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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기 다섯번째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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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맥박 작성일19-11-18 22:00 조회9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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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 : 건강한 선택, 가치있는 선택 

 

* 개요


서론. 자신을 위한 선택

-선택과 책임

 

본론. 고귀한 자들의 해석

- 동정과 연민의 위험성

- 원한과 가책의 실체

- 원죄와 무책임성

 

결론. 건강한 선택, 가치있는 선택

- 자유의지와 자유정신 차이

- 해석의 힘, 건강한 힘


 

 

‘병’에 대한 내용이 많이 빠져서... 씨앗문장채취를 다시 했습니다..;;
 
 

네가 보다 섬세하게 사유하고, 더 잘 관찰하고, 더 많이 배웠다면 너의 “의무”와 너의 “양심”을 어떤 상황에서도 더 이상 의무와 양심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 도대체 매번 도덕적 판단이 어떻게 생겨나는가에 대한 통찰은 이 비장한 말들을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다. (...) 자신의 판단을 보편적 법칙이라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기심이다! 그것도 맹목적이고 쩨쩨하고 소심한 이기심이다 : 왜냐하면 그것은 네가 ‘너 자신’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 너의 고유한 독자적인 이상을 아직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즐거운 학문> 단편335.물리학이여 영원하라! p.305~306』

-> 니체는 섬세하게 사유하지 못하고 관찰하지 못하면 자신의 이기심으로 행한 것을 의무나 양심이라 붙이는 보편적 도덕 법칙을 들이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역으로는 자신이, 자신의 독자적인 이상, 다시 말해 자신의 독창적 가치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말한다.
 

타인의 고뇌에서 본래의 개인적인 것을 박탈하는 것이 동정이라는 감정의 본질이다. 우리를 위한다는 “선행자들”은 우리의 적들보다 더 우리의 가치와 의지를 왜소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대부분의 선행에는 동정을 베푸는 자가 운명을 연출하는 지적인 경박함이 있어 우리를 격분하게 한다. (...) 너와 동일한 고뇌, 동일한 희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네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 네 친구들에게만 도움을 주라! 그것도 네가 자신을 돕는 방식으로만: - 나는 그들을 더 용감하고, 더 인내하고, 더 소박하고, 더 즐겁게 만들어 주고 싶다! 나는 오늘날 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저 동정의 설교자들은 거의 알고 있지 못한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고 싶다:-함께 나누는 즐거움을!『<즐거운 학문> 단편338.고뇌에의 의지와 동정하는 자. p.310~312』
 
-> 니체는 동정에 대한 섣부른 연출을 경박하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돕는 방식으로만이 나누는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귀한 부류의 인간은 스스로를 가치를 결정하는 자라고 느낀다. 그에게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나에게 해로운 것은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다”라고 판단한다.(...)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한다. 이러한 도덕은 자기 예찬이다. 그 전경에는 충만한 감정과 넘쳐 흐르고자 하는 힘의 느낌, 고도로 긴장된 행복과 베풀어주고 싶어하는 부유함의 의식이 있다: 고귀한 인간 역시 불행한 사람을 돕지만, 그러나 거의 동정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넘치는 힘이 낳은 충동에서 돕는다.『<선악의 저편> 단편260. p.276』
 
-> 고귀한 자들은 그들 자신에게 해로운 것과 아닌 것의 구분으로 가치를 창조한다. 또, 그들의 동정은 그들의 충만한 감정과 넘쳐흐르는 힘에서부터 비롯된다. ‘의지’나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부채감을 형성하는 것은 더더군다나 거리가 먼 긍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고귀한 사람이나 용기 있는 사람들은 다만 타인에 대한 동정이나 행위에서 또는 무관심 속에서만 도덕적인 것의 특징을 보는 도덕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 ‘무아(無我)’를 근본적으로 적대하고 조소하는 것은 공감이나 ‘따뜻한 마음’을 가볍게 경멸하거나 경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히 고귀한 도덕에 속한다.『<선악의 저편> 단편260. p.277』

-> 무아(無我)는 ‘자기부정’의 의미로 불교의 무아의 뜻과는 다르다고 했다. 고귀한 사람, 용기있는 자들이 도덕을 보는 시선은 따뜻한 마음을 가볍게 경멸하듯 일반적인 것과는 다소 상반된다.
 

고귀함의 표시 : 우리의 의무를 모든 사람에 대한 의무로까지 끌어내리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자기 자신의 책임을 양도하려고 하거나 분담하려고 하지 않는 것. 자신의 특권과 그것을 행사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들 가운데서 생각해보는 것.『<선악의 저편> 단편272. p.297』 

-> 고귀한 자들은 자신의 의무와 책임은 물론 그들 자신의 특권 역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다.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고귀함이란 단어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 고귀함을 향한 이러한 갈망은 고휘한 영혼 자체를 갈망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 고귀한 영혼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떤 근본적인 확신이며, 구할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으며 아마 잃어버릴 수도 없을 그 무엇이다. 고귀한 영혼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선악의 저편> 단편287. p.305』
 
-> 고귀함이란 주변과의 관계에서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 성찰하는 것.
고귀함의 중심에는 '자기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다.
  

나는 이것이 마음에 든다. 나는 이것을 내 것으로 하고 이것을 보호하고 모든 사람에게서 지키고자 한다"(...)천성적으로 주인인 인간, 그러한 인간이 동정을 가지고 있다면, 정말이다! 이러한 동정은 가치가 있다! 그러나 고통받는 자들의 동정이 무엇이 중요한가! 또한 더욱이 동정을 설교하는 자들의 동정이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오늘날 거의 유럽 전역에서는 고통에 대한 병적인 민감성과 신경과민이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탄식에서의 불쾌한 무절제가, 종교나 철학적 허튼 소리로 스스로를 어떤 뛰어난 것으로 꾸미고 싶어하는 나약함이 있다. - 어떤 형식에 맞는 고통의 우상화가 있다. 그러한 열광자 그룹에서 '동정'이라 불리는 유약함이, 내 생각에는 언제나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우리는 이러한 가장 새로운 종류의 악취미를 강력하고도 근본적으로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내가 바라는 것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가이 사버'라고 하는 훌륭한 부적을 독일인들에게 명료하게 설명한다면, '즐거운 학문'을 가슴과 목에 걸었으면 하는 것이다. 『<선악의 저편> 단편293. p.309』

-> 니체는 자신의 가치를 만들고, 그러한 자신의 욕망을 실천하는 자들, 천성적으로 '자신'이 주인인 인간의 동정만이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고통받는 자들의 동정이나 동정을 설교하는 자들의 동정이란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의존적이거나 무절제하고, 신이나 도덕을 숭배하는 형태의 나약함이 깃든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새로운 종류의 악취미'라고 말한다. 때문에 니체는 학문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쾌한 상태, 중독적 쾌락과는 다른 흥분이나 동요되지 않는, 고통을 필연성 속에서 이해하는 통찰로써의 배움을 부적처럼 간직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어떤 심리학자가 공들여 골라낸 경우나 인간에게로 방향을 돌리게 되면 될수록, 그만큼 동정 때문에 질식하는 위험은 더 커지게 된다:그에게는 다른 이간 이상의 냉혹함과 명랑함이 필요하다. 보다 높은 인간이나 이상한 기질을 가진 영혼이 타락하고 몰락하는 것은 말하자면 일반적인 일이다:항상 이러한 일반적인 일을 주시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 연민은 한결같이 자신의 힘을 잘못 보고 있다. 여성은 사랑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이것은 여성의 고유한 믿음이기도 하다. 아, 마음을 아는 자는 가장 훌륭하고 깊이 있는 사랑마저도, 얼마나 빈약하고 어리석은지, 얼마나 무력하고 불손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구원하기보다는 파괴하기가 쉬운지를 알아 챌 것이다! 『<선악의 저편> 단편269. p.292~294』 

-> 니체는 단편 269에서 동정이나 연민으로부터 추동되는 감정들이 자기파괴에 대한 시도요,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원인이라고 하거나 자기자신에 대한 믿음을 먹어치우게 되고 종국에는 죽음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때문에 이 고통스러운 연민의 감정에 매달릴 필요가 있는가하고 되려 반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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