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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사> [김해완의 해외통신] 뉴욕 지하철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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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7-01-16 17:04 조회9,0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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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통신] 뉴욕 지하철 체험기 

세계 도시에서 토착민의 ‘언더그라운드’를 엿보다 

김해완 작가
다문화·다인종의 군상(群像)으로 가장 뉴욕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 24시간 운행하는 ‘코스모폴리탄 열차’ 속에서 발견한 뉴요커의 ‘보통’ 삶 

뉴요커가 가장 사랑하고 자주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택시도 버스도 아니고 지하철이다. 뉴욕의 지하철은 20세기 초에 탄생돼 그동안 다양한 인종의 이민자를 도시에 안착시키는 이동수단으로서 자리매김했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이 도시를 찾는 관광객은 뉴욕의 지하철에 매료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뉴욕의 지하철이 가장 뉴욕다운 공간이기 때문이다. 낡은 열차가 뉴욕을 대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맨해튼 미드타운에 위치한 34가 해럴드 스퀘어 역. 한인타운이 있는 곳으로, 7개 노선이 만나는 환승역이어서 규모가 큰 편이다. 뉴욕의 복합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곳이다.
뉴욕에 방문한 지인들이 종종 내게 묻는다. “일반 관광객이 가는 곳 말고 정말 ‘뉴욕’다운 곳을 추천해줄 수 있느냐”고. 그러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답한다. “지하철에 가보세요~!”

반응은 백이면 백, 이상한 눈빛을 보낸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말이다.

이 세상에서 지하철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최소한 내 주변에서는 못 봤다. 서울에서 지하철은 집-회사, 집-학교를 왕복하는 이동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매일 사람이 붐비는 ‘지옥철’을 타다 보면 피곤할 뿐만 아니라 자존감마저 떨어진다.

육체적 피로 때문만이 아니라 앞으로 평생 지하철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심적 피로 때문에 그렇다. 공간에 대한 감각이 빈약해지면 세상을 향한 생각도 빈약해진다. 닭장에 갇혀 사는 닭의 상상력이 닭장만 한 것처럼 도시인의 처지도 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하철은 ‘일상’이라는 영역을 대표하는 곳이다. 사실 일상은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장대한 여정에 숨은 배경일지도 모른다. 생을 지속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하는 일이지만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엔 초라하고 비좁은 영역이란 얘기다.

뉴욕도 서울만큼이나 고단한 도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뉴욕의 지하철은 지하로 숨기는커녕 당당하게 뉴욕의 대표적인 ‘얼굴’이 되고 있다. 우선 뉴욕에서 지하철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를테면 지하철에 대한 책, 사진집, 엽서, 티셔츠 등이 상품으로 나와있고 관광객 사이에서 불티나게 팔린다.

지하철 관련 상품이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관광객을 홀리기 위한 상술일까? 아니면 일상이라는 민낯을 있는 그대로 내비칠 줄 아는 뉴욕의 용기일까? 어느 쪽이 됐든 뉴욕에서 지하철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압도할 만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 한낱 지하철이 말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리라


▎뉴욕의 한 버스정류장에 있는 메트로카드 자판기. 지하철과 버스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다. 뉴욕의 버스는 정류장이 블록마다 있기 때문에 이동속도가 느리다. 주로 노약자와 어린이가 이용한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지하철이기에 그럴까? 이해가 안 된다면 일단 가보면 된다. 뉴욕 지하철은 한 번만 봐도 충분히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영화 포스터를 빗대어 말하자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된다.

일단 뉴욕 지하철은 심하게 더럽다. 승강장 바닥은 때에 찌들었고 열차 선로에는 쓰레기가 가득하다. 에티켓도 지나치게 자유로워서 어디서나 음식을 먹고 흔적을 남긴다. 그러니 쥐가 많아지는 것도 놀랍지 않다. 한번은 동영상사이트 ‘유투브’에서 쥐가 피자조각을 입에 물고 뉴욕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는 영상이 유행할 정도였다.

최근에는 지하철공사가 ‘쓰레기 청소를 시작할 테니 제발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달라’는 캠페인 광고를 실시하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효과는 미미했다. 뉴욕 지하철이 깨끗해질 수 있다고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 분위기다.


▎비가 오는 날, 뉴욕의 한 지하철역. 하수구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지하철 지하 2층까지 물이 고스란히 샜다. 뉴욕에서는 흔한 일이기 때문에 불평하는 뉴요커는 별로 없다고 한다.
첫 번째 충격이 가시면 두 번째 충격이 찾아온다. 뉴욕 지하철은 굉장히 낡았다. 운행한 지 100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벽면에 금이 가 있거나 환기구가 없어서 노숙자 냄새가 빠지지 않는 역사(驛舍)가 다반사다.

비 오는 날 물이 콸콸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시설이 낡았으니 자연재해가 찾아오면 그 피해가 더욱 극심해진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가 입힌 피해를 아직도 복구하고 있는 판이다. 하지만 이런 낙후성을 단순히 세월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뉴요커는 구식을 신식으로 바꾸는데 거부감이 있는 듯하다. 믿기 힘들겠지만 뉴욕의 메트로카드는 아직도 터치가 아니라 슬라이드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토큰(Token)’도 고작 10년 전에 사라졌다.

뉴욕 지하철은 시끄럽기까지 하다. 역 입구, 승강장, 지하철 내부까지 소란스럽지 않은 곳이 없다. 바로 거리의 음악가들의 퍼포먼스 공연 때문이다. 영화 <비긴 어게인>을 본 사람이라면 여주인공이 뉴욕 지하철에서 노래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실제로 지하철은 각종 예술가들의 무대가 되어왔다.


▎시청역 J호선 승강장. 청결 관리가 거의 되지 못한 상태다. 노숙자 냄새도 눅눅히 배어있다. 시청역은 뉴욕에서도 가장 오래된 지하철 역 중 하나여서, 맨 밑 지하에는 폐쇄된 승강장도 하나 있다.
단지 영화만큼 낭만적이지 않을 뿐이다. 드럼 소리는 지하철 브레이크 소리와 뒤섞이고 노래 소리는 싸우는 소리에 묻힌다. 사람이 붐비는 환승역에서는 공연 두세 개가 동시에 벌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실력파 음악가가 그렇게 많지도 않다. 거리 공연의 이미지를 역이용해서 관광객의 돈을 뜯으려는 엉터리 음악가도 늘고 있다.

이 혼돈의 도가니를 겪고 나면 누구든 이런 질문이 튀어나온다. 이것도 정말 뉴욕이란 말인가? 일반적으로 뉴욕을 잘 모르는 이에게 뉴욕은 환상의 도시다. 뉴욕이라는 도시 자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 낸 환상적 이미지로 유명해졌다.

때문에 미리 학습한 환상을 쫓아 뉴욕을 찾은 관광객은 실제 명소를 돌아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어떤 환상으로도 뉴욕 지하철의 이 남루함만큼은 가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 지하철에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된다.

이것은 지하철이 아닌 ‘재래시장’이다!


▎뉴욕의 한 야외 승강장. 이곳 역시 빗물과 쓰레기가 범벅이 돼 있다. 몇십 년간 쌓여 온 선로의 쓰레기는 뉴욕시의 골칫거리다. 최근에야 밤마다 쓰레기를 치우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많은 뉴요커가 혀를 찬다. ‘뉴욕시가 얼마나 관리를 안 했으면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실제로 뉴욕 지하철의 엉망인 모습은 시의 관리부족 탓일까? 그 불편함 너머에는 그간 보이지 않았던 진실이 있다. 바로 뉴욕에서는 지하철이 사람 중심의 공간이라는 사실 그것이다.

각양각색의 뉴요커가 가장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공간에는 자연히 더러움, 낡음, 소음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노숙자부터 양복쟁이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이 드나들기 때문에 더러워졌다. 아마추어 음악가부터 전문 예술인까지, 온갖 레벨의 사람이 공연을 벌이기에 소란스러운 것이다.

뉴욕 지하철은 24시간 동안 운행한다. 따라서 보수공사를 천천히 할 수밖에 없어서 낡게 되는 것이다. 서울의 지하철과 뉴욕의 지하철의 차이는 단순히 위생이 아니다. 공간의 성질 자체가 아예 다르다. 우리가 으레 좋다고 말하는 깨끗하고 조용한 지하철은 오직 이동 수단으로만 기능한다. 우리는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움직이기 위해서 지하철을 타지, 사람을 만나려고 지하철을 타지는 않는다.

반면에 뉴욕의 지하철은 마치 재래시장 같다. 지하철을 타는 와중에 별별 인간과 다양한 사건을 만나게 된다. 뉴요커는 이동하는 와중에 먹고, 자고, 싸우고, 노래한다! 세계의 재래시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본래 시장의 목적은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지만 때로는 물건 구경하면서 분위기만 즐겨도 충분히 재미있듯이 뉴욕의 지하철도 그렇다.

물론 뉴욕시가 무슨 철학이 있어서 일부러 지하철을 이렇게 도떼기시장처럼 운영할 리는 없다. 뉴요커를 통제할 수 없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뉴욕 지하철의 비밀에 대해 한 발짝 다가섰다. 사실상 뉴욕 지하철에는 특별할 게 없고 단지 일상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뉴욕의 일상이 특별할 것도 없다. 생존이 곧 생활인 사람들이 지친 몸을 끌고 지하철을 타는 것은 우리와 비슷하다.


▎E·M·R 호선은 거미줄처럼 엮여 있어 뉴욕 지하철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M호선과 R호선은 모든 역에 정차하는 로컬 트레인이고 E호선은 주요 역에만 정차하는 익스프레스 트레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 지하철이 이토록 특별하다고 여겨진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뉴요커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활기 때문이다.

뉴욕이 오늘날 최고의 도시로 인정받는 것은 이곳이 현대적인 공간이라서가 아니다.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도시 베이징, 도쿄, 서울이 이제는 뉴욕보다 더 최첨단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파리, 빈, 런던과 같은 유럽의 도시가 갖고 있는 유구한 전통과 역사도 뉴욕에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뉴욕만이 내뿜는 매력은 바로 사람에 있다.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다양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장소다. 다문화, 다인종, 다언어의 버라이어티가 펼쳐지는 현장이다. 타임스퀘어 앞에는 세계에서 온 다양한 인종이 에너지를 내뿜는다. 길거리 포장마차 아주머니는 손님들과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언어로 대화를 나눈다. 근처 골목에는 티베트 식당에서 에티오피아 식당까지 즐비하다.

세상 어디에서 또 이런 체험을 할 수 있겠는가? 건물은 부쉈다가 새로 지을 수 있지만, 사람은 계획대로 모을 수 없듯이 뉴욕의 오랜 인기는 어쩌면 다음 명제를 증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사람에게 끌린다는 것.”

그런데 사람은 서로 끌리기만 하는 게 아니다. 밀어내기도 한다. 때문에 ‘다양성’이라는 성질은 흥미롭기는 해도 편안하지는 않다.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익숙한 감각 영역을 침범한다. 타인의 낯선 말소리, 땀 냄새, 표정, 피부색, 심지어 패션에도 놀랄 수 있다. 이 자극은 끊임없이 방문객을 상기시킨다. ‘너는 뉴욕에 있다’고.

택시는 비싸고, 버스는 느리다?


▎뉴욕의 야외 지하철에 그려진 그래피티. 1980년대 기승을 부렸던 그래피티는 최근 뉴욕시의 복구 작업으로 거의 사라졌다.
이 다양성을 강제로 체험시키는 뉴욕의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지하철이다. 뉴요커에게 지하철은 좋든 싫든 감수해야만 하는 삶의 과정이다. 더럽고 시끄럽고 낡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문제투성이’ 지하철이라도 뉴욕 내에서는 최고의 이동 수단이기 때문이다.

뉴욕의 택시는 너무 비싸고, 버스는 매 블록마다 정차하기 때문에 너무 느리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누구나 지하철을 타야 한다.

이제 상상해보자. 100년 된 낡고 좁은 지하철에 800만 뉴욕시민이 몸을 싣고 출근하는 모습을 말이다. 콩나물 열차 칸에서 옴짝달싹 못한 채 있노라면 이국적인 체향이 코를 찔러 들어온다. 다양한 피부 색깔과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오면서 귀에는 분간할 수 없는 언어가 웅얼웅얼 울리고 있는 상황이 펼쳐진다.

이 순간 타인의 존재감은 피부를 뚫고 오장육부에까지 스며든다. 이것이 개념의 영역을 떠나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다양성’의 진짜 의미다. 그렇다면 왜 지하철이 통제불능 상태인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24시간 동안 온갖 종류의 타인이 부딪히는 공간에서 어떻게 평화가 가능하겠는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콩나물 시루 같은 지하철을 타면 저절로 깨닫게 된다. 내가 타자에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는 사람인지, 또 그 거리를 얼마만큼의 편견으로 메우려드는지. 그 편견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인종차별이다. 지하철칸 안에서는 모두가 조금씩 인종차별주의자가 된다. 공식적으로 각자가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지하철에서 내 어깨와 다른 이의 어깨가 부딪혔을 때 고개를 들어보니 까만 피부에 하얀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 순간 마음이 움츠러들지 않기란 아주 어렵다. 인종 차별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타자 속에서 편안해지는 법을 모르는 신체의 무능력이다.

특정 피부색만 시야에 들어오면 온몸이 경직되는 ‘병’인 것이다. 지하철의 공간은 딱 내 존재의 편협함만큼 협소해진다. 인종차별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바꾸는 것이다. 뉴욕의 각종 타인 속에서 편안하게 사는 방법도 오직 몸을 바꾸는 것이다.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하루하루 지하철에 나를 싣고 국경을 넘나드는 다양한 땀 냄새에 절어가면서 불평하지 않는 것 외에 또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과 긴장이 끊이질 않는다는 점에서 지하철은 참된 뉴욕이다. 지난 400년 동안 온갖 이민자와 방랑자가 활개를 치고 다니면서 이 도시를 독특한 무국적 공간으로 만들었다. 타인의 열기만큼 이 도시에서 강렬한 것은 없다.

제일 무서운 것도 사람이고 제일 흥미로운 것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의 몸과 일상은 이 ‘인간의 카오스’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가? 지하철은 뉴욕에서 버티기 위한 매일의 시험이다.

낡은 전철에 매료된 뉴욕의 예술가들


▎‘이번 주말에 퀸즈행 E호선은 다니지 않는다’는 공지표다. 퀸즈나 브루클린처럼 외곽에 사는 사람은 이 공지표를 숙지해야 한다. 뉴욕 지하철의 변덕스러운 일정은 주말에 외출하는 일부 뉴요커에겐 고역이다.
다양성이 극대화되면 삶의 극한도 보인다. 학교나 회사에서는 마주칠 수 없는 이들이 지하철에 우르르 출범한다. 라이터로 몸에 불을 붙이려 하는 노인이나 서로 침을 뱉고 싸우는 백인 노숙자와 흑인 노숙자. 그리고 이마에 흰 페인트칠을 한 채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샐러리맨 같은 자들이 끊임없이 보인다.

가끔씩 평화로울 때도 있다. 그럴 때조차 다음 번 소동이 벌어지기 전까지 잠시 ‘쉬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뉴욕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다는 뉴스가 뜨더라도 그 장소가 지하철이라면 놀랍지도 않을 지경이다.

이런 극한을 마주치는 것이 과연 나쁜 일이기만 할까? 뉴욕 가이드북은 하나같이 지하철이 위험하다고 겁을 준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요즘 세상에 안전한 곳은 없다. 제일 안전해야 할 고등학교 수학여행에서는 배가 침몰해 아이들이 몰살당하고 프랑스 여름 밤 해변에서는 트럭 테러가 일어나 사람들이 볼링 핀처럼 치이며 조종사가 일부러 비행기를 추락시켜 집단자살을 시도하는 시대다.

우리는 근대 문명이 발전하면 사회도 저절로 안전해질 것이라고 잘못 믿고 있다. 실제 일상에서는 바로 이 ‘문명의 이기’에 공격받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편으로는 뉴욕의 지하철이 오히려 안전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곳은 안전하지 않다고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일례로 지난해 뉴요커 148명이 선로에서 떨어져 죽은 결과 ‘스스로 조심하라’는 공익광고를 실을 정도다.

삶의 극한을 목격하는 것. 이것은 위험하지만 또한 귀한 선물이다. 지하철에서는 내심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방어 심리가 아니다. 내가 모르는 인간, 모르는 세계와 대면할 준비다. 이상한 인간들의 이상한 행동은 삶의 궁지에 몰린 인간의 자기표현이다.

이를 직시하는 순간 ‘이 사람은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왔구나’ 라는 공감이 발생한다. 이 공감은 필연적으로 나의 좁고 낡은 세계관을 깨뜨린다. 내가 사는 세상 이외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피부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뉴욕의 예술가가 지하철을 사랑하는 진짜 이유다. 상상력은 현실을 떠난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비트는 ‘틈새’를 만드는 힘이다. 밋밋한 풍경에서도 시선을 바꿔보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예술가는 이 시선을 비틀 줄 알며 현실에서 시선을 비틀 지점을 찾아내는 자다.

그런 의미에서 뉴욕의 지하철은 상상력을 극도로 자극하는 곳이다. 이곳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다. 가장 익숙한 공간이지만 예측 불가능한 해프닝이 끊이질 않으며 가장 평범하면서도 낯선 사람들로 가득하다. 지하철은 매순간 경고한다. 당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한 발짝만 나가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그렇게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예술가, 운동가, 철학가가 이곳에서 영감을 얻었다. 괜히 대형 서점에 가면 뉴욕 지하철에 대한 역사책과 소설책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게 아니다. 때문에 뉴욕의 지하철 노선은 이동이 아니라 여행이 된다.

작가 이와사부로 코소는 뉴욕의 지하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이곳을 출발점으로 하여 무한하게 넓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다.”(<뉴욕열전> 360쪽)

보통 지하철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똑같은 왕복 운동만 하기 때문이다. 목적지와 목적지를 벗어나지 않는 동선은 필연적으로 공간을 좁게 가둔다. 그런데 이런 운동이 가능하려면 먼저 공간이 균질화되어야 한다. A지점에서 B지점을 ‘출발점’과 ‘도착점’으로 균질하게 취급하고, A와 B 사이와 B와 C 사이가 똑같이 ‘역 세 개’ 떨어져 있다고 균질하게 여길 때에야 비로소 왕복 운동에도 차이가 없어진다.

뉴욕에서 가장 변덕스러운 이동수단


▎뉴욕의 어느 지하철 역에서나 쉽게 마주칠 수 있는 노숙자들. 뉴요커는 노숙자와 함께 지하철을 쓰는데 불평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곳 지하철을 두고 노숙자의 호텔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뉴욕은 균질화가 불가능한 공간이다. 브루클린에서 차이나타운으로 가는 세 정거장과 브롱스에서 이스트할렘으로 넘어가는 세 정거장은 결코 같을 수 없다. 타고 내리는 인종도 다르고, 동네도 다르고, 거기서 사용되는 언어도 다르다.

지하철의 한 종점에서 다른 종점까지 가는 것은 일종의 세계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 게다가 뉴욕과 세계도 계속 변한다. 몇 년 전에는 중국인이 살았던 동네에 인도인이 살기도 하고 어떤 동네는 젠트리피케이션을 거치며 완전히 갈아 엎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기인(奇人)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변수까지 있다.

이 상황에서는 ‘지하철이라는 고정된 물체’가 ‘뉴욕이라는 고정된 공간’ 안에서 움직인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지하철, 지하철에 탄 사람들, 뉴욕 모두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안팎으로 동시에 이동하는 여행인 것이다.

뉴욕의 땅 아래에서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참으로 경이롭지 않은가? 마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마법 같다. 하울의 성은 걸어 다닌다. 그런데 성은 외부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움직인다. 현관문 화살표를 돌리면 문 바깥 공간이 바뀌는 것이다.

이 성의 위치는 끊임없이 바뀐다. 마치 지하철처럼 말이다. 결국 하울의 성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그 순간 성에 있는 사람뿐이다.

세계적인 도시인 뉴욕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유동하는 세계를 피부로 느끼고 싶다면 뉴욕의 지하철을 타면 된다.

지하철에 대한 소소한 에피소드는 끝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내 개인적으로도 많고 남에게 들은 것도 많다. 종종 생각한다. 뉴욕의 다양한 사람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어주는 것은 바로 이곳 지하철에 대한 분노가 아닐까? 뉴욕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지하철에 대해 불평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뉴욕의 지하철은 다른 도시에서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사고가 항상 일어난다. 우선 스케줄대로 운영하는 경우가 드물다. 가장 바쁜 출근 시간대에 신호 문제로 15분 이상 열차가 멈춰 있다거나, 급작스러운 사정으로 R호선이 F호선으로 바뀌는 식이다.

이뿐인가? 이 역에는 오전 내내 열차가 서지 않을 예정이니 그 다음 역까지 걸어가라고 방송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경우가 가끔도 아니고 자주 있다는 것이다. 일부러 일찍 출근했는데 이런 악운이 겹쳐 늦기라도 하면 뱃속부터 분노가 뿜어져 나온다.

주말에는 더 심하다. 4년 전 허리케인 샌디가 입힌 피해를 복구해야 한다며 툭하면 열차 운행을 멈춘다. 그것도 매 주말마다 스케줄이 달라진다. 약속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가 오지도 않는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싶지 않다면 주말 열차 스케줄을 항상 체크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도시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뉴욕의 한인 유학생 사이에서는 ‘성질 급한 한국 같았으면 벌써 폭동이 일어나고도 남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대부분의 뉴요커는 분노를 넘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말한다. 이 정도의 서비스는 옛날에 비하면 천국이라고. 30년 전만해도 지하철 상태가 훨씬 더 끔찍했다는 것이다.

뉴욕에 지하철이 처음 생긴 것은 20세기 초였다. 그때는 두 개의 민간기업이 지하철을 운영하고 있었다. 브루클린과 맨해튼을 이었던 BRT(Brooklyn Rapid Transit)는 오늘날 영어로 표기된 노선을 운영했고 퀸즈와 브롱스를 맨해튼으로 연결했던 IRT(Interborough Rapid Transit)은 숫자로 표기된 노선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뉴욕시가 이 두 회사를 사들여 지하철을 공영화했다. 버스와 택시, 지하철까지 통합하는 거대한 뉴욕시 교통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야심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후 뉴욕시가 재정 파탄이 나고 말았다. 지하철은 방치 상태에 놓였다.

가난한 이민자를 도시의 심장으로 나르다


▎퀸즈 잭슨하이츠 7호선 역. 뉴욕의 중심부 맨해튼을 벗어난 외곽지역인 퀸즈와 브루클린에는 지상으로 다니는 열차도 많다.
지하철은 떠돌이 예술가의 그래피티로 뒤범벅이 됐고 눈 뜨고는 볼 수 없이 더러워졌다. 각 역은 점차 문을 닫기 시작했다. 남아있는 역과 노선도 지하에 범죄 조직이 서식하면서 망가져갔다.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급기야 1980년대에는 사용할 수 있는 지하철이 1960년대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이 총체적 난국이 다시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부터다.

이런 기구한 역사 때문에 뉴요커는 지하철이 약간만 개선돼도 감지덕지하는 형국이다. 지난해 뉴욕시는 허리케인 샌디 때문에 입은 피해를 완전히 다 복구할 시기를 2050년으로 내다보았다. 무려 35년 뒤다. 그동안 또 다른 허리케인이 뉴욕에 오지 않고 시의 재정파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다.

그렇다. 뉴욕에 계속 살 생각이라면 지하철에 대한 기대는 아예 접는 게 좋겠다. 지하철 공사는 계속된다. 영원히!

외부인의 눈에 뉴욕 지하철이 아무리 독특해 보인들 결국 지하철은 뉴욕의 밑바닥 일상을 실어 나르는 장소다. 뉴욕의 지하철은 24시간 운행되고 있다. 24시간 내내 피곤에 찌든 뉴요커를 실어 나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리다.

뉴욕에서 살아가는 일은 곧 살아남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어찌된 일인지 지하철에는 백인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유색인종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뉴욕의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는 지하철은 집값 싼 도시 외곽에 사는 가난한 이민자를 도시의 심장으로 실어 나른다. 이것이 일차적 임무다.

중요한 것은 이 일상 속에서도 순간순간의 출구를 찾는 것이다. 영국의 유명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의 노래 중에 <업 앤 업(Up & Up)>이 있다. 삶이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라는 내용의 노래다. 일상 속에서 초현실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아름다운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재미있는 건 여기에 배경으로 뉴욕 지하철이 계속 나온다는 것이다. 지하철 플랫폼에 거북이가 헤엄치고 지하철의 창밖이 우주로 바뀐다. 지하철이 다리를 건널 때에는 고래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 비디오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민낯의 일상에는 마법이 숨어 있다는 것. 이 마법을 거는 방법은 무엇일까? 노래의 가사에 나와 있다. “나는 성장하고 싶어. 느끼고 싶어. 알고 싶어. (세상을)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알려줘.”

지하철 옆 자리에 앉은 타자에 대한 궁금증, 지하철 너머 아직 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갈증. 이 열린 마음이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인생에 빛을 비춘다. 지하철이 뉴욕의 마스코트가 된 것도 이런 마음의 힘이라고 믿는다.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폐쇄적으로 내면에 갇히기보다, 꿋꿋이 외부의 세상을 향해 열려 있으려는 노력. 이 힘찬 의식 상태야말로 가장 ‘뉴욕답지’ 않은가!

김해완 - 고등학교 재학 중 학교를 나와 공부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서 생활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가방끈은 짧지만 공부복은 많다. 2년 전에는 예상치 못하게 ‘세계의 수도’ 뉴욕 한복판에 떨어졌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람, 새로운 배움을 누리며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보내는 중이다. 쓴 책으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그린비), <리좀, 나의 삶 나의 글>(북드라망), <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작은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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