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문에서 ‘과학자’라고 말하고 있는 ‘근대 과학자’ 엔지니어들이나, 브리콜뢰르들이나 모두 세계를 알고자 한다. 우리는 그중 전자의 방법에 익숙하다. 엔지니어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우주에게 질문한 뒤 대답을 요청한다. 우주가 오늘 해준 답과 어제 해준 답이 다르다면, 그는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내일도 반복되는 말이 엔지니어가 찾는 메시지다. 그것이 우리가 책에서 배우는 물리법칙들, 공식들(=‘개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구조 삼아 우주 전체를 해석해내는 것이 엔지니어의 과학이다. 그 과정에서 구조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과학적 대상’에서 탈락되기도 한다.
이에 비해 브리콜뢰르의 ‘메시지 탐구’는 묘한 구석이 있다. 엔지니어가 개념을 통해 우주를 ‘열고’ 그 안의 진리를 발견해낸다면, 브리콜뢰르는 우주를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져온 이야기 속의 기호들과, 지금 자리에서 길어 올린 기호들을 가지고 말이다. 그러니까 브리콜뢰르는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주에게 묻지 않고, 변하지 않는 답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확대’도 ‘경신’도 없이 우주를 재구성하는 것이 그가 찾는 ‘메시지’다. 신화는 매번 창작한다. 하지만 매번 같은 것, 세계 자체를 창작한다. 여기에서 ‘이해한다’는 것의 우리의 표상이 뒤집어져야 한다.
우리는 ‘과학적’ 이해란 대상을 두고, 그 대상 안에 있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신화는 과학적 이해의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이 ‘이해하기’는 묻고, 답을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대화하는 자가 되는 것에 가깝다. 열 번째 추장을 둔 표범부족이 이해하는 우주는, 열한 번째 추장을 둔 표범부족이 이해하는 우주와 다르다. 우주는 같은 우주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면면은 죽음과 탄생, 파괴와 생성으로 매번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 (같은 말이지만) 메시지를 구성하는 자의 자리에 따라 만나게 되는 우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리콜뢰르의 ‘세계 이해하기’는, 다시 말해 세계와 관계 맺는 법에 대한 탐구다. 내가 이 자리에서 우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내가 이 세계에 어떻게 발을 디디며 살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과 분리되지 않는다. 신화를 만드는 자들에게 우주를 이해하는 것과 내가 살아가는 법은 따로 떨어져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나게 되는 세상의 면면, 사건의 면면은 생존에 직결된 무척 중요한 순간인 것!
신화는 점점 더 많은(다양한) 타자와 사건을 포함한 논리-이야기가 되고자 한다. 브리콜뢰르는 매순간 세계 전체와 관계를 맺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이야기는 호모 사피엔스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과학적 방법이다. 지금 쏟아져 나오는 영화와 소설, 드라마들을 보면서 우리의 호모 사피엔스적 감각은 그 또한 누군가 이 세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한 과정이라고 느끼는 것 아닐까? 매번의 이야기는 더 넓은 세계를 품어가고자 애쓰는 호모 사피엔스들의 노력인 것이다. 또 그런 노력을 더 많이 한 이야기를 우리는 ‘재밌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