 따르면) 다른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집요한 관찰, 차이를 구별하는 섬세한 감각에 있다.

 

#토테미즘

robert-lukeman-_RBcxo9AU-U-unsplash신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연을 해석-창조하면서, 또 그 자연에 의해 해석되는 문화 위에 산다.  
logo-01.png
 

 

▶ 배너를 클릭하시면 MVQ 홈페이지에서 더 많은 글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