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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로드 클래식] 일리아스 ①- 전쟁과 에로스, 문명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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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6-02-19 08:04 조회5,5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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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클래식] 일리아스 ①- 전쟁과 에로스, 문명의 기원


모든 전쟁과 테러에는 반드시 여성에 대한 약탈이 수반돼
자본주의도 전쟁과 에로스의 에너지 극한으로 끌어올려


전쟁도 여행일까? 집과 고향을 떠나야 하고, 낯설고 이질적인 관계에 노출되어야 하며, 매 순간 생사를 넘나든다는 점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 여정에서 인생의 새로운 경계로 나아갈 수도 있고, 아니면 적대와 폭력의 그물망에 갇혀 존재의 지반이 송두리째 파괴될 수도 있다. 요컨대 전쟁이란 유목과 정주 사이를 격하게 오가는 아주 특별한 여행인 셈이다.

 여기 전쟁에 관한 오래된 고전이 하나 있다. 『일리아스』가 그것이다. 『오디세이』와 더불어 서양문명의 시원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탄생연도가 기원전 8세기쯤이라니 저자인 호메로스와 우리 사이엔 3000년 정도의 ‘타임 스페이스’가 존재한다. 이 정도면 불멸이라고 해도 무방할 터, 이 작품을 생략하고 서구문명사에 진입하기란 불가능하다.

 막이 열리면 아테네 연합군이 트로이로 원정을 온 지 10년째다. 10년이라면 뽕나무밭이 바다로 변하는 장구한 시간이다. 그러다 보니 전쟁과 일상이 뒤섞여버렸다.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일상이다. 일상이란 명분도, 이념도 통하지 않는 희로애락의 격전지가 아니던가. 아니나다를까 아테네 연합군의 수장인 아가멤논과 신이 내린 전사 아킬레우스 사이에 균열이 일어났다. 아가멤논은 탐욕을 부렸고 아킬레우스는 빈정이 상했다. 이유는 아킬레우스가 전리품으로 받은 여인을 아가멤논이 강탈했기 때문이다. 분노한 아킬레우스. 즉각 전투를 중지하겠노라 선언한다. 순간, 당혹스럽다. 영웅들이 고작 전리품 하나 때문에 전선을 이탈하다니. 한데 그 전리품이 ‘여인’이다. 이때 이 여인이 의미하는 바가 대체 뭘까? 지고한 사랑의 대명사 혹은 전사를 빛나게 해주는 장식품? 더 가관인 것은 10년에 걸친 이 전쟁 자체가 한 여인 때문에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미의 화신이자 스파르타의 왕비인 헬레네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훔쳐갔기 때문이다. 전쟁의 원인도 여인의 약탈이고, 영웅들 사이의 균열도 여인을 차지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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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용석]


 그렇다면 이 원정에 참여한 이들은 헬레네를 열렬히 사랑했던가? 글쎄다! 작품 전체에서 헬레네가 등장하는 장면은 극히 짧다. 임팩트도 아주 약하다. 헬레네는 이 남자에서 저 남자에게로 끊임없이 옮겨간다. 그런 처지에 대해 큰 불만도 자책도 없다. 아킬레우스의 여인도 마찬가지다. 아가멤논은 그녀를 약탈했다가 다시 아킬레우스에게 돌려준다. 감격적인 재회가 그려질 법도 하건만 웬걸! 돌아왔다는 멘트 하나로 끝이다. 이런 것도 사랑인가? 아니면 고대인들에게 있어 에로스란 약탈게임의 일환이었던가? 혹자는 헬레네는 특별한 여인이 아니라 그냥 가상의 이미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여인 때문에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기 위해 여인 혹은 ‘불사의 미(美)’라는 기호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럴 법하다. 아무튼 『일리아스』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서구문명의 기원은 전쟁과 에로스라는 것. 전쟁과 에로스,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 나아가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도, 목적도 없다는 것.

 웬 선문답인가 싶겠지만 가까운 역사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합리성과 이성을 표방했던 20세기에 양차 대전과 홀로코스트가 벌어졌고, 디지털이 세상을 연결한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선 테러가 일상화되고 있다. 또 모든 전쟁과 테러에는 반드시 여성에 대한 약탈이 수반된다. 아니 전쟁과 성적 약탈은 분리된 적이 없다. 에로스 때문에 전쟁을 하는 건지 전쟁을 하다 보니 에로스적 충동에 휩싸이는 건지, 그것 또한 여전히 불분명하다. 결국 인간은 끊임없이 뭔가를 열망하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쉬지 않고 전투를 하지만 대체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죽는 자도, 죽이는 자도. 뺏는 자도 빼앗기는 자도. 맹목 혹은 무명!

 미시적 영역 역시 마찬가지다. 게임과 야동으로 일상의 권태를 버텨내고, 오디션과 배틀이 아니면 욕망이 꿈틀거리지 않는다. 현대판 신탁 혹은 주술에 해당하는 광고판을 보라. 아킬레우스보다 더 멋진 남성들이 나와 집단적 싸움을 하라고 부추기고, 헬레네보다 더 아름다운 여성들이 눈부신 관능미를 과시하며 이렇게 명령한다. 날 가지라고, 날 가지려면 서로 미친 듯이 싸우라고. 일상은 격전지가 되었고 신체는 늘 에로스적 탐닉으로 들끓는다. 이것이 과연 삶의 진면목인가? 하긴 이런 질문을 할 틈도 없다. 문득 돌아보니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을. 아테네 연합군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것처럼.

 요컨대 수천 년이 지났지만 우린 그렇게 ‘멀리’ 오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자본주의는 전쟁과 에로스라는 시원의 에너지를 극한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제우스보다 더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화폐’라는 신을 통해서. 이것은 과연 위안일까? 아니면 허무일까? 아니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인류는 언제쯤이면 이 무명 혹은 맹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길이 있기나 할까?

고미숙 고전평론가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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