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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의 고백 |고전연구자 고미숙, 함께 공부하면 자신의 꼬라지를 알게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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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13-04-15 09:52 조회5,5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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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고전연구자 고미숙

인생의 반은 열렬 기독교인
몸 안 좋아 동의보감 배우다
엉뚱하게 명리학에 눈떠
기초만 배워도 내가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해명돼

연구공동체에 대한 환상이
배신하고 배신당하면서
엄청난 번뇌로 바뀌었지만
이게 인류가 살 수 있는
최고 삶이란 걸 깨달았어요
인생의 반은 열렬 기독교인
몸 안 좋아 동의보감 배우다
엉뚱하게 명리학에 눈떠
기초만 배워도 내가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해명돼
연구공동체에 대한 환상이
배신하고 배신당하면서
엄청난 번뇌로 바뀌었지만
이게 인류가 살 수 있는
최고 삶이란 걸 깨달았어요
연구공동체에 대한 환상이
배신하고 배신당하면서
엄청난 번뇌로 바뀌었지만
이게 인류가 살 수 있는
최고 삶이란 걸 깨달았어요
 
“몸에 음기가 부족하면 화가 망동한다. 음허화동의 문제가 남자는 정확히 성욕이고, 여성은 뭘 먹거나 쇼핑을 한다.” 지난달 27일 저녁 서울 중구 필동에 자리잡은 ‘감이당’에서 만난 고미숙씨는 현재 우리 사회 병폐의 이유 중 하나로 ‘음허화동’을 지목하기도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04년 출간된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는 수유리의 작은 공부방에서 소수의 국문학 연구자들로 시작된 모임이 서울사회과학연구소의 사회과학자들과 결합해 ‘수유+너머’라는 연구공동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보여준 ‘인류학 보고서’입니다. 소모적인 교수 임용에 매달려 ‘정력탕진’하느니 경제적 자립과 배움이 가능한 ‘열린 광장’을 만들겠다는 젊은 고전연구자 고미숙의 꿈은 곧 300평이 넘는 용산의 옛 정일학원 건물로도 모자라는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공동체는 2011년 ‘수유너머 알(R)’, ‘수유너머 엔(N)’, ‘인문팩토리 길’ 등 여러 모임으로 분립되었고, 의역학으로 관심 영역을 넓힌 고미숙은 남산 자락의 ‘감이당’으로 활동무대를 옮겼습니다. ‘열하일기 3종 세트’와 ‘달인 3종 세트’에 이어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으로 최근 ‘동의보감 3종 세트’를 완간한 그를 만나기 위해 감이당을 찾았습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우리는 2000원만 내면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정갈하고 맛있는 식사를 함께 하면서, 공부와 삶이 분리되지 않는 공동체의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었습니다. 대구 수성아트피아에서 세미나 강좌를 마치고 귀경한 고미숙 선생은 지방 강연의 의미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명리학 배우면 안되나요
“2007~2008년경부터 더 이상 ‘부자 되세요!’만으로는 살 수 없게 됐어요. 수강생들의 수준이 굉장히 높아졌고 인문학적 수요도 전방위로 확장되었죠. 처음에는 제가 지방으로 강의를 가지만, 수강생들 사이에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배우겠다는 욕구가 생기면 세미나를 하게 되고, 그다음에는 수강생들이 서울까지 직접 올라오게 돼요. 새벽에 모여서 도시락을 싸서 열차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감이당에서 공부가 끝나면 남산을 타고 서울역까지 걸어가죠. 함께 걸어가는 것도 공부거든요. 스스로 배움을 구하러 찾아다니는 주체가 된 거죠. 그렇게 공부해서 스스로 지성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 (서울까지 올 필요 없이) 거기서 그냥 가르치면 되는 거예요. 몇 년 뒤에는 지방에서 자체 순환이 돼야죠.”
감이당과 남산강학원에서 ‘수유너머’를 떼어내게 된 이유를 묻자, 그는 “명(名)과 실(實)의 불일치를 극복하는 것이 공부”라며 “훌륭한 선생은 추격하는 제자에 앞서 도망가는 자”라는 박노해의 시를 인용했습니다. 포화 상태의 수유너머가 분화를 준비할 때 그는 이미 동의보감 세미나를 진행중이었고 새로운 그룹 이름을 감이당으로 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수유너머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을 주제로 퇴고를 앞둔 라이벌 평전으로 이어졌고, 명리학적으로 물(水)이었던 연암과 불(火)이었던 다산에 대한 설명은 고미숙이 명리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 물 흐르듯 연결되었습니다.
“몸이 안 좋아서 동의보감을 배우다가 엉뚱하게 명리학에 눈뜨게 됐어요. 몸이 운명의 현장인데, 그 90퍼센트는 자율신경이라는 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명리는 내 안에 있는 그 무의식의 장을 보는 거예요. 심리상담을 해도, 정신과에서 약을 먹어도, 온갖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해도, 내가 무의식적으로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절대 알 수 없어요. 그런데 명리학은 기초만 배우면 그동안 내가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 절반은 해명이 돼요. 토(土) 기운이 지나치면 식욕을 조절하기 어렵고, 수(水) 기운이 많으면 유머러스하지만 꼼수를 부리고… 등등. 내 몸의 리듬이 이렇구나 하는 걸 알아야 반성을 하든지 새 출발을 하든지 할 수 있죠. 저도 인생의 반은 열렬한 기독교인으로 살았어요. 그러나 교회 다닌다고 물리학이나 미적분을 안 배우는 건 아니잖아요. 부질없는 편견 때문에 명리학이 음성화되어 그 지적인 담백성까지 놓치게 된 것이 안타까워요. 다산 선생도 유배지에 가서 주역을 마스터했어요. 그러면서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죠. 명리학은 길흉화복을 점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우주적인 거울이에요. 천지자연, 봄여름가을겨울, 절기, 오행의 거울에 비추어 자신을 바라보는 거죠.”
의역학을 통해 몸과 우주의 정치경제학을 깨닫고 나니 “지금이야말로 백수의 천국시대”임을 알게 됐다고 했습니다. 곳곳에 도서관이 있어 도시락만 싸가지고 다니면 원하는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고, 남산 주변의 친환경적인 산책코스를 공짜로 걸어 다닐 수 있는데, 기실 이것이야말로 누구나 부자가 되면 자기 집에 가져다 놓고 누리고픈 인생 아니냐는 얘기였습니다. 사고 치는 중년 남성들, 인터넷의 폭력성, 성형수술의 문제점 등 온갖 현상들을 의역학의 관점에서 풀이하는 그의 설명은 시간을 잊을 만큼 재미있는 지식의 향연이었습니다.
고미숙의 인생 타임라인 (※클릭하면 이미지가 커집니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 인생을 바꾸다
사주를 보면 공부운과 조직운만 나온다는 물(水)의 사람 고미숙은 1960년 강원도 정선군 함백의 탄광촌에서 광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화전으로 살아가던 동네에 자그만 탄광이 개발되면서 광부 생활을 시작한 25살의 아버지가 하숙집 딸이던 20살의 어머니와 덜컥 눈이 맞아 갖게 된 아이가 그였습니다.
“엄마랑 아버지는 임신인지도 몰랐대요. 입덧을 하는데 감기 걸린 줄 알고 약 사다 주고 그랬다니까요. 결혼식은 제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쯤 올리셨어요. 과자를 많이 사다 주고 저를 외가에 맡긴 뒤 결혼식 하러 가던 엄마, 아버지 모습이 기억이 나요. 혼전임신의 결과물인 저는 부모님을 연결하는 귀중한 존재였고, 그래서인지 남녀차별을 받은 적이 없어요.”
할머니, 부모님, 삼남매에 삼촌, 고모까지 아홉 식구가 한방에 살았던 가난한 환경에서 그는 일찌감치 인간의 희로애락을 보았고, 왜 세상에 이렇게 고난이 많은지 고민하며 교회를 찾았습니다. 춘천여고를 거쳐 78학번으로 고려대 독문학과를 졸업하기까지 ‘환자’로 불릴 만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고미숙은 “너무 무식해서 자유가 없었던, 어리바리하고 허랑방탕한” 대학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준 것은 1984년 대학원 국문학과에 진학하면서 만난 ‘공부’였습니다.
“고전문학은 무조건 지구력 있는 놈이 살아남는 거예요. 재능이고 테크닉이고 다 필요 없어요. 성실함 말고는 다른 게 없어요. 한문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선배들의 혹독한 수련을 받았죠. 석사 논문 쓸 때까지 제가 겪은 글쓰기 훈련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수련으로 제 인생이 바뀌었어요. 1년 동안 단 한 번도 세미나에 빠지지 않았어요. 그렇게 돌파하니 선배들이 제가 독문과 출신인 걸 의식하지 못했어요. 공부의 기초를 집중적으로 훈련받은 그때가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어요.”
그러나 1994년 박사학위를 받은 그를 맞이한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완전히 질리게 한 것은 연봉을 얼마 줄지는 알려주지 않으면서 고등학교 성적증명서까지 떼어 오라고 요구하는 대학들의 태도였습니다.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던 것은 지도교수님처럼 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방 조교를 할 때 선생님이 어디 지방이라도 가서 자리를 비워야 조교들의 해방구가 되는 건데, 우리 선생님은 온종일 방에서 공부만 하셨어요. 잡일 없이 공부만 하시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죠. 저녁이면 조교들을 다 불러 학교 앞 ‘골목집’에 가서 모둠회랑 소주 먹는 게 1주일에 3~4회였는데 그러면서 또 사교육을 받는 거예요. 거기서 듣는 말로 논문도 쓰고, 쓰다가 안 풀리면 또 술자리 가서 묻고 또 듣고, 그게 대학인 줄 알았죠. 그런데 90년대 대학은 회의, 서류, 보고서에 시달리는 곳이 되어버렸어요.”
마르크스주의를 함께 공부하며 형성되었던 네트워크가 90년대 후반 완전히 증발하고 모두 각개약진을 하게 된 상황도 절망적이었습니다. 숫기도 없고 내성적이었지만 중학교 때부터 늘 조직을 만들어 누군가와 함께 공부했던 고미숙에게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걸 공부하는 네트워크였기 때문입니다. 대학교수직을 포기하고 네트워크까지 무너진 황무지에서 그가 시작한 수유리 공부방은 수유+너머를 거쳐 감이당까지 꾸준히 이어진 연구공동체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돈으로 그런 공동체들을 꾸려왔을까?
“종잣돈에 해당하는 건 제가 받는 강사료, 인세 등으로 충당했고, 일상적인 운영은 멤버들과 함께 꾸려왔죠. 그렇다고 분에 넘치는 건 절대 안 해요. 충분히 쓰고 남는 게 있으면 청년 백수들을 위한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죠. 공동주택이나 글쓰기 장학금 같은 것 등등. 자식이 없으면 모든 어린애들이 자식이잖아요. 제도권의 후원금은 절대 받지 않아요. 지원을 받으면 서류를 남겨야 하는데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게 서류예요. 서류가 개입하면 자발성과 창발성이 손상되거든요.”
공동체가 항상 이상적일 리는 없을 텐데 혹시 배신을 당한 적은 없을까?
“매일매일이 배신의 연속이죠.(웃음) 배신을 많이 하기도 하고 많이 당하기도 해서 저는 ‘배신의 달인’이에요. 다들 공동체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모였다가 엄청난 번뇌를 겪었죠. 그러면서 사람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됐고, 명분으로 만나고 명분으로 헤어지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감정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어요. 불교의 승가공동체, 유교의 강학원, 기독교의 수도원뿐만 아니라 바둑이나 무술을 배워도 함께 먹고 자면서 공부를 하잖아요. 그러면서 자신의 꼬라지를 알게 되고, 그러다 나락까지 떨어지기도 했죠. 그러다 문득 이게 인류가 살 수 있는 최고의 삶인 것을 알게 되죠. 번뇌가 곧 보리라는 게 이런 거구나. 이런 걸 겪지 않고 어떻게 깨달음이 오나 싶어요.”
 
비판적 글쓰기와 독설을 중단한 이유
96년에는 이문열의 <선택>을 ‘세기말을 배회하는 가부장제의 망령’으로, 99년에는 공지영, 신경숙 등의 작품을 ‘추억과 연민의 미학’으로 비판했던 고미숙입니다. 그런 날선 글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동양학을 배우면서 비판적인 글쓰기, 독설을 중단했어요. 우리가 비판을 하고 독설을 할 때는 상대방과 나 사이에 새로운 공명의 지대를 만드는 게 목적인데 그렇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논리로 싸우자고 하지만 감정을 다치게 되요. 그러면 감정의 문제를 따져야 하는데 서양 학문은 그걸 하지 않죠. 연암은 ‘남을 비판하면서 명예를 얻는 건 선비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면서 자기가 젊어서 쓴 작품을 불태운 적도 있어요. 상대방의 단점이나 허물을 통해서 내가 일어서는 것은 아무리 잘해도 예속적인 글쓰기예요. 설득을 해도 피차 자기 생각을 절대 바꾸지 않는다면 논쟁이 무용지물 아닌가요.”
여기서 더 나가면 혹시 도를 닦는 종교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의역학에다가 글쓰기까지 하려면 진짜 용맹정진해야 해요. 학기말마다 1박 2일 에세이 발표를 하면 자신의 글이 갈가리 해체되는 아픔을 맛보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자식 걱정, 남편 걱정, 돈 걱정, 온갖 번뇌가 사라지고 얼굴이 해맑아져요. 그냥 배가 고프다, 내가 살아남았구나 하는 생각만 남아요. 그렇게 지성을 연마하다 보면 영성을 터득하는 길도 열리겠죠.”
고미숙은 스스로 정의한 대로 “공부와 밥과 친구의 일치를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질문을 해도 공부와 공동체로 연결되었습니다. 기름기가 다 빠진 그의 담백함에서 종교적 향기가 나는 이유는 뭘까, 고개를 갸우뚱하며 감이당을 나섰습니다. 늦은 밤에도 감이당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열기로 뜨거웠습니다.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한겨레, 201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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