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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담의 공리주의(1학기 최종 발표문 - 오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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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잘견디자 작성일22-04-20 09:34 조회7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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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의 핵심은 우주를 바라보는 모든 기준틀은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내가 나로서 여기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 주변의 지평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에 당연히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철학을 대하는 나의 관점과 태도에는 내가 여자라는 것이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고, 그것도 힘이 세지 못한 여자이기에 제도적 틀 안에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약육강식에 내맡겨진다면 생존하기가 어려웠으리라는 나의 근본적 인식이 철학에 대한 나의 평가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 틀을 벗어난 절대적 기준과 진리가 근본적으로 있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철학사를 읽으며 느끼는 것은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바닷가에 모래성을 짓는 아이들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겁니다. 절대 허물어지지 않을 절대적 진리의 엄정한 토대 같은 것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누군가가 지은 모래성은 유별나게 웅장하거나 화려하거나 아름다워서 주변에 모래성을 지으려는 아이들에게 더 오래, 그리고 더 깊이 각인되는 정도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마도 누군가는 옆에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그 모양을 그려놨다가 자신이 집을 지을 때 그 모형을 참조해 자신의 모래성을 쌓아갈수도 있겠지요?

 

이런 점에서 약자인, 그것도 힘없는 약자였을 게 뻔한 내가 니체의 초인 논리를 듣고, 내가 초인이라 상상하며 동화되는 것은 내 스스로를 과대망상에 빠뜨리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현대 여성인 내가 오늘날 이 자리에 서게 되기까지 그나마 도움을 주었던 철학 사조에 기대고 경의를 표하는 것이 나의 당파적 입장에 어울리는 것 같아 벤담의 공리주의를 택해 글을 써봅니다.

 

이 글을 쓰며 인터넷을 뒤져보니 벤담은 1748년에 태어나 1832년에 죽은 인물로서, 괴테보다 1년 먼저 태어났고, 니체보다는 거의 100년 전에 태어난 인물이군요. 당대에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나폴레옹도 보았겠고, 바흐의 음악을 듣고, 나중에는 베토벤의 음악도 들었을 법하네요. 뉴턴의 고전역학에도 당연히 영향을 받았을 걸로 보입니다. 벤담이 속한 실용주의적인 영국 철학과는 궤를 달리하며, 조금 앞서거나 비슷한 시기의 대륙 철학자들로는 스피노자, 칸트 등이 보이네요. 

 

벤담은 사실 철학사에서 크게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도 아니기에 그동안은 그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말로 밖에 기억되지 않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짧은 말을 통해 그가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법과 제도의 형성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이번에 철학사를 공부하며 발견하게 된 가장 의외의 사실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철학사에서 기존 질서의 일정한 측면들을 비판하고 좀 더 근본적인 변혁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철학적 급진주의자들’ 가운데 하나로 분류되더군요. 벤담은 공리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전통을 따라서 자연권 사상도, 계약 이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실적 논의에 굳이 필요치 않다고 여긴 사변적 논쟁에서 출발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는 현실에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지, 즉 결과 중심적인 사고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는 권위와 정치적 정당화를 제공해주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욕구, 즉 공리(utility)와 쾌락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엘베시우스라는 선배 철학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쾌락과 고통이 인간 행동의 원인이기에, 쾌락과 고통의 관계를 바꿈으로써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즉, 입법과 정치적 권위를 정당화해줄 수 있는 토대를 ‘쾌락’이라는 가치에서 찾은 것이지요.

 

사실 그의 주장은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이기엔 결론을 도출해낸 논리적 근거나 구성에 있어서 오류가 많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논리적 구성에 있어서는 엄정함이 떨어져 보입니다. 가장 흔한 비판은 ‘쾌락과 고통이 인간 행동의 원인이다’라는 서술적 진술로부터 규범적인 것, 즉 권위와 정치적 정당화의 근거를 끌어내는 것은 논리적 오류라는 지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적인 허술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이 새로운 점은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더 일관되게 이 원칙을 법률 개혁의 지침으로 사용하였다는 점, 그리고 무엇이 가장 많은 쾌락을 제공하는지를 계산하는 체계를 개발하였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대의 행동경제학자들의 지적대로 인간인 우리에게는 쾌락보다는 고통의 계산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인간이 느끼는 쾌락과 고통의 강도에는 비대칭성이 존재한다고들 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어서 누리는 기쁨보다는 무언가를 잃어버림으로써 느끼는 고통에 훨씬 더 민감합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벤담도 공리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기보다는 부정적인 사회제도를 회피하거나 개선하는 데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공리라는 개념을 조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쾌락이라는 말은 개인주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반면, 공리는 바람직한 결과와 관련되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즉, 공리주의는 결과주의적인 윤리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좋은’ 혹은 ‘바람직한’ 이라는 행위의 판단 기준은 그 결과가 어느 정도나 ‘유용한’ 것인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입장은 칸트처럼 행위자의 윤리적 의도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 ‘선의의 윤리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리주의의 실용적인 장점은 우리가 다양한 대안들과 결과들을 비교해보는 데 있어 활용하기 편리한 틀이라는 점입니다. 다만, 이 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개념은 다수의 행복에 부합된다면 소수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게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가진 ‘정의’의 감정에 반하는 근본적인 결점을 지니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인지가 자명하다면 그에 대한 보완책을 논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의미한 현실적 실천의 주제를 던져주는 측면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벤담은 또한 유명론자입니다. 그는 개별사물들을 지칭하지 않는 ‘권리, 보편적 번영, 소유’ 같은 낱말들은 본질적으로 허구이며, 그런 낱말들의 사용이 실재를 밝혀주기는커녕 오히려 현실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고, 미혹과 조작에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명론적 입장은 종종 비합리적이고 해로울 수 있는 지배적 경향들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무기력함과 맹목을 낳게 된다는 점에서 비싼 대가를 치른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벤담은 자신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원칙을 현존 법률을 비판하는 기준으로 사용했습니다. 다만 그는 이 원칙에 따라 어떤 범죄자에게 어떤 형벌을 내리는 게 마땅한가를 따지기 보다는, 어떤 조치가 미래에 범죄를 감소시키고 인간성의 개선을 가져올 수 있는가를 묻는 데 더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몇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는 문제를 그 자체로서 바라보기 보다는 오직 그 결과가 전체적으로 사회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벤담은 법률 체계의 인간화에 기여했고, 또한 법률행위를 보다 효과적이고 보다 합리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습니다.

 

한편, 벤담이 전제한 인간관은 근본적으로 탈역사적인 존재라는 점, 자신의 쾌락을 위해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가정했다는 점에서 고전경제학의 ‘합리적 선택의 주체’로서의 인간과 근본적으로 비슷해 보입니다. 벤담은 모두가 자신의 쾌락의 극대화를 추구하면 결국 모든 개인을 위한 최선의 것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다만, 그는 그러한 조화가 자동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기에, 적극적인 입법 활동을 통해 변화를 끌어내려는 노력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어쨌건,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역사적 다양성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고 탈역사적인 추상체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라는 한계를 지닙니다. 현실을 추상화하여 모델링을 하게 되면 명확하고 파악하기 쉬워진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그만큼 모델링을 통한 정보량의 손실을 피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벤담은 처음에는 거의 법률에만 관심을 가졌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차 관심의 영역이 넓어져서 기존 사회제도에 대해 파괴적 성향이 더 강한 견해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1808년 이후 벤담은 공화주의자이자 여성 평등의 신봉자였으며, 제국주의의 적대자이자 비타협적인 민주주의자였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그의 ‘최대대수의 최대행복’은 민주주의적 감각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인권 학설을 ‘무의미한 이론’으로 단정짓는 한계도 뚜렷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저 현실에 반항하는 데 급급한 일부 낭만주의적인 흐름들과는 달리, 지속적인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이론을 세부적인 실천으로 연결시켜 긍정적인 사회적 제도 변혁에 기여했다는 점은 제가 철학사를 통해 벤담에게서 발견한 가장 인상적인 측면입니다. 벤담의 생각에 영향을 받은 이후의 벤담주의자들은 실제로 영국 정부의 제도적 개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철학사를 읽으며, 여성의 처지와 지위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면서, 저는 다시금 여성인 내가 현대에 태어난 것이 큰 행운임을 깨닫습니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우리 문명이 이만큼이나 여성과 아동의 인권을 끌어올리게 된 때가 그리 오래지 않았음도 새삼 느낍니다. 벤담보다 100년 후에 태어났던 니체는 참고로 이런 말을 서슴없이 글로 쓰곤 했습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사실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 이제까지 여자를 효과적으로 억누르고 지배했다.”면서 동양인처럼 여자를 재산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는 “여자들과 우정을 나누기 힘들며, 여자들은 아직도 고양이나 새나 잘해야 암소와 같은 존재들”이며, “남자는 전쟁을 위해, 여자는 전사의 기분 전환을 위해 훈련받게 마련이다. 다른 훈련은 다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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