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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ㅣ새로운 신을 만나다] 삶과 사유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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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1-12-21 22:25 조회6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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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사유는 하나다
이경아(감이당)

나는 어릴 적에는 교회를 다녔고 결혼하고 나서는 성당에 다녔다. 내가 열심히는 아니어도 오랜 기간 기독교를 믿었던 것은 내 욕심을 채우려는 것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였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물론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기도를 하겠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삶을 닮고 싶은 마음이 한쪽 귀퉁이에 있다. 예수님은 이웃을 조건없이 사랑하셨고 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했다. 만물이 연결된 존재임을 깨달았기에 만물과 교감했고, 모든 이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셨다. 기독교 신자들은 예배나 미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끼면 누군가에게 이 사랑을 나누고 싶어한다. 문제는 이런 바람이나 영적인 고양이 순간에 그치고 일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michael-dziedzic-0W4XLGITrHg-unsplash문제는 이런 바람이나 영적인 고양이 순간에 그치고 일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몸 따로 정신 따로

나는 정신으로는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우리에겐 그런 마음이 내재해 있지 않은가? 예수님처럼 자신을 우주 전체와 연관해서 보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게도 타자와 교감하고,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모든 것에 공감하는 존재를 보면 닮고싶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서도 나는 몸으로는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누리고 싶었다. 동안과 안티에이징에 관심을 기울이고, 더 많은 부동산과 주식으로 돈을 불리면서도 마음은 예수님처럼 살고 싶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나는 이게 가능하다고, 이렇게 사는 게 옳다고 여겼다. 그래서 정신은 성당에서, 육체적인 것은 일상에서 채우려 했다. 특히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어지고 마음이 메말라간다는 느낌이 들 때는 더 자주 성당에 갔다. 내 것을 챙기느라 메말라가는 것이었는데 정작 내 욕심은 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참회 기도나 제의를 열심히 하면 황폐해져 가는 내 영혼이 치유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참회를 수박 겉핧기 식으로 했다. 참회의 내용은 주로 내가 아이들에게 화낸 것, 누군가를 미워한 것 등등 이었다. 일상에서 겪는 소소한 불편함에 대한 것이었지 내면의 심층을 사유하지는 못했다. 그저 화내고 누굴 미워하고 이런 표면적인 것들을 반성하기 바빴다. 내가 화를 낸 밑바탕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미움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이런 것에 대한 고민없이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것만 반성했다. 내 욕심에 대해 더 고민하지도, 내 일상을 바꾸지도 않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대부분이 나처럼 살기에 내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았고 형식적인 참회를 반복하면서 어느 정도 내 정신이 치유되었다고 여겼다. 이런 식의 참회를 통해 사유가 깊어지거나 삶이 질적으로 성장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이 교회나 성당을 오래 다녀도 욕심이 줄지 않는 이유가 혹시 참회 기도나 전례 참여를 자신들의 영혼이 순화되었다는 면죄부로 받아들여서가 아닐까?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왜 정신적인 것은 성당에서, 신체적인 것은 일상에서 채우려고 했을까? 성당에는 정신만 가고 몸은 집에 있었던 건가? 나는 왜 정신과 몸이 따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marco-de-winter-cr9m-n3gvJ0-unsplash나는 왜 정신과 몸이 따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대자연의 이치를 사유하라

스피노자는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된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2정리7, 주석)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정신으로도 신을 표현하고 몸으로도 신을 표현하는데 이 둘이 하나이며 모두 신 안에 있다는 의미다. 신 안에 있다는 것은 정신과 신체 모두 자연 안에 있으며 자연의 질서를 따른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그동안 정신과 몸은 분리되어 있다고, 몸은 죽어도 정신은 영원한 것이니 정신은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몸과 정신의 분리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데에는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몸은 썩어 없어지는 것이지만 영혼은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하느님께 간다. 즉, 몸은 자연법칙에 따라 생로병사를 겪지만, 정신은 하느님을 만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이런 영향으로 나는 몸은 죽더라도, 영혼은 불멸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몸으로는 누릴 것을 다 누려도 되지만 영혼은 고귀해야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나는 왜 영혼 불멸이나 몸과 정신의 분리에 대해 더 사유하지 않고 그냥 믿었을까? 내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손해를 안 보려고 꼼꼼히 따져 물었을 텐데 더 중요한 내 존재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은 사제가 하고, 나는 사제의 말을 믿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게 신앙인 줄 알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에 대해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을 잃었고 참회도 표면적인 것만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내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게 되었고 신에게 복종하고 더 의지하게 되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사유능력이 없어지는 아이러니라니. 그럼 사유를 한다는 건 뭘까?

susan-q-yin-Ctaj_HCqW84-unsplash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에 대해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을 잃었고 참회도 표면적인 것만 하게 되었다.

사유는 신의 속성이다. 또는 신은 사유하는 것이다.(제2부, 정리1)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의 무한한 속성 중 하나가 사유다. 정신은 사유하는 것이고, 이 사유를 통해 우리는 관념 즉 아이디어들을 만들어낸다. 내가 만물들과의 연결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하는 것처럼, 이 연결이 신의 속성이기에 더 많이 연결되고 소통하려고 해야 하는 것처럼 사유도 신의 속성이다. 사유가 신의 속성이라는 것은 사유라는 것 자체가 신이라는 의미다. 사유를 한다는 것은 천지자연의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다. 해가 중천에 있다가 지고 다시 뜨듯이, 달이 차고 기울 듯이, 줄어들면 불어나고 기울어지면 차는 이치 말이다. 이 이치를 완벽하게 터득할수록 신의 속성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치를 터득한다는 것은 하나씩 떼어내서 보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순환하고 운동하면서 연결되어 있는 전체적 차원에서 보는 것이다. 그러니 사유란 고정된 하나의 틀이 아닌 열려있으면서 이어져 있는 흐름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무한하게 열려있으니 경계나 편견이 없고, 모든 것이 이어져 있으니 시공의 제약이 없다.

예수님은 이런 자연의 이치를 깨달았기에 절대적 사랑을 실천하셨다. 나와 너가 분리된 존재가 아니기에 타자를 사랑하는 게 자신을 사랑하는 일임을 아셨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분리되지 않았다. 스피노자가 “각자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가장 많이 추구할 때 사람들은 서로에게 가장 유익할 것이다.”(제 4정리35. 2) 라고 말하듯이 가장 이기적인 게 가장 이타적인 것이 되는 이유다. 나와 너가 분리된 상태에서는 이기적인 게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이다. 하지만 나와 너가 하나인 상태에서는 이기적인 게 이타적인 것이 된다.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남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만물은 끊임없는 순환 속에 있으니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아셨다. 그러니 대자연과 하나가 되셨고, 그 법칙 속에서 사셨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 ‘신의 아들’이다.

이런 천지자연의 법칙에 대한 이해 속에서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란 믿어야 하는 교리가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일상에서 실현해야 할 윤리적인 파동이다. 자연은 매번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즉 매 순간 죽고 매 순간 다시 태어난다. 우린 날마다 잠들었다 깨어나면서 부활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끊임없는 생성 소멸을 통해 생성을 이어간다. 이것이 부활이다. 하지만 이것을 부활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은 전체 순환의 질서가 아닌 나의 욕망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내가 동안을 원하고, 영혼의 불멸을 믿은 것은 늙는 것도 죽는 것도 싫어서다. 전체적 차원에서 늙음은 또 다른 젊음의 생성이요, 죽음은 다른 것으로의 생성이자 부활이다. 하지만 나는 늙고 죽는 건 단절이자 소멸이라 여겼다. 그러니 늙음과 죽음이 두려웠고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불멸을 믿게 되었다.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는 이유는 성체에 내 욕심을 빌라는 게 아니다. 예수님의 몸을 모시며 일상에서 매 순간 부활의 파동을 이어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joanna-kosinska-UmICMYRnbXc-unsplash다시 말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분리되지 않았다.

사유하고 실행하라!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산다는 것은 정신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 천지자연의 법칙을 사유하고 그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는 순환이지 소유가 아니다. 단절이 아니고 생성이다. 이런 관점으로 사유하니 내가 가진 것들이 너무 거추장스럽고 무겁게 느껴졌다.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꼭 쥐고 있던 부동산이 최근 들어 특히나 무겁다. 없으면 안 될 것 같이 여겨졌던 부동산이 이젠 나를 답답하게 한다. 그래서 일단 살고 있는 집은 어쩔 수 없더라도 노후 준비를 위해 가지고 있었던 상가를 팔려고 내놨다. 사유가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게 이런 것일까? 물론 예수님과 같은 경지는 아니지만 내 나름의 변화다. 이것은 다 필요 없어~, 가져서 뭐해~ 라는 허무감과는 다르다. 가벼워지고 싶은 마음이다.

자연은 순환인데 부동산이라는 단어가 말해주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은 자산이 부동산이다. 이 부동산을 내가 쥐고 있는다는 것은 순환에 동참하는 길이 아니라 역행하는 길임을 이젠 조금 알겠다. 내가 상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생성이 아닌 나의 소유만 늘릴 뿐이다. 예전 같으면 이 상가를 팔아서 다른 걸 사야지 하며 다른 투자처를 알아보러 다녔을 것이다. 10년 전 상가를 샀을 때는 이게 얼마나 오를까가 나의 고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빚을 갚고 남은 돈을 어떻게 쓰는 게 돈을 순환시키는 일일지를 고민하고 있다. 또한, 아이들이 상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고등학생인데도 상가가 얼마인지 월세는 얼마 나오는지 묻는 아이들을 보며 아이들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라도 상가를 팔아서 돈을 흩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는 이 상가를 아이들에게 물려줄 생각도 했었는데 말이다. 이건 순환이 아니라 내 소유를 견고히 하는 탐욕임을, 아이들을 자기 것만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키우는 길임을, 아이들을 고립시키는 일임을 이제 좀 알겠다.

예수님은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주님!’하고 부르면서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복음, 6, 46)며 행동으로 실행하라고 하신다. 평소에 그냥 지나쳤던 이 구절이 이번에 눈에 들어왔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고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다르게 사유하고 실행하는 건 어려우니 믿으려고만 했다. 예수님은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땅 위의 만물과 교감하셨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된 게 아니다. 사유와 삶이 하나이듯 우리가 우주적 차원에서 사유하고 더 많은 타자와 소통하려고 할수록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이다. 예수님을 닮고 싶은가? 그렇다면 사유하고 실행하라. 그리고 실행을 통해 다시 사유하라!

mike-lewinski-Qt2lQYp3Wok-unsplash사유와 삶이 하나이듯 우리가 우주적 차원에서 사유하고 더 많은 타자와 소통하려고 할수록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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