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기 5주차 의역학 수업 후기 - (한낮의 우울) 두 번째 수업 > 일요 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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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기 5주차 의역학 수업 후기 - (한낮의 우울) 두 번째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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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긴홉 작성일19-11-13 22:01 조회1,4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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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낮의 우울’ 중 5~8장과 관련 된 발제와 의문점들을 서로 이야기 나누었다. 5장의 제목은 환자들, 6장 중독, 7장 자살, 8장 역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5장의 환자들에서는 생물학적 차이 아니면 사회적 차이로 말미암아 우울증의 특징들이 결정되는가 질문하고 있다. 특히 여성이 남성보다 2배 정도 우울증에 더 걸린다고 한다. 여성은 남성이 겪는 우울증 외에도 산후우울증, 월경전증후군, 폐경기우울증을 더 겪게 된다. 일성에 중장년층의 여성들이 많다보니 월경전증후군으로 겪게 되는 신체적 변화나 정신적 우울감에 관한 이야기들을 자연스레 나누게 되었다.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의 저자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월경을 ‘보고서’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우리 몸의 상태와 삶의 모습을 알려주는 보고서이며, 우리는 500번의 보고서를 받게 된단다. 월경이 그런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에 새삼이 크게 수긍이 됐다. 정신을 잃을 정도의 통증을 동반했던 젊은 시절, 도대체 내 삶의 모습이 어땠는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6장과 7장에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약에 취했을 때 멋진 아이디어들이 떠올라 글이 잘 써지고’, ‘무한한 에너지와 빠른 정확성 등’을 약을 통해서라도 얻고자 하는 욕구가 발제자의 질문거리였다. 하워드 새퍼(하버드 의대 중독과 과장)는 ‘중독’을 어떤 대상에 대한 생리학적 반응이라기보단 의존성을 키우는 해로운 어떤 것을 계속 반복하고자 하는 어쩔 수 없는 욕구로 정의했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가 욕망하는 ‘무한한 에너지와 빠른 정확성’등은 자본주의의 꺼지지 않는 밝은 빛을 연상시킨다. 결국 밤을 없애고 생명을 고갈시키는 강렬한 불빛과 조명, 그런 빛을 향한 갈망이 어둠(우울)을 더 크게 키워가는 것은 아닐까? 세 번의 우울증 삽화를 겪은 저자야말로 강렬한 빛이 내리쬐는 삶에 대한 동경과 그런 삶으로 말미암아 중증의 우울증을 겪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7장의 자살과 관련해서는 학우들의 질문과 의견이 많았다. 특히 저자가 분류한 네 종류의 자살 중 합리적인 자살은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더불어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자는 합리적인 자살을 가능케 하면 충동적이고 무분별한 죽음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합리적인 자살을 선택할 수 있기때문에 지금 당장 자살에만 매달리지 않을 수 있고, 합리적인 자살을 할 수 있는 순간을 생각하며 삶을 좀더 잘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저자가 말하는 합리적인 죽음이란  삶의 기쁨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현재의 고통을 보상하기에 불충분 하다고 믿을 때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난소암에 걸려서 2년을 살다간 저자의 어머니의 자살을  합리적인 논리에 따른 자살이라고 예를 들고 있다. 지금도 나는 ‘자살’이란 낱말에 ‘합리적인’이란 수식어가  붙어도 되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학우들은 삶의 존엄성이란 각 개개인의 죽음의 선택권이 보장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8장에서는 우울증이 현대인의 병이라고 여기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시각이라고 말한다. ‘ 이 세상의 눈물의 양은 항상 일정하다’고 말한 사뮈엘 베케트의 말을 빌려 우울증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겪었지만 ‘산속의 부족들만큼(산만큼은 아니더라도)’ 오래되었다고 한다. 서양의 우울증의 역사를 ‘히포크라테스, 중세암흑기, 르네상스 시대, 17~19세기, 현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어느 시기에는 우울증을 ‘기질’과 같은 인간의 다양성으로 바라보았다면 현대는 우울증을 병증으로 바라보고 있다.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에서 우울증은 정상이 아닌 상태이다. 우리는 언어 덕분에 상황이나 사태를 이해하고 정의하고 다룰 수 있는 반면 그 언어가 갖는 규정력에 스스로 갇히기도 한다. 역사를 살핀다는 것은 그런 규정력의 밖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지난 시간에 이어 ‘한낮의 우울’의 저자 ‘앤드류 솔로몬’를 이번에도 만났다. 만났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자신의 경험담을 세세하고 솔직하게 그리고 저자가 다른 사람을 면담한 내용을 상세하고 전하고 있다. 지난 시간에 이어 나는 여전히 그의 삶에서 바라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 – 예를 들면 무한한 에너지나 중증 우울증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자신의 소설낭독회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없다. 내 삶의 방식 또는 방향과 미묘하게 엇갈리는 듯 하다. 남은 장들을 읽어 마지막 장 12장에 다다라서 그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뭔지 알게되면 이 미묘한 느낌들이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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