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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시 문장이란 무엇인가? 수업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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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로보기 작성일15-03-15 20:07 조회3,5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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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15 문장이란 무엇인가 이용휴 수업후기/이흥선

평생 문장가의 삶을 선택한 이용휴

대부가 될 수 없는 처지로 선비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엇이 되고 무엇을 할 것 인가를 사(士)로서 보여준다.

선비에게 독서란? 존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존재의 이유 즉 살아 있음에 대한 글쓰기였다. 내 존재를 넘어서는 것은 문장을 쓰는 것이다. 선비로서 글쓰기를 했다.

남인 출신의 이용휴는 생원 벼슬에 합격했으나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성호 이익의 둘째형 이잠의 죽음 때문이기도 했다. 이잠은 1706년 남인을 변론하고 노론을 비판하며 국정쇄신의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로 국문당하다 죽었다. 또 다른 이유는 몸이 약해서 섭생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성장해서도 어머니의 뜻을 지켜 섭양을 두려워하고 삼가는 것이 보통사람과 달랐다고 한다. 관직에 나가기보다 백수로서의 만족한 삶을 찾았다고 할까? 자신의 병약함을 결핍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보신에 힘썼다. 병약한 신체에 자신의 신체의 리듬을 딱 맞춰서 살아가면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신선과 같이 소요했다고 할 수 있다. 문장이 세상에 알려져도, 마음에 집착하지 않았고, 서화가 서가에 넘쳤어도 다만 뜻을 표현 할 뿐. 생명을 손상시키고 심성을 해치는 것을 일체 멀리 피했다.

신선처럼 살았던 혜완의 자기를 증명하는 방법은 오직 문학적 글쓰기였다. 전업 문장가로 산다는 것은 그만의 글쓰기로 승부한다는 말이다. 혜완에게 글쓰기는 출세를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글쓰기는 생활이자 그가 사는 이유였다. 그러니 어찌 남과 똑같은 글쓰기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혜완에게 문장은 세상과 소통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세계를 드러내고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혜완은 오직 붓 한 자루 쥐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존재들의 족적을 남기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만의 색채를 오롯이 드러내는 특별한 글쓰기가 필요했다. 하여 혜완은 그 누구도 닮지 않은 그만의 글쓰기에 골몰했다. 글쓰기는 존재의 이유이고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찌 모방과 표절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처럼 평범하게 사는 사람처럼 그 속에 특별함을 드러내는 글을 갈고 닦았다. 그런데 내가 글을 못 쓰는 이유는 내가 가진 능력보다 더 욕심을 부려서다.

기궤한 문장의 선구자

한유, 당송 8대가, 소식 구양수등의 고문은 성현들의 글을 모방 글이다. 예전 문장의 내용과 뜻을 모방한 것을 고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고문도 모방과 표절은 배격한다. 뜻은 모방하지만 문체와 문사는 모방하지 말라고 한유 소동파가 말했다. 모방이 아니라 성현의 뜻을 자기 식으로 시대에 맞게 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16세기에 우리나라에 고문이 들어왔다. 16-18세기 동안 산문을 쓴다면 고문을 들었다. 논어 맹자 글쓰기 한유 당송 8대가 소식 구양수등과 같은 사람들이 썼던 문장의 형식으로 글을 쓰는 형식의 글이 열풍이 불었다. 이런 글은 18세기까지 이어졌다.

고문이라는 것은 고문이라는 방식의 글을 계속해서 모방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죽은 글쓰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문의 격식에 반기를 들고 고문의 형식에서 벗어난 글쓰기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이 김창엽을 비롯한 백수 지식인들이었다. 문장가로서 생기를 찾은 사람은 이용휴였다.

그는 생기를 명.청시대에서 유행했던 소품에서 찾았다. 소품문이라는 것은 글이 짧고 내용도 일상의 단순한 하찮은 것도 다 글쓰기에 들어오는 형식이었다. 근본 뜻이 이렇기 때문에 고문과는 상대적으로 아주 다른 글쓰기 형식이었다. 고문은 상당히 큰 거대 이념을 이야기 한다. 소식과 한유도 거대 이념 속에 이데올로기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소품은 그런 것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소품은 거대 이념보다 일상의 어떤 사건들, 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삶의 이치들 그것이 가벼운 것일 지라도, 단순한 것일 지라도, 그런 것을 드러내는 방식의 글쓰기였다.

거대이념을 드러낼 때는 정서자체가 단일하다. 하나로 간다. 그래서 도덕윤리와 당위를 주장하는 사람은 글이 하나다. 그런데 거대윤리를 벗기고 일상의 모든 것을 다루는 글은 일상마다 가지고 있는, 사물마다 가지고 있는 특이성을 드러내는 것에 글이 집중을 한다. 이렇게 되면 거대 이념은 몰락하는 것이다.

15-18세기의 성리학 주자학이라고 하는 거대 이념을 소품문을 통해서 성리학이라는 것을 무너뜨릴래, 저항 할래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 이념에 대한관심이 사람들에게서 사라진다. 그냥 매순간 변화한 자연에 순간성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매뚜기가 뛰면 어깨 죽지에 관심을 갖게 된다. 사물하나 하나에 관심을 갖게 되지 사물을 통틀어서 대단하고 당위 할 수 있는 윤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대한 절대 진리가 이세상의 단하나의 진리 있던 세상에서 진리는 매순간의 진실이라고 이름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글이 달라졌다. 이것이 문장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혁신이었다. 그런데 이글은 고문에 대한 저항, 고문이 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저항이었다. 모든 것을 단일화하고 단일 진리가 있다고 하는 세상에 대한 저항 진리자체도 변할 수밖에 없다는 그 시대에 따라 그 상황에 따라. 그런 것을 담은 것이 소품문의 형식이다.

그런 글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이 이용휴다. 당대에 기궤한 문장을 쓰기에 유명했다. 기궤함은 그로데스크와는 다른 새로운 글쓰기였다. 전혀 다름의 기이함이다. 소품문이 기이함을 어느 누구도 쓰지 않는 문장을 쓰지 않기 때문에 기궤하다고 했다. 혜완은 소품문의 실질적 개척자이자 문장에 소품문의 기이함을 본격적으로 점화한 장본인이었다. 이덕무 박제가 이옥 연암의 문장을 확장되게 하는데 중심축에 있었던 사람이다. 이덕무는 하찮게 느껴지지만 이용후의 글에서는 어떤 깨달음을 느끼게 한다. 그게 이용휴가 가지고 있는 문장의 뛰어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고양이를 상상하면 쥐구멍을 지키고 있다가 쥐를 잡는 것을 상상하지만 유독 고양이가 꽃과 나비를 희롱하는 것을 그렀다. 이것이 곧 문장가의 번안법이 화가 김명로의 그림에 대한 비평문이다. 구구하게 늘어놓지 않고 핵심만 말한다. 짧으면서 핵심을 드러내는 글이 소품문의 전형이다. 이것이 문장가의 번안법이란다. 시선을 조금만 바꾸면 된다. 문장은 자고로 모방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이다. 기존의 문제와 상상을 뒤집는 글 그것이 바로 기궤한 문장이다.

혜완은 새로움을 이 세상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을 보여 주고자 했다. 우리의 글쓰기에서도 남들이 보지 못하는 미세함 다른 일상을 보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보지 않는 미세한 다름을 잡아내는 것 이것이 내용형식을 바꾸는 번안법이다. 이것이 글의 천양지차를 보여준다.

삶도 마찬가지다. 같은 패턴을 반복하면서 그 패턴의 반복을 모르면 다람쥐 쳇바퀴처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 자신의 글을 모방하는 것은, 똑같은 패턴을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이 글을 말해준다고 하는가 보다.

혜환에게 글쓰기는 삶이 별개가 아니었다. 글쓰기에서 전범을 거부하는 것은 세상의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행위와 연결된다. 글을 모방하는 문제는, 생각을 모방하고, 삶을 모장하는, 문제와 별개의 사안이 아니다. 글은 우리의 인식이자 세계에 대한 해석이다. 그러니 남과 똑같은 글을 쓴다면 세상을 똑같이 해석할 게 뻔하다. 혜환에게 그 누구도 아닌 나로 돌아간다는 것은 문장을 바꾸는 일이자 삶을 바꾸는 일이었다. 바꿔 말하면 나의 목소리와 나의 사유를 담은 문장을 쓰면 삶에서도 나의 목소리와 나의 사유대로 살 수 있다.

욕을 하고 있을 때 즉각적으로 멈추는 것, 하고 쇼핑을 하고 싶은 맘이 들 때 멈출 수 있는 힘, 들끓을 때 배움이 일어난다. 들끓는 지점 교차하는 지점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바로 한끝차이라는 것이다.

구도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보신(保身)을 위해 문장을 쓰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선택한 이용휴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으므로 오로지 문장에 집중할 수 있었다. 병약한 신체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신체에 맞는 생활로 가늘고 오래 살았다. 그 어떤 것도 결핍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 그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서 했던 것이다.

혜환은 문장가가 아닌 그 무엇이 되기 위해 글을 쓸 생각은 없었다. 글 쓰는 자체가 이미 무엇이 된 것이다. 남과 다른 ‘나’가 되는 길 그 것이 문장가의 길이었다. 문장가는 특별한 뭔가가 아닌 미세한 차이 성인의 그림자를 밟고 올라 왔지만 그림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 뜻 갈 길을 찾아 가야 한다.

혜환은 마음의 이치를 따르면 된다고 한다. 정말 하고 싶은가. 행할 때 마음이 편한가를 묻고 따져야 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누구 때문도 아니요 인정받기 위해서도 아니요. 오직 나의 충만한 생명 의지를 따를 것. 혜환이 글을 쓰는 이유이자 글을 쓰는 방법이다.

혜환이 글에서 다름을 추구했다는 것은 자기만의 목소리로 자기만의 세계를 찾았다는 뜻이지 글의 종류나 글의 소재 혹은 글을 건네는 대상이 파격적이란 말이 아니다. 혜환은 세상 사람과 다른 문체로 남들이 추구하는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로 세상과 접속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다.

혜환은 평상의 삶속에서 진리가 있고 도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니 구도의 장소나 방법이 어디 저 멀리에 있지 않다. 앉은 그 자리 생활하는 그 장소가 바로 구도의 공간이며 공부하고 생각하고 일하는 그 때가 구도의 순간이다. 구도의 길은 그 자리 그 순간에 있다. 혜환은 구도를 신비하고 초월적인 어떤 행위로 보지 않는다. 매우 일상적이고 간단하다.

‘행교유거기’에서의 협소하고 누추한 방에서도 가능하다고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작은 방에서 구도해야 한다고. 구도는 방안에서 즉각 이루어 질 수 있다. 왜? 구도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즉각적으로 생각을 바꿔라. 생각을 바꾸면 나는 좁은 방에서도 저 사해 밖을 주유하며, 천지자연의 이치를 깨칠 수 있다.

협소하고 누추한 방을 편안하게 여긴다면 분명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일 것이고 세상과 다르게 만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삶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듯 구도는 간결하고 평이하다. 그러나 구도행위를 당장 방안에서부터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건 구도의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단지 구도 행위를 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도의 관해 다른 방법을 묻는다면 그건 안하려는 핑계거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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