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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 4강(3/10) 수업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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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그리뜨 작성일23-03-13 13:01 조회484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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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 강까지 배웠던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소크라테스의 아나키스트적인 면을 보여줬다면,  '크리톤'은 국가주의적 요소가 눈에 띈다고 할 수 있겠다  플라톤의 창작이 많이 

들어가다보니 국가, 법, 정치에 관한 내용이 많게 된다.


내용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ㅡ대중의 의견

ㅡ불의와 의

ㅡ계약이행에 관하여

ㅡ국가와 법률이 있고,

'국가와 법률'과 관련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일본 법학자가 1900 년대 전시 동원 체제하에서 전체주의 국가관을 보여주기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  크리톤의 법에 관한 내용과 '악법도 법이다'는 같은  논조라고 할 수 있는가?


●크리톤과 소크라테스의 격론

'배가 델로스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는 사형집행을 멈춘다' 라는 규범으로 인해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에게 탈출을 권한다. 아테네의 영향력이 적은 북쪽 마케도니아 쪽을 제안했고, 자유 민회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아테네인들은 북쪽 제국의 지배를 원치 않았으며, 소크라테스 또한 거절한다. 

친구인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하게 된다면 얼마든지 빼낼 수 있었는데도 방관했다는 대중의 지탄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웠다.

펠로포네소스 전쟁후 30인의 참주정 하에서는 아테네인에 대한 대규모 처형이 있었고,

이를 모면하기위해 돈으로 매수하거나 도망을 가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 통념이었기에 크리톤 또한 친구 소크라테스가 그런 통념에 따라 행동해주길 원했던 것이다.

즉, 크리톤은 대중 의견을 중시했고,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추구하는 이상이 중요하기에 사느냐  죽느냐는 개이치 않았다고 할 수있다.


ㅡ그리스는 대중 의견을 중시하는 사회였고,

대중(Demos)을 선동하는 선동가들이 나타나게 되고, 악의적 선동을 하는 지배층을 막고자 도편추방법이 등장하기도 했다.

대중을 통치하는 가장 흔한 방식이 다수결 원칙이고, 다수가 동의했다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다수결 제도의 균열'이 곧 민주주의의 근본 모순이며,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당면 과제로 목도하고 있다. 


------>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라고 했는데 언뜻 

이해는 가지만 그렇다면 올바른 방법은 무엇인가?


----->언론사마다 나름의 정의를 갖고 있는데

가치가 충돌할 때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ㅡ 가치의 충돌로 인해 aporia에 빠질 수 있고, 선동가는 

대중이 정치 허무주의 또는 무관심에 빠지도록 하면서 정치의 종교화 맹목적 믿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가치와 충돌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보자.


●내적 일관성과 변용

소크라테스는  대중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내적 일관성'을 고수했다. '내적 일관성'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주류 철학 전통에서 중요시하는 덕목이지만  '내적 일관성'이 언제나 참인 것은 아니다.

'내적 일관성'과 '변용'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면, 자신이 깨지지않는 범위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적응을 진정한 '변용'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공자의 '인(仁)'을 그의 '내적 일관성'이라한다면(진혜린 샘 의견), '인'이 실제 생활에서 발현 될 때 부모 자식 간에는 효(孝), 형제 간에는 제(悌), 타인 간에는 예(禮)로 '변용'되어 발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저의 의견)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사형을 내린 법률에 저항하는 것을 '내적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polis 안에 거주하는 한 법률적 보호를 받으며 나라와 법률에 암묵적 합의를 했던 사항이기에 법률적 관계에서 태어난 사람은 이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법률에 복종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 소크라테스의 국가관을 알 수 있으며, 이는 플라톤의 국가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법 제정의 폭력성'을 간과한 것으로 '법은 항상 옳은가'  '소크라테스를 죽게 만든 국가 권력은 정당한가' 라는 반론이 가능한 국가관이다. 


●소크라테스 문제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사인(私人)의 입장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좀더 자유로운 아나키스트에 가까운 모습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는 재판정이라는 객관성이 담보된 형식의 변론이기에 가능했다. 이에 비해 <크리톤>은 플라톤의  창작 과정이 많이 개입되면서 국가와 법을 지키려는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대조를 이루며 더욱 강조되고 있다. 플라톤이 만들어낸 소크라테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창작도 남기지 않았고, 그에 관해 쓰는 창작자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다양하게 해석되기 때문에 이를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한다. 아래의 서 버전이 있다.


ㅡ아리스토파네스

ㅡ크세노폰 

ㅡ플라톤


플라톤의 뛰어난 창작물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도 소크라테스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ㅡ소크라테스를 공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플라톤의 국가관을 살펴보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요즘 내가 고민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내용이 나와서 깊은 공감을 하며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 1 인1 표제라는 것이 평등해 보이지만, 개인간 차등의 다양한 스팩트럼과 객관적 판단을 가로막는 수많은 정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현대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을까? 


------> 근소한 차이의 결과에도 다수결 원칙에 따라 내려진 어리석은 선택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 


------>법치주의를 편법으로 빠져나가는 권력자들을 보면서도 소크라테스처럼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법치주의를 지키는 것이 옳은가? 그로인해 공동체가 겪어야하는 손실은 어찌되는 것인가?


♤2500 년전 아테네 폴리스에서의 소크라테스와 크리톤의 논쟁이 현재에 그대로 소환 적용됨에 놀랍고 의미있는 수업이었습니다♡

댓글목록

반야수님의 댓글

반야수 작성일

질문을 많이(?) 올리셨네요. ㅎ 질문을 해나가는 과정만으로 공부가 될 듯 합니다. ^^

진솔한님의 댓글

진솔한 작성일

올려주신 글을 읽으며 정치 허무주의에 빠져있는 저를 돌아보게 됩니다.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에 대한 답을 아직도 못찾고 있어서요. 소크라테스와 공자를 공부하고 임꺽정을 만난 후에는 답 근처라도 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후기 잘 읽었습니다. ^^

김에세이님의 댓글

김에세이 작성일

타인의 삶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의 생각에 올바른 주석을 달았다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상대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만다는 그 지점에서 생각이 꼬이고 엇갈려 버린다면 중의적인 표현만 표류겠죠.
 
한 사람을 입체적으로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만약 타인에 대한 시야의 협소성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변용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 까요. 내 주장이 상대가 말한 뜻을 초과되지 않도록 신중해 봅니다.

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