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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 영성세미나 S1] 4주차 후기: 토머스 머튼의 시간 1부&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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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밥 작성일23-02-11 14:59 조회38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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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 앞에 놓인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길이 어디에서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제 열망은

당신을 참으로 기쁘게 해드린다고 믿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그 열망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열망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 무엇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현대판 [고백록]이라고 불리우는 [토머스 머튼의 시간]은 이렇게 자신의 기도문과 함께 시작된다. 1939년에서 41년까지, 겟세마니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의 혼돈과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된 과정, 그리고 1941년부터 57년까지, 특히 수도원 원장의 지시로 쓰게 된, 자신의 영적 자서전 [칠층산][명상의 씨] 등을 출판하면서 시작된 '유명' 작가로서의 고뇌, 동시에 수도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 영적 성장의 과정이 1부와 2부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세미나를 하면서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토머스 머튼의 영적 고백에 빠져든다. 책 한장 한장을 넘기면서, 그의 평범함, 그의 열정, 그의 순수함, 그의 고민, 그리고 그의 변화가 우리에게 스며들듯 전해지고, 우리는 그가 이끄는대로, 우리 생각을 가두었던 단단한 꺼풀들을 조금씩 벗겨나간다.


첫째, 무사함과 평화의 차이에 대하여 : 토머스 머튼은 “무사함과 평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우리에게 던졌다. 우리는 답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평화롭다'라는 것은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욕망은 아닐까. 어쩌면 이 상태가 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내포한 것이 아닐까.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에 금이 갈 때,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거지?” 라고 의문을 품지만, 그것은 사실 '무사함'을 바라는 욕망이었을 뿐. 진정한 평화는 아닌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평화는 '능동적 질서, 살아있는 활력. 어떤 일이 일어나도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지, 현실의 무사함이 아니라는 사유와 함께.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막상 우리의 '무사함'을 깨뜨리는 어떤 것에 덜컥 맞닥뜨릴 때, 얼마나 사정없이 흔들릴 것인가..)


둘째
, 자발적 가난에 대하여 – 수도원 들어가기 전, 토머스 머튼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두가지라고 쓰고 있다. 글 쓰는 일과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일. 자신이 빈민가를 지키거나 바꿀 수는 없지만, 만일 하느님이 자신을 그런 가난한 삶으로 부르신다면  무엇을 해야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실 것이고 그것을 하기 위한 강한 힘도 주셨을 것라고 했다.우리는 자신들에게 물음을 던진다.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진정' 자발적 가난을 택할 수 있는가. 단순히 말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살 수 있는가. 가난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 하지만 동시에 탐욕에서 벗어난 삶을 원하는 우리들. 검소하고 단순한 삶이 지금 우리가 할 수있는 현실적 대안은 아닌가.. 등등 진솔한 생각들이 오갔다.


셋째, 소명, 공적 소유물로서의 글쓰기에 대하여 – 토머스 머튼은 글쓰기에 대해 혼돈의 과정을 수십번 거듭하면서 결국은 글쓰기를 소명으로서, 자신의 은수처로 받아들이게 된다. 수도원 들어가기 전에는 작가로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꺼지기를 반복하고, 칠층산 출판 이후 갑자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과정에서도 작가로서의 욕망, 자긍심과 함께,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글쓰기를 해야한다는 생각, 고요하게 수도자로서 수행에 매진하고픈 마음이 서로 부딪친다. 결국 소명으로서의 글쓰기로 마음가짐을 정리하기까지 그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그대로 솔직하게 자신을 보여주는 일이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음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본성을 뛰어넘는 정직함을 요구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글이 온전히 세상에 내놓는 '공적소유물'로서의 글이어야함을 깨달았다. 마치 예수님의 성체처럼. 그러기에 이후의 글쓰기에서 그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 때론 세상의 질타를 받을 부분까지 숨기지 않고 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평범한 인간으로서 '본성을 뛰어넘는 정직함'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의 일기에서 순수한 감명을 받게 되는 것인가 보다.


넷째, 정신적 어둠과 죽음, 고래와 요나에 대하여 – 어렵다. 불교 선사들이 체험하는 깊은 명상의 세계와 흡사하다. 일과 시간 중 잠시 햇빛이 비추는 동산에 앉아있으면서 토머스 머튼는 정신적 어둠을 체험한다. 차원이 다른 깊이. 3차원 세계를 경험하면서, 그는 곧바로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다. 그가 말하는 '관상'을 글로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삶 자체가 정제된 깊이에서 순수로 변하고 모든 것이 영적이 되는 시간. 하느님의 오고감, 현존과 부재가 하나임을 알게 되는 것. 모든 것이면서 아무 것도 아니, 단지 영원하고 영원할 뿐이라는 깨달음이 그에게 찾아오고,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죽음의 거룩한 진리에 대해 사유한다.

고래와 요나로 비유되는 죽음에 대한 사유
. 나의 거짓 자아, 마치 고래 뱃속에 있는 것처럼 어둠으로 둘러싸인 세계로부터 나의 참 자아인 요나를 구해야 한다. 거짓된 자아의 죽음 그리고 동시에 참자아의 탄생과 해방  – 우리도 그를 따라 고래와 요나가 되어본다. 우리 자신이 고래 속에 갇혀져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본다. 고래는 떨쳐야할 어둠이지만, 동시에 요나를 바른 방향으로 가게 해주는 '뗏목'과 같다. 마치 부처님이 강가에 이르면 타고 왔던 뗏목을 버려야 한다고 하셨듯, 우리는 우리의 고래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들. 우리는 '오래된' 우리의 고래들과 잠시 헤어져 본다.


다섯째
. 하느님과 하나됨에 대하여 – 말씀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삶으로 나타나시고 지혜 안에 지혜로 나타나시는 하느님. “제 안엔 당신이, 당신 안엔 제가, 그들 안에 당신이, 제 안에 그들이 함께 있습니다. 기질 안에 기질, 공평 안에 공평, 텅 빔 안에 텅 빔, 자유 안에 자유입니다. 저는 홀로 있습니다. 당신께서도 홀로 계십니다. 당신과 저는 하나입니다.”-- 토머스 머튼을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서원해본다. 하느님과 하나되는 우리들.


어느새 정해진 세미나 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세미나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점점 중심을 향해 간다. 우리의 마음도 뜨거워진다. 함께 한 시간에 대해 감사함이 차고 오른다. 출렁출렁. ^^

댓글목록

yeonjisu님의 댓글

yeonjisu 작성일

이렇게 저희가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시다니, 사진으로 시간을 캡쳐하듯이 세미나 시간을 고스란히 글로 담아주셨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