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 사회의 수렵 채집민들은 주변의 동식물을 섬세하게 인식하고, 분류한다. 테와족은 초목의 잎사귀 형태에 대한 40가지 용어를 갖고 있고, 피나투보족은 600개 이상의 식물 명칭을 갖고 있는 식이다. 이들은 물질의 실체가 우리가 감각으로 인식하는 바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감각을 통해 경험한 바 그대로 분류하고 질서 지운다.
근대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들의 과학은 다소 비약적이고, 주술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불임증과 거미의 연결이라든가, 사냥한 들소의 뱃속에서 꺼낸 새끼의 발육상태와 봄이 오는 시점의 연결은, 우리 과학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불임증과 거미의 연결 사이에는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는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레비스트로스는 그것을 ‘자연이 허락해준 발견’, ‘구체의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근대 과학은 세계의 차원을 구분하는 데에서부터 분석의 메스를 든다. 이를테면 인간의 마음과 물질은 다른 차원이다. 그래서 인디언들의 주술이 물질적 현실을 바꾼다는 것을 우리는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또, 물질의 형태와 성질이 어느 정도 연관은 있을 수 있지만,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돌 모양의 식물을 먹으면 몸속의 돌 같은 것이 없어진다는 식의 논리(이건 제가 지어냈습니다^^)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근대 과학과 구체 과학의 차이는 하나의 논리가 어느 범위까지를 꿰어낼 수 있느냐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을 총체적으로 사유하는가, 아니면 분리해서 사유하는가. 어느 영역까지를 연결된 것으로, 어디부터는 분리된 것으로 사고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어쨌든 ‘인위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고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 사물들에게서 질서를 발견하거나 혹은 그들에게 질서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과학적 사고’다.
야생돼지와 표범의 이야기로 잠깐 돌아가보자면, 신화를 만든 사람들에게는 야생돼지와 인색한 사람, 표범과 불을 연결하는 감각적이며 합리적인 논리가 있다. 표범의 번뜩이는 눈에서 사람들은 불의 반영을 보았고, 그 강한 포식자가 익힌 것이 아니라 날 것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에서 인간에게 불을 준 뒤 날고기를 먹는 관대함을 읽어내는 것이다. 무척 축소된 형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그렇지만, 하나의 신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주변 환경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와 관찰이 필요하다. 표범과 인간, 인간과 불, 표범과 다른 동물들 등등 간의 실제적 관계를 모두 이해하는 것 위에서 하나의 신화가 만들어지고 작동할 수 있다. 그렇기에 구체의 과학은 관계의 과학이고, 총체의 과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