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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기 3주차 조선의약생활사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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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별나무 작성일16-07-29 16:41 조회3,0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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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낭송스쿨/8/2/이소은

의 동반자,

 

왜 의약생활사인가?

병의 치유와 관련된 행위는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이고 시대적 조건에 따라 그것이 어떠한 모습을 띠었는지 아는 것은 생활사 연구의 주요 대상이 된다. 환자의 관점으론 구체적으로 낱낱이 환자의 병력과 다양한 형태의 의료 추구 행위, 의료의 현장, 간병의 모습 등이 생생히 포착된다. 의학 역사서들이 의학 지식과 기술의 발전에 초점을 맞춘 것과 그 관점이 다르다. 따라서 그것을 밝힘으로써 역사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람들의 의료생활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병앓이를 둘러싼 일상생활의 온갖 측면은 그 시대의 환자문화가 될 것이다.. 즉 환자의 일상사를 그려볼 수 있다.

 

환자의 역사에 관한 선행 연구들

1970년대까지 서양에서도 의료의 사회사와 생활사 연구는 거의 전무했다. 1980년대 이후푸코의 영향 안에서 의료를 근대권력이 작동하는 매커니즘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그중에서도 디그비의 연구는 영국 사회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미국에선 1760년부터 현재까지 의사집단이 전문직으로 변화하면서 권력을 쥐게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1990년대 후반 동아시아 지역에서 새로운 연구가 출현했다. 대만 학자 리전더, 중국 학자 양뉘엔친은 근대적 전환기의 중국의 변화를 살피며 정치권력이 어떻게 환자의 일상에 영향을 주었는지 밝혔다. 일본은 스즈키 아키라가 에도시대 환자와 의료에 얽힌 에피소드를 엮어 책을 냈다.

한국은 일기의 분석을 통해 환자의 일상생활을 확인하는 작업이 여럿 출현했다. ‘유만주라는 인물을 통하여는 18세기 후반 서울의료상황의 역동성을 밝혔다. 김헌영의 . . : 16세기 질병치유의 여러 양상과 이복규의 묵재일기에 나타난 조선 전기의 민속에선 조선전기 환자의 일상 의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국내외의 흐름으로부터 한국의 의료생활사를 연구가 시도되었다.

 

책의 주안점과 구성 및 한국의학사 연구 동향

이 책은 한국의학사의 관점을 환자를 중심으로 의약생활 현장에서 파악하기 위해 씌여졌다. 이런 관점에 따라 조선시대 질병사, 의료사, 의학사를 중심으로 진행된 연구는 기존의 연구와 크게 다른 결론을 제시할 것이다. 이 책은 궁극적으로 한국의 역사에서 보이는 인간 보편적 존재로서 환자의 병앓이를 통해 환자의 의약문화에 나타난 한국성이라는 고유의 문화적 특성을 밝히고자 한다.

책의 구성은 1부 한국 고대~고려의 의약생활사 탐색. 2부 조선의약생활지: 묵재일기 속으로. 3부 조선시대 의약생활의 대변화로 되어 있다.

연구 동향은 근대 이전엔 분석대상 연구 편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의학일반, 의학학술, 보건의료,, 질병, 도교양생술등 단순히 주제별로 분류했다.1977년 노정우가 한국의학사를 정리했다. 현재, 한국의학사 연구는 폭도 넓어지고 내용도 심화되었다. 한국의학의 자주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시도되고 있으나 아직 미흡하다. . . 일 관계에서 우리의 위상, 전통사회에서 의학권력, 의학과 여성 등 연구할 주제는 풍부하다.

 

조선의약생활사 전사(前史)

 

. 한국 고대 의약생활의 탐구

삼국사기』『삼국유사』『일본유사등을 총망라하여도 한국 고대 의학사 700, 그 이전의 선사시대까지 포함하는 긴 시간에 남아있는 사료가 별로 없다. 자료의 한계 때문에 그것을 해석하는 일은 미진할 수밖에 없다. 이 부족한 사료로 한국고대 의학을 탐구함에 있어 무엇을 물을 것인가?”는 가장 중요하다. 자료만 충분하다면 고대의 병앓이를 둘러싼 일상생활의 온갖 측면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조그만 흔적들도 생명력을 갖고 지금까지 의미 있는 자취로 찾아낸다.

부실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드물게 특정목적의식을 갖고 서술한 부분이 있는데 전염병이 그것이다.삼국사기에서 ()’을 역사가 주목해야 할 하나의 범주로 인정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고대국가 체제가 된 후 역병은 역사적 현상으로 취급했다. 이란 글자는 은나라의 갑골문에도 보인다. 후한 때 허신은 역을 백성이 모두 앓는 것이라 정의하기도 했다. 또 귀신의 소행으로도 보았다.

삼국사기에선 집단적인 병을 우레, 홍수, 가뭄 등과 같은 자연재해 중 하나로 취급했다. 역은 삼국초기부터 통일 신라 때까지 일관되게 재이(災異)로 기록되어 있다. 다른 재앙과 마찬가지로 산천대천 등에 제사 지내는 행사가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역병의 유행이 의학적 대책과 관련된 점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한 자연적인 의학과 의료제도의 시작

삼국사기는 통일신라의 역사를 다룬 정사이다. 여기서 신라의 의학 관련 관직으로 세 가지를 언급한다. 의학은 효소왕 원년에 두었다. 학생에게 본초 경, 갑을 경, 침경, 맥경, 명당경, 난경 등을 가르쳤으며 박사 2인을 두었다. 이 의학은 중국 당의 제도를 본받아 설치한 것으로 아마도 교수 2인 중 1인은 침을다른 1인은 약을 맡았을 것이다. 약전이라는 관청이다. 아마도 각 지방에서 올라온 국산 약과 수입 약을 수납, 보관하는 기관이었을 것이다. 공봉의사로 일반적인 의사 중 특별히 왕에게 공봉하는 의사, 즉 어의을 일컫는 듯하다.

김부식은 신라의 의료제도가 어의, 의학교육, 약관리 등을 갖췄음을 정사 안에 담았다. 이 제도는 1894 갑오개혁 이전까지 국가 의료제도의 중추로서 계속 지속되었다. 그는 고구려, 백제의 제도에도 관심을 두었다. 김부식은북사를 인용하여 백제 관직 중약부(藥部)’가 있음을 밝혔다. 고구려는 아예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다.

 

백제의 풍속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시하고 경전과 역사책을 애독하고, 글짓기를 잘하고 공문서 작성에 능숙하고, 또한 음양오행을 풀이하고 송의 원가력을 이용한 역법을 정하고, 또한 의학과 약학, 복술과 점술 및 관상 보는 법을 안다. 투호, 저포, 등의 놀이가 있고 또 바둑과 장기를 즐긴다. 비구와 비구니 등이 있는 절이 매우 많으나 도사는 없다.(49)

 

북사에 나타난 이 인용문은 6세기 백제의 학술, 천문, 의약, 점복술 등 전문적인 학문, 생활과 여가, 불교와 도교 등의 상황을 모두 언급했다. 모든 것이 다 잘 갖춰진 고급문화임을 드러낸다. 즉 의약도 중국에 버금가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에 이르러서는 시스템이 더욱 완비된다.

한국의학사에 562년은 의미 있는 해이다. 신라가 대가야를 통합한 것이 562년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엔 일본이 고려를 침공하여 귀국할 때 오나라 사람 지총을 데리고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이 책은 임나본부설을 고의로 심어 놓아 비판을 받고 있다. ‘지총의 경우도 그는 일본의 고구려 정벌에 관련되어 있다. 고구려 정벌은 더 넓게 임나본부설과 관련된 문맥 속에 있다. 아직 한국의학사 연구는 정치적 맥락을 배제한 해석이 많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많다.

여하튼 지총은 내외전, 약전, 명당도 등 의서 164권과 불상 1, 기악조도 1구 등을 가지고 입조했다. 지총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도달한 게 아니라 한반도의 어딘가에서 일을 하다가 승전하는 일본장수를 수행해 일본에 간 것으로 추정한다. 6세기 후반 의학지식은 중국(남조의 오)한반도(삼국)일본으로 전달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 고유의 의학도 전달 되었다. 452년 일본에서 백제에 양의를 초청하자 백제에선 고구려의사 덕래를 보내 주었다. 이로 미루어 5세기 무렵 삼국의 의술 수준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지역에서 발전한 여러 치료법은 전국시대 말 ~ 한 대에 의학으로 통합되어 갔다. . 음양. 오행 등의 이론에 따라 몸의 오장육부, 병의 원인, 진단법, 경맥, 치료원칙, 약의 작용, 치료법, 침법 등이 설명되는 식으로 통합되었다. 중국의학사에 잘 알려진 황제내경 소문 영추』『영추 등이 이론화의 대표적 책이다. 168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왕퇴에서 발견된 의서백서는 경맥의 명칭이황제내경과 다른 것으로 보아 아직 한의학의 이론화가 통일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중국 양나라 도홍경이 편찬한신농본초』『명의별록또 그 주석서에 고조선, 현도군, 백제, 고구려 등의 명칭이 약재 10종의 원산지 표시에 보인다. 토사자, 단웅계, 마륙, 인삼, 세신, 오미자, 무이, 곤포, 오송, 금설 등이 언급되었다. 후대에 다른 약초도 교류가 많았지만 이 중 인삼이 대표적이다. 송대의 증류본초에서 인삼은 백제의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모습이 가늘고 굳으며 희고, 기미는 상당 산보다 박하다. 그다음이 고구려산인데 모습이 크나 물렁물렁해서 백제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중국의 인삼사랑이 엿 보인다.

 

쉬어가기--신라법사비밀방의 내용

정력론 : 법사가 제시한 방법에 따른다면 음경이 놀랄만큼 커지고 쇠몽둥이처럼 단단해진다는 것이다. 더욱이 몸이 튼튼해지며 기력이 세지고 무병장수 한다.

원문--한 번만 발라봐라. 열 번, 스무 번 마음대로 할 수 있다............한여름에는 찬 기운이 몸에 솟아 더위를 쫓고 한겨울에는 따뜻한 것이 솟아 사기를 막아 재앙을 물리친다. 바르면 바를수록 나날이 음이 커진다......”

이 약은 무엇일까? 바로 노봉방, 즉 말벌집이다.

 

일본은 808년 고대약방을 모은대동유취방을 편찬하였다. 여기엔 10건 이상의 백제, 신라, 가야, 고려 등의 처방이 실려 있다. 수나라 때의천금방당나라의외대비요일본의의심방같은 의서가 우리의 의사(醫史)에는 없다. 한국 최초의 의서는 13세기 고려 때 편찬한향약구급방이다. 15세기 조선 세종 때 이르러서야 향약집성방(85),의방유취(266)가 등장한다.

 

고대 의약생활의 흔적

정사인 삼국사기에 나타난 의약생활 관련기록은 고구려 1, 백제 0, 신라 2, 통일신라 2개 정도의 기록이다. 6세기 전 것으로는 고구려 유리명왕 때의 것이 유일하다. 내용은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나 힘줄을 끊은 것에 왕이 노하여 그들을 구덩이 속에 던져 넣어 죽였다. 이후 왕은 병을 얻었다.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와 사비가 빌미가 된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은 사람을 시켜 사과하니 곧 병이 나았다.

여기서 환자는 유리명왕이며 의료시술자는 무당이다. 병의 원인 파악을 무당이 했으니 풀어주는 것도 무당이 했을 것이다. 위 기록은 선정을 지향하는 통치와 관련되어 있다. 다음에 등장하는 기사는 무려 500여 년을 훌쩍 넘은 528년 신라 법흥왕 때의 일이다. 왕녀가 병으로 사경을 헤매는데 고구려 승려 묵호자가 향을 사르고 발원하여 병이 나았다는 기록이다. 향이란 부처의 신성한 가르침으로 이끄는 매개체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신라에서 불교의 공인을 이끌어낸 이차돈의 순교이다. 이것은 불교가 뿌리내리는 감동적인 순간의 한 계기로서 불교적 치유의 기적 장면이다.

삼국유사에서 환자에게 의약으로 치료하는 장면이 한 차례 나온다. 통일 신라 헌덕왕 때 어의가 상대등의 맥을 짚어 병이 심장에 있는 것이라 진단하여 용치탕이라는 탕약을 처방한다. 그럼 보통사람들은 병에 걸렸을 때 어떻게 했을까?삼국사기는 별로 관심이 없는데 백성의 를 칭송해야 하는 부분에 지면을 할애했다. ‘향덕열전에 웅천주에 사는 향덕이 가난하여 어버이를 봉양할 수 없게 되자 허벅지 살을 베어 드렸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여기서 인육, 즉 살을 베어 먹이는 처방은 기운을 북돋게 함과 동시에 악병을 이겨내는 치유의 기운을 암시하고 있다. 이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종종 등장한다.

또한, 난치. 불치병에 대한 불교적 치유 기적은 계속된다. 대표적 인물로 밀본법사의 덕행과 고승 혜통이다. 선덕왕 덕만의 오랜 병을 밀본이 고쳤다. 약사경을 읽고 육환장을 침실로 날리며 영력으로 치유했다. 영력이 얼마나 센지 법사가 도착하기도전에 대력신이 귀신들을 잡아가는 놀라운 치유술을 발휘했다. 이들은 밀교승으로 추측된다. 경전 독경 대신 주문 등 법술로 병을 고쳤다.

 

고대의 병 개념

()’이란 말은 2천 년 전에도 현재도 같은 의미로 쓴다. 기원을 따지긴 힘들지만 신체의 이상을 표현하는 명사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삼국유사에 담긴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에 환웅이 홍익인간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백성의 생명과 병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병을 다스리는 것이 나라의 통치행위의 하나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삼국유사』『삼국사기에 나타난 병의 원인과 치료엔 난치병인 경우 귀신이나 도교적 색채가 짙다. 의학의 영역 안에서도 불교적, 도교적 주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 고려사람 이규보의 의약생활

고려시대는 민간의약생활의 생생한 모습을 담아낸 개인일기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이전시기보다는 의약내용이 풍부하다.고려사』『고려사절요등의 관찬자료와 이규보의동국이상국집을 통하여 최소한의 의약생활사를 시도 할 수 있다.동국이상국집에는 단일 필자에 의한 개인적 관심으로서 병앓이, 의원과 약재 및 치료법, 연단술과 신선술, 삶과 죽음에 관한 태도 등을 비롯하여 국가의 역병 대책 등에 관한 기사가 풍부하게 존재한다. 이규보 시대에 국산 의서로 향약구급방』『어의촬요방』『비예백요방이 편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종은 고려시대 대표적 의서이다.

 

이규보의 병력(病歷)

1168(의종 22)1241(고종 28). 고려 후기의 대표적 문신·학자이다.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9세 때 이미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14세 때 성명재의 여름 과거에서 시를 지어 기재로 불렸다. 많은 저서가 전해지는데 이 단원의 주요 논점은 그의 병력으로 본 고려시대의 의약생활사이다.

그는 1세 때의 종기부터 29세 소갈병, 30세 손병앓이(手病), 30대 초반 전주목 시절의 쇠약병, 44세 안질, 50대 지팡이를 짚다, 60대의 장기간 병앓이, 74(1241) 안질과 죽음을 겪었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병과 매우 친밀하게 지냈음을 알 수 있다. 미스테리는 이렇게 골골하면서도 그 시대 평균수명 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자신의 병을 다스릴 수 있는 학식과 약재를 구할 수 있는 신분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추측한다.

소갈병을 앓을 때, 너무나도 야위어 벗조차 못 알아 볼 정도로 그는 지쳐있었다. 또한 그의 심정을 묵은 서적은 다 흩어지고 약보다경만 남았다.”(101)는 은유적 표현으로 표현했다. 요양을 위해 화개사, 대곡사를 찾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 사회에서 와병 때 사찰을 이용한 풍습이 있었던 것 같다. 35세 때는 동래온천을 찾았다.

63세 때 겨울 그는 위도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 1월 고향인 여주로 양이했다. 귀양에서 풀려났어도 그의 병고는 계속되었다. 그는 병시(病詩)를 지어 위안을 삼기도 했다. 조물주는 그윽하여 보이지 않으니 무엇으로도 형상할 수 없네. 반드시 스스로 생긴 것뿐이니 나를 병들게 한 자 그 누구이겠나?” (107)물었다. 70세 때 그의 관직은 태자의 선생이면서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이면서 온갖 외교문서를 도맡아 지었다. 관직은 높지만 건강은 따라주지 않았다.

그는 백낙천의 병중십오수에 화답하는 형식으로 장문의 병시를 지었다. 73세 이규보는 오랫동안 병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이 와중에도 토란을 보내 준 의원에게 감사의 글을 보냈다. 74, 눈병의 고통이 심해지자능엄경을 외우는 한편 용뇌를 구해준 실질 권력자 최우에게 감사의 시를 지어 고마움을 나타냈다. 그는 고통으로 시를 짓지 못하는 심정을 말한 며칠 뒤인 92일 세상을 떴다. 그는 사생과 수명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봤다. 딸의 죽음 앞에서 조물주가 이미 내어놓고 다시 갑자기 빼앗아가니 영화와 시듦이 어찌 그리 덧없는가. 변과 화가 속임수만 같구나. 오고 가는 것 다 허깨비이니 이제는 그만이야 영원한 이별이구나.”(116)라고 읊었다.

 

이규보의 의학관

그의 작품에는 신선술과 연단술에 관한 수십 편의 글들이 있다. 도교는 수양의 일환이기도 했다. 도안에 분향하며황정경을 읽으니 하루 종일 대사립 두드리는 사람 없다.”(120)는 구절과 같이 그는 도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영단과 신선은 이규보에게 고달픈 현실을 초월한 꿈이나 가상세계안의 존재였다. 속세에서 그의 몸은 영기와 위기가 부조화하여 고통을 겪고 있지만 신선의 세계에선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나, 그는 신선은 꿈꾸되 불사약은 믿지 않았다.

세시풍속의 기록으론 벽온단, 신명단은 역병을 쫓기 위해 매해 설날 한 알씩 먹어야했다. 중구절(99)엔 산에 올라 국화를 씹으며 국화 술을 먹었는데 병에 안 걸리고 오래 살기 때문이다. 그가 지은 노무편은 무당의 굿에 대해 묘사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그는 무당, 판수, 성황신을 믿지 않았다.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보통 병이 들었을 때 의원과 무당을 찾고 기도에 의지했다.

 

국가의 의()제도

중신의 질병 때 왕이 의관과 약 등을 보낸 기록은 고려시대 묘지명에 종종 나타난다. 묘지명의 주인들 공통점은 신분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임금 또는 정계 실력자의 의약 제공은 사적인 측면에서 이뤄진 게 아니라 공식 의료제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의원의 소속은 시어의와 직장은 상약국(尙藥局), 의정은 태의감(太醫監)에 속한다. 임금과 문무관의 진료 외에도 의원의 양성, 역병 구료, 약재의 수급 등은 국가적 차원의 일을 했다.

 

의인(醫人)

이규보는 의술을 펼친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기사 넷을 남겼다. 첫째는 명종 때의 일엄이다. 그는 자칭 세존이라 칭하며 주목을 끌었지만 사기임이 밝혀졌다. 둘째는 문종의 아들인 광릉후 왕원, 셋째는 진각국사 혜심이다. 이 밖에 명의 구. 낭중(벼슬이름), 신집어의촬요방을 엮은 시중 최종준이 있다. , 3대째 의업을 이어온 윤응첨도 등장한다. 의술 3대를 장점으로 나라를 도운 것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벼슬도 높았다. 윤응첨의 벼슬이력은 의관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하여 많은 정보를 준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의학으로 출세하려는 자는 태의감 등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의원이 되는 길은 가업, 독학, 민간에서 의원에게 사사, 관에서 설치한 의학에 들어가 학습하는 네 가지 길이 있었다. 의원의 학습을 표준화하는 구실을 한 것은 과거였다. 1136년 확정된 의과에 도전하려면 의학의 기초이론과 침구법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임상을 펼치기 전 필수과목이다.

 

처방들

어의촬요방의 처방은 다수의 고급 약재를 필요로 한다. ‘만백성의 생명을 구제하기엔 사향, 우황, 용뇌, 인삼 등 일반적으로 쓰지 못할 약재가 다수 있다. 왕실이나 유력 가문 외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고급 약이 포함되어 있다. 이 처방은 약재의 구애됨 없이 최상의 처방을 모은 것으로 이해된다.

향약구급방1236년 강화도에 설치된 대장도감에서 찍었다. 몽고 침략으로 강화 천도 시기인 비상시국이었을 때다. 이 책의 편찬취지는 우리나라 백성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고 쉽게 구할 수 있으며 복용법도 용이하게 했다. 향약 180종에 대해 속명, 약미, 약독, 채취법들을 쉽게 설명했다.

 

 

나라의 역병과 재앙에 대한 대책/ 고려 사람의 의학지식

역병은 하늘의 재앙이라 여겼다. 여러 신들에게 제사 지내고 칠귀와 오온에게 초례를 지냈다. 이규보는 빨리 병을 낫게 해달라는 축원문을 쓰기도 했다. 그가 한림원에 있을 때 두 차례 역이 돌았다. 그는 두편의 <소룡도량문>을 지어 부처님의 자비를 구했다. 그는 <약사도량문>를 지어 왕정의 융성과 호국을 빌었다.대장경이 완성되자<도량 음찬시>를 지었는데 순식간에 재앙 모두 사라지고, 씻은 듯 오랑캐 소탕하니 강산 맑아졌네.”(161)구절에서 간절한 염원을 엿볼 수 있다.

중국에선 북송대에 이르러서야 신유학의 풍토아래 의학을 깊이 공부하는 士人이 등장한다. 고려의 경우도 비슷한 경우로 추측한다. 인명을 살리는 의학과 인명을 살리는 정치를 등가로 표현한 말도 나타난다.

태평성혜방은 송에서 출간된 이후 고려에서 꼭 얻고 싶어 했던 의서이다. 1022년 송의 황제로부터 이 책을 하사받았고 고려는황제침경9권을 보냈다. 이런 교류는 고려의 의학이 세계(중국)와 동일한 의학지식 지반을 공유하도록 하는 구실을 했다. 송나라 사람 서긍은 당시 고려의 의약상황을 정리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고려의학사에 관한 연구는 실제 의서 분석이 시도됨으로써 기존의 연구와 질적 차이를 보인다.향약구급방은 민을 위한 의서이며비예백요방은 향약 위주의 의서이면서도 구급방 차원을 넘어선 일반의서임을 밝혔다.

 

 

여기 까지 내용은 이 책 조선의약생활사의 인트로이다. 기원의 단초를 잡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나라의 상황까지 여러 관점을 아우르느라 내용이 많아졌다. 이해 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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