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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말 발표 과제 제출 - 들뢰즈 <플라톤주의를 뒤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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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늘NowHere 작성일22-04-21 20:03 조회2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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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 랭귀지 스쿨 / 1학기말 발표문 / 20220422 / !~

 

, 차이가 생성되고 있구나

- 플라톤주의를 뒤집다(질 들뢰즈) 중심 -

 

허깨비 같은 환영(幻影)

 

들뢰즈는 플라톤주의를 뒤집다라는 글에서 원본과 사본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뒤집는 환영의 세계, 즉 차이생성의 세계를 강조합니다. 지금 언급한 원본’, ‘사본’, ‘환영’, ‘차이생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려 합니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이데아는 원본입니다. 사본도 있습니다. 원본 이데아의 속성을 분유 받은, 복사된 결과물이 사본입니다. 그리고 환영이 등장합니다. 시뮬라크르(simulacre)라고도 부릅니다. 순우리말로는 헛것, 허깨비입니다. 원본의 속성이 거의 또는 무한히 없는 것들이죠. 변하지 않는 이데아, 반대로 허깨비 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환영, 이 둘은 달라도 너무 달라 보입니다. 플라톤에게는 쫓아내야 할 대상 1호가 허깨비 같은 환영이었습니다.

 

환영의 새 이름표, 차이생성

 

들뢰즈는 이러한 플라톤의 환영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환영은 격하된 사본이 아니다.’라고 들뢰즈는 썼습니다. , 환영은 질 떨어지는 사본의 한 종류가 아닙니다. 플라톤의 사본과 환영은 원본을 얼마나 닮았느냐의 관계로 정의됩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서는 원본 중심의 관계는 사라집니다.

 

들뢰즈는 2천년 넘게 허깨비처럼 지냈던 환영에게 차이생성이라는 명찰을 새로이 달아줍니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얘 차이야, 너는 원본에서 떨어져 나온 거짓 허깨비가 아니란다. 너는 차이 그 자체야. 차이생성이라 불러줄게이렇게 말이죠. 원본과 사본이라는 설정 없이 그저 차이 그 자체’(즉자적 차이)인거죠. 원본은 움직이지 않는 초월적 세계에 있는 무엇입니다. 반면 차이생성은 계속 움직이고 변하면서 경험 세계에 잠재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차이이기 때문이며, 항상 생성 중입니다.

 

인간 같지 않은 인간

 

인간을 사례로 얘기해보겠습니다. 플라톤주의 세계관에서 인간들은 다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신의 속성이 복사된(분유 받은) 사본만이 인간이죠. 반면 인간에 속하지 않는 부류도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낮은 계급 사람들, 여자, 가난한 자, 성소수자, 장애인, 환자, 기형아 등. 그들은 각 시대 문명권에서 정해진 인간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이데아적 인간에서 많이 벗어나 보이는 허깨비인거죠. 그들은 인간으로 분류되지 않았습니다.

 

21세기 지금, 우리 곁에 인간 같지 않은 인간으로 분류되는 사람은 없나요? 있습니다. 환영은 제 일상에서도 매일 나타나거든요. 저는 뉴스를 보며 저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라고 욕할 때가 있습니다. 역사를 보며 저 나쁜 놈들이라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왜 그러지? 난 그 사람이 싫어라고도 합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가만히 제 자신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제 마음 안에는 플라톤주의적 인간이라는 것이 흐릿하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본래적으로, 예전부터, DNA에 박혀 있었다고 생각되는 허구가 보였습니다. 그 허구가 기준이 되어 타인을 대할 때마다 잘못된 대상, 솎아내야 할 대상으로 분류하고 있었습니다.

 

차이생성 실험

 

차이생성은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이데아 중심이 아닙니다(동일성은 단지 차이의 결과적 생산물. 움직이지 않음(정지)은 운동(지속)의 양태임). 원본도, 사본도 없는 차이 그 자체의 세계입니다. 차이생성 세계에는 본질, 즉 원본이 없으므로 독립된 주체도, 객체도 없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없으니 그저 움직이고 흐르는 차이, 운동입니다.

 

이러한 차이생성 세계에서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차이생성에서 인간이라는 본질적 정의(定意)가 있을까요? 불변의 이데아 인간’, 그 정의는 사라집니다. 정의하려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 변화하고 있으니 공통의 속성을 잡아내어 정의내리는 행위를 할 수가 없죠. 불변의 본질이 사라지니 인간 같지도 않은 놈’, ‘싫어하는 사람을 분류해내는 판단 근거도 사라집니다.

 

말만 그렇지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저는 이번 발표를 준비하면서 한가지 실험을 해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차이가 생성되고 있구나!’라는 말을 해보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 왜 저러지’, ‘정말 싫다’.... 이런 이데아 중심적 생각에서 벗어나 보려는 실험입니다. 특히 제 감정이 싫다쪽으로 움직이려 할 때 이 말을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실험 초기이지만 저에게 조금 효과가 있습니다. 저는 당분간 , 차이가 생성되고 있구나!’를 중얼거리려고 합니다. 큰 소리로는 아니고, 혼자 마음 속으로요^^ 여러분도 같이 해보시겠습니까? 따라해 보시죠. ‘, 차이가 생성되고 있구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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